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25)
225화
“회전의 소식을 들은 것이 불과 3일 전인데, 그 기간이 이리 기다리기 힘들 줄은 몰랐다. 로건 맥라인.”
옥좌 위에서 술잔을 들어 올리는 왕의 얼굴에는 언뜻 광기까지 어려 있는 듯했다.
자신의 주위를 포위한 맥라인의 기사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 오직 로건만을 바라보는 눈길.
그 눈길을 받으며, 로건은 다소 굳은 안색으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저벅저벅.
그러고는 왕의 바로 앞에 멈춰 서서 그의 푸른 눈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핏발이 서 있기는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
짐작과는 달리, 약에 취한 사람의 눈빛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연스레 질문이 나왔다.
“……대체 왜 이런 일을 저지르신 겁니까, 폐하.”
너 때문에 모든 것이 틀어질 뻔했다.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로건은 심중에 이는 살기를 전혀 숨기지 않았다.
‘약에 취한 것이 아니라면…….’
제정신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거라면, 그게 더 문제다.
“폐하? 폐하라, 이 지경이 돼서도 그리 칭해 주는 건가. 이거 영광이군.”
하지만 초인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은 왕은 파리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도 빈정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약에 의존하는 자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
왕을 바라보는 로건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계속 그리 불리실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랬겠지. 네 말만 듣고 꼭두각시처럼 산다면 말이다.”
“나라를 위한 길입니다.”
“나라? 너를 위한 길이겠지. 말도 안 되는 핑계 대지 마라.”
“정말 핑계라고 생각하십니까?”
차분하게 굳은 안색.
붉은 눈 속에 이글거리는 기세.
초인의 기세를 다시 마주한 왕의 안색이 조금 더 파리해졌다.
하지만.
왕은 이내 이를 악물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라를 위한다는 핑계로 신하가 모든 권력을 쥐고 놓지 않는다? 하, 그런 자들을 역사가 뭐라 부르는지 아느냐? 너 같은 자들을 바로……!”
파리했던 얼굴이 어느새 시뻘겋게 달아오른 왕이 잠시 로건을 노려보다 말을 이었다.
“……간신이라 한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로건의 멈칫하는데, 왕이 피를 토하듯 다시 한번 소리쳤다.
“아니면 폭군이라고 불러 줄까, 로건 맥라인? 이제 나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될 간신이여! 크하하하!”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웃는 왕의 모습에서는 모든 것을 포기한 자의 광기가 엿보였다.
하지만 로건은 흔들리지 않았다.
“폭군이라……. 신하가 거슬린다는 이유로 전란을 일으킨 왕이야말로 진정 폭군이겠지요.”
약에 취해 사리 분별을 못 할 수준이었다면 차라리 유폐를 시킬지언정 목숨은 붙여 놓을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스르릉.
‘죽인다.’
로건의 붉은 눈에 불꽃이 피어오르고, 뽑아 든 검에서는 황금빛 오러가 타올랐다.
하지만 왕은 초인의 오러를 눈앞에서 접했음에도 겁을 집어먹기는커녕 무엇이 그리도 우스운 것인지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크크크크. 그래, 그게 네 본성이지. 내가 거슬리니 죽여 놓고 보겠다는 것 아니냐. 행동처럼 말도 솔직하면 얼마나 좋을까. 낄낄낄.”
“……이 상황을 자초한 것은 폐하이십니다.”
분노를 간직한 채 내뱉은 말에 킬킬거리던 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 내가 자초하였다? 웃기지 마라, 로건 맥라인! 솔직하게 말해 보자. 이게 정말 나라를 위한 것이냐? 그냥 네 욕심이 아니라?”
하지만 그 분노 어린 고함에 이어진 대답은 싸늘한 칼날 같았다.
“제게 욕심이 있었다면 애초에 폐하를 왕위에 올리지도 않았겠지요.”
“꼭두각시가 필요해서였겠지! 내가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았더라도 넌 언젠가 나를 죽이지 않았겠느냐? 왜? 내가 네 뜻을 따르지 않으니까!”
“뜻을 따르지 않는 게 아니라 개수작을 부린 거겠지요! 먼저 선을 넘은 것은 폐하이십니다!”
서로에게 고함을 치며 마주 보는 두 사람.
