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16)
216화
“펠릭스 에스페란자 대공 드십니다!”
– 들라 하라.
기사의 목소리에 이어 들려온 대답에 검공은 문을 열고 집무실로 들어섰다.
그러면서 다시 심중의 말을 골랐다.
지난 반년간 꾸준히 해 온 것처럼.
‘폐하를 설득해서 로건과 화해를 시켜야만 해.’
그것이 왕과 왕국을 위한 것이다.
그는 그렇게 다짐하며 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물론 국왕은 검공이 그리 달갑지 않은지, 책상 위의 서류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무심하게 답했다.
“또 오셨소, 대공.”
무표정한 얼굴에서 나오는 차가운 목소리.
그러한 반응은 이미 예상한 것이었기에 검공은 그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예, 폐하. 일주일 만에 문안 인사를 드립니다.”
“나이도 젊은 나의 문안을 왜 이리도 자주 오시는지. 대공, 이 사람은 좀 부담스럽소이다.”
그만 좀 찾아와라.
왕이 그 말을 길게 돌려 말하고 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검공은 여느 때와 똑같은 미소로 가볍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신하로서 어찌 군주를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늙은 신하의 노파심이라 생각하시고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쉰 왕이 그제야 들여다보던 서류를 뒤로하고 검공에게 얼굴을 돌렸다.
“또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이번에도 같은 말씀을 하시려거든 그냥 일찌감치 일어서시는 것을 권하고 싶소이다.”
“그 같은 말이옵니다, 폐하.”
“대공!”
“하지만 이번에는 적합한 구실이 있습니다.”
“……구실이라니요?”
“곧 폐하의 탄신일이 다가오지 않습니까. 그날 로건을 왕궁으로 초청하시지요.”
“대체 그게 뭐가 적합한 구실이라는 말이오? 내가 싫다는데!”
“폐하께서 로건에게 숙이고 들어가는 모양새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하! 그게 무슨…….”
코웃음을 치고는 있지만, 검공에게는 흔들리는 왕의 눈빛이 또렷이 보였다.
지난 반년간의 꾸준한 설득 끝에야 왕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뭔지 조금은 알게 된 것이다.
너무도 유치하다 생각해서 오히려 눈치채기 힘들었던 것.
그건 바로 자존심이었다.
“단순히 그것만으로도 폐하와 로건이 화해를 했다는 제스처를 외부에 보이는 것이 될 것이며, 또한 로건이 폐하의 탄신일을 축하하며 고개를 숙이는 모양새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왕의 눈빛이 조금 더 흔들리는 것을 보며, 검공은 그 자리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고.
그를 보는 왕의 눈빛은 여지없이 흔들렸다.
“폐하.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로건과 화해를 하시고 믿음을 주신다면, 로건은 폐하의 검이 되어 이 나라의 백 년 번영을 이끌 것입니다. 늙은 신하의 마지막 청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무릎을 꿇은 검공의 목소리가 집무실에 가득 울려 퍼지고.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왕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뱉었다.
“하, 하하. 흐. 내가 확실히 못난 왕인가 봅니다.”
“예?”
“신하와의 화해라. 그 당연히 해야 할 일로 대공이 무릎까지 꿇게 했으니까요.”
“아, 아니 그렇게 말씀하실 필요까지는…….”
갑작스러운 왕의 사과에 놀란 검공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데.
“대공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그리하겠습니다. 하지만 로건 공의 생각 역시 대공과 같을지는 좀 염려되는군요.”
“로건 역시 항상 이 나라의 미래를 염려하는 충신입니다. 폐하께서 손을 내미신다면 기꺼이 잡을 녀석이지요. 설령 그럴 생각이 없다 해도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그렇습니까. 하면 나는 대공만 믿겠습니다. 그리하시지요.”
“감사합니다, 폐하. 제가, 제가 즉시 로건에게 연락하겠습니다.”
좀처럼 보기 드문, 부드러운 왕의 미소에 검공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 * * [왕궁에 들어가기 전 테만 백작가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그 전의 행적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나오지 않는다고?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다는 뜻인가?”