붉고 푸른 두 눈에는 똑같이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선? 선을 넘어? 왕인 내가? 아니, 선을 넘은 건 네놈이겠지! 스스로를 돌아봐라! 그게 신하라는 놈이 할 소리냐!”
“자해까지 해 가며 신하를 함정에 빠트리는 군주에게 무슨 말인들 못 하겠습니까!”
“웃기지 마라! 네가 이 나라를 가지기 위함이겠지! 내가 계속 네 뜻을 거부해도 정녕 살려 둘 생각이었나? 왕이니까? 응? 대단하신 로건 맥라인 경, 대답을 해 보게!”
그 말이 로건의 눈에 타오르는 불꽃을 크게 키웠다.
– 네가 왕이 되려는 것은 아니고?
쓰러진 스승이 남겼던 마지막 물음.
쉽게 대답하지 못했던 그때의 질문이 다시 떠오르게 했으니까.
제국에 가기 전이었다면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나는 왕이 될 생각이 없다고. 모두가 협력하여 제국을 막아 낼 길을 찾으면 된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제국에 맞설 준비에 방해가 되는 놈은 치운다. 그것이 설령…….’
왕일지라도.
방해자는 그 누구도 용납하지 않겠다.
가슴속에 타오르는 불꽃이 명확한 답을 말해 주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제국의 저력을 직접 보고도 미적거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의 심리를 왕이 이해할 리 없었다.
“아니, 설령 내가 네 말에 잘 따랐더라도 언젠가는 이렇게 나오지 않았을까? 대체 내가 언제까지 불안에 떨며 네놈의 우리 안에서만 살아야 하냔 말이다!”
분노에 차 광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왕.
자신이 제위에 올린 왕.
그리고 이제는 제 손으로 끌어내리고자 하는 왕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내가 왕에게 위협이 되었다?’
이해는 한다.
그런데 그래서 뭐?
로건은 이를 갈며 앞으로 나섰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여기까지 와서 다른 길을 택할 수는 없었다.
이제 와 왕과 화해하고 협력해 본다?
다른 왕을 세우되 실권을 빼앗고, 자신이 통제한다?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 일어난 불행한 사태의 원인은 알았다.
그러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내가 직접 모든 것을 움직이겠다.’
붉은 눈동자에서 피어난 불꽃이 황금빛 오러가 되어 검에서 타올랐다.
“그것이 이런 일을 벌일 핑계는 되지 않습니다, 폐하!”
살기가 가득 어린 고함이 대전에 울려 퍼지며 왕을 압박하자, 왕이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폐하. 폐하라. 흐흐흐.”
저벅.
“나라를 위하느니 뭐니 그런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라, 로건 맥라인. 그냥 이 나라를 손에 넣고 싶다고! ”
저벅저벅.
“같잖은 위선 떨지 말고 그냥 죽이란 말이다! 크크크크. 그래, 그 눈. 욕망에 불타는 눈! 솔직하고 좋잖아!”
“할 말은 그게 끝이십니까?”
폭언을 토해 내던 왕의 눈빛이 눈앞까지 다가온 칼날 속에서 흔들렸다.
그런데.
“흐흐. 야망을 위해 스승까지 벤 희대의 폭군이 이제 무슨 짓을 할지 참으로 궁금하구나. 내가 그 후를 볼 수 없음이 참으로 아쉽도다.”
저주에 가까운 말을 뱉어 내는 왕의 입가에서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독?!”
로건의 얼굴에 경악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왕은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었다.
“흐, 흐흐흐. 나는 왕으로 죽을 것이다. 내 끝이라도 내가…… 내가 정할 것…….”
왕의 얼굴은 순식간에 거무죽죽하게 변했고, 복잡한 표정의 로건은 한참 동안 죽은 왕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 * * 사방에 창문 하나 보이지 않는 석실 안, 클레오는 품 안에서 주먹만 한 구슬을 꺼내 들었다.
어두컴컴한 석실에서 유일하게 푸른빛을 뿌리는 구슬.
암호화된 마나 패턴을 불어넣자 어스름한 푸른빛이 일렁이기 시작하고, 긴 세월 타지에서 활동한 그를 과거와 연결해 주는 유일한 통로가 이내 익숙한 환영을 투사했다.