[예. 죽은 테만 리버만 자작은 빈민가에서 똘똘한 아이를 하나 데려왔다고 기록해 놨습니다만, 그 자작은 실수로라도 빈민가에 들릴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증언이 많습니다.]“……그래?”
통신구 너머 데미안의 보고에 로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문제라면 이미 관련자가 다 죽어 버려서 이 이상 확인이 어렵다는 것입니다.]“관련자가 전부 죽었다?”
[당시 리버만 자작가의 직계가 모두 사망해서 클레오 그자가 가문을 이은 것입니다.]“점점 더 수상하군. 더 확실히 알아봐. 과거를 알 수 없다면 현재 동태에서 수상한 점을, 특히 왕과 관련해서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데미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추가적인 정보를 받기도 전에 로건은 자신을 수도로 부르는 통신을 받게 되었다.
“스승님?”
[폐하께서 이번 생신에 너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 그동안의 일을 사과하시겠다는구나.]“예? 그럴 리가요?”
[아니. 폐하의 표정은 진심이셨다. 이 늙은이가 꾸준히 왕실에 드나들었던 게 헛고생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그러니 나를 봐서라도 수도로 올라오거라.]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충언만으로 바뀔 마음이었다면 애초에 그런 개수작을 부리지 않았을 겁니다, 스승님.’
만약 예상대로 클레오라는 놈이 왕의 곁에서 계속 수작을 부리고 있다면 더욱.
“죄송합니다, 스승님. 제가 좀 바빠서…….”
그리 생각하며 로건은 내키지 않는 티를 팍팍 냈지만, 스승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로건. 이 스승의 부탁이다. 나를 생각해서라도 꼭 올라오거라. 폐하께서 정말 변하신 것 같다.]하아.
‘스승님이 저리 원하시는데…….’
그리고 혹시라도 왕의 마음이 변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 찜찜하기 그지없는 왕과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점차 마음이 바뀌었다.
[로건. 폐하께서 어렵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셨다. 이 상황에서 네가 폐하를 거절한다면 또다시 분란의 씨앗을 심게 되는 거야.]게다가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스승의 표정 때문에라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곧 찾아뵙지요.”
[그래. 잘 생각했다. 수도에서 보자꾸나.]‘이번이 마지막이다. 혹시나 이번에도 왕의 수작이라면…….’
검공의 기대와는 조금 다른 마음으로, 로건은 다시 수도행을 결정했다.
그리고 불과 일주일 뒤.
“스승님께서는 안에 계신가?”
“예. 기다리고 계십니다.”
로건은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저택이나 왕궁이 아닌 스승을 찾았다.
왕의 생일이라고 해서 성대하게 축제를 열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왕궁의 심처에 왕실의 식구들이 모여 조촐하게나마 축하연을 여는 것이 그란디아 왕실의 전통.
하지만 로건에 의해 왕실 직계 대다수가 참살당한 지금의 왕은 그간 가까운 신하들을 불러들여 가벼운 만찬을 하는 것으로 생일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신하들이라는 게…….
‘그 클레오라는 놈 하나와 호위기사들 정도란 말이지.’
사실상 대신 중에는 그 한 놈하고만 함께했다는 뜻이었다.
그 정도라면 놈은 단순히 내궁부장 정도가 아니라 현 왕의 최측근이라고 봐야 했다.
그리고 만약 왕의 변화에 놈이 연관되어 있다면.
‘반드시 없애야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로건은 어느새 스승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스승님. 로건입니다.”
– 들어오너라.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전보다 확실히 밝아진 표정의 스승이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무거운 표정의 로건이 말을 꺼내자마자 금세 사라져 버렸다.
“클레오, 그자가 수상하다?”
“예. 과거를 조사해도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 과거를 알 만한 인물들도 모두 죽었구요.”
“하면 네 생각은…….”
“그놈이 폐하의 곁에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과거가 불명확하다 하여 너무 지나친 추정을 하는 것 아니더냐?”
“경계했는데 아무것도 아니라면 차라리 다행이지요. 하지만 스승님, 폐하께서 단기간 사이에 너무 많이 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요인으로 저는 다른 이유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네가 그놈을 주목한 이유는?”
“죄송하지만, 폐하의 곁에서 제 손이 닿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허…….”
지나치게 직설적인 제자의 말에 검공은 잠시간 말을 잃었다.
하지만 제자의 말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닌지라, 그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사해 보고 아무것도 아니라면 차라리 다행이겠지. 알겠다. 나도 신경 써서 조사해 보마.”
“감사합니다, 스승님.”
“아니다. 너도 내 요청을 들어주었는데 이 정도야 괜찮겠지. 폐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
로건은 그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바로 왕궁으로 가겠느냐?”
“예. 오늘은 오랜만에 스텔라와 시간을 보내도 될까요?”
“하하하. 그래, 안 그래도 스텔라가 말이 많이 늘었다. 가끔 널 찾기도 하고.”
“정말입니까?”
“농담이지.”
“…….”
좀처럼 보기 힘든 로건의 표정에 검공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사실이다, 이 녀석아. 안 그래도 오늘쯤 온다고 말해 놨으니 한껏 기대하고 있을 거다.”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잊고 있었던 것이 있네요. 제국에 있을 때 주교에게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음?”
왕과의 갈등 문제에 비하면 아직은 사소한 일들.
스승과 제자는 가슴 속에 자리한 가장 커다란 걱정을 잠시나마 내려놓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그날 하루를 보냈다.
* * *
“로건 맥라인 백작님과 펠릭스 에스페란자 대공 각하 드십니다.”
– 들라 하라!
좀처럼 드문 왕의 밝은 목소리와 함께 집무실의 문이 열리자, 왕의 상석 바로 앞 너른 공간에 차려진 만찬이 보였다.
셋이 아니라 서른 명이 먹어도 될 것 같은 궁중 연회용의 화려한 상차림이었다.
그 뒤에서, 왕이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로건 공. 그간 격조했습니다.”
벌떡 일어서며 다가오기까지 하는 왕.
그에 로건도 어색하게나마 웃으면서 왕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이리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아아, 검공. 그리 예를 차리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자리에 앉으세요. 좋은 날 과한 예의를 받고 싶지 않습니다.”
“……예. 폐하.”
그렇게 시작된 자리.
생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그란디아의 풍습에 따라 선물도 준비하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이어졌다.
“한잔 받으세요, 로건 공. 그간 이 못난 사람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 아닙니다.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쪼르륵.
들어 올린 술잔에 가득 채워지는 술.
혹시 독이라도 들었을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깔끔한 맛이 일품인 술이었다.
‘정말 진심이란 말인가’
로건의 복잡한 내심과는 다르게, 왕은 그가 술을 받아 마시자마자 바로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자, 나도 한 잔 따라 주시오. 내 사과의 의미로 벌주 석 잔을 받겠습니다.”
“하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왕의 사과에 로건이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고.
“로건 공이 아니었다면 이 부족한 사람이 어찌 왕이 되었겠습니까. 벌주를 받아야 맞습니다. 자, 더 주시지요.”
이어지는 의외의 말에 다소 형식적이었던 로건의 웃음에도 조금은 진심이 섞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술잔을 주고받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오고 가는 덕담 속에서 로건에게 받은 술잔을 한입에 털어 마신 왕의 얼굴색이 일순간 이상하게 변했다.
“로건 경? 이, 이게 무슨……?”
“……폐하?!”
갑작스레 소리를 지른 검공의 시선이 왕의 얼굴에 박히고, 어느새 푸르스름하게 변한 왕의 얼굴에서 코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피, 피가?!”
“이, 이게 무슨? 로, 로건 공! 설마?!”
파리하게 질린 얼굴의 왕이 무서운 눈으로 로건을 노려보더니.
“끄으으. 어찌 이, 이런 짓을…….”
이내 분노한 얼굴로 로건을 가리키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리고.
“폐하!”
“폐하께서 쓰러지셨다!”
“사제를 불러!”
“로건 님. 잠시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놀란 얼굴로 검을 빼 든 호위기사들이 다가올 때까지, 로건은 굳은 얼굴로 쓰러지는 왕의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