그 환영을 보자마자 클레오는 그 자리에 바로 넙죽 엎드려 나직이 말했다.
“까마귀 3호. 임무 보고 드립니다, 전하.”
그 목소리에 엎드린 클레오를 오연한 자세로 내려다보던 환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하라.]“그란디아의 2차 내전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수습되었습니다. 예상했던 최악의 경우보다 훨씬 빨리 마무리된 탓에 피신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구절절한 변명의 말을 준비했지만 돌아오는 물음은 단순했다.
[……왕은?]“……데리고 나오려 했습니다만, 고집이 워낙 강해 실패했습니다. ‘귀신’들을 움직일 상황이 아니라 무력을 동원할 수도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 실패했다……? 그란디아의 혼란이 생각보다 빨리 수습되겠군. 이거 곤란한데…….]“……죄송합니다, 전하.”
통신구 속 인물, 2황자에게서 흘러나온 차가운 목소리에 클레오의 머리가 더욱 깊숙이 내려갔다.
하지만 2황자는 그저 혀를 차며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욱 온기가 없었다.
[곤란해. 곤란한 일이야. 고작 검공을 낙오시킨 것으로 만족해야 하나…….]조용한 어조로 타박하는 말.
하지만 여기에 무어라 말대답을 하는 순간 지옥이 펼쳐질 것이다.
클레오는 더욱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 검공도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한마디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자신에게 불리한 말을 굳이 뱉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심기를 거스르는 순간 죽는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납작 엎드릴 뿐.
“다 소인이 부족한 탓입니다. 처벌하여 주십시오.”
쾅.
석실 안을 울리는 충격음.
바닥에 이마를 찧은 클레오의 얼굴이 흘러내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쾅.
“대계를 일그러트린 죄를 청하옵니다!”
피가 눈썹을 타고 흘러내리는 와중에도 클레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 강렬한 호소가 먹혀든 것일까.
[쯧…….]통신구 속 2황자의 표정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되었다. 선왕을 죽여 1차 내전을 일으킨 공이 있으니 잘못은 그와 상쇄하겠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그놈 때문에 전쟁이 빨리 끝났지. 로건 맥라인이라. 갑자기 어디서 그런 놈이 튀어나와서는…….]‘다행이다.’
대답을 요하는 말이 아니라 그저 다시 고개만 숙이는데.
문득 생각난 듯, 2황자가 불쑥 물었다.
[흔적을 남기지는 않았겠지?]안심한 상황에서 훅 들어온 질문.
하지만 예상한 질문 중 하나였기에 그에 대한 답변은 빨랐다.
“예! 의심은 남겨도 증거는 남기지 않는다. 까마귀의 원칙은 이번에도 완벽하게 지켰습니다.”
처음부터 이것을 노린 질문이었을 것이다.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나도 끝장이겠지.’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있었다.
클레오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의도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자신감의 발현이었다.
“약은 처음부터 쓰지 않았습니다.”
그 말이 의외였을까.
[……쓰지 않았다? 하면 왕은 어찌 조종한 것이냐.]2황자의 대답이 처음으로 조금 늦게 나왔고, 그 얼굴에는 흥미가 가득했다.
“이번 왕은 로건 맥라인에 대한 불안감이 심했습니다. 그것을 좀 더 자극하고 부추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호오? 불안감을 자극했다?]“예. 왕은 로건 맥라인이 언젠가는 자신을 죽일 거라고 걱정했었습니다.”
[……확실히. 로건 맥라인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이들을 용납하지 않았지. 그 칼이 언젠가는 왕을 겨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예, 그렇습니다. 그러니 당사자인 왕의 불안감은 말도 못 했겠지요. 아마 왕은 죽는 순간까지도 제가 그를 자극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을 겁니다. 약은 전혀 필요 없었습니다.”
클레오로서는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한 말이었지만.
[그래. 충분히 가능하지. 권력은 그 자체로 그 무엇보다 무서운 약이니까.]2황자의 반응이 생각보다 시원치 않았다.
그러나 클레오는 경거망동하지 않고 그저 신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한참이나 침묵이 계속된 끝에.
[……작전에 관련된 자료를 모두 챙겨서 루스펠하임으로 오거라. 그것을 검토한 뒤에 다른 지시를 내리겠다.]통신구 속에서 생각을 정리한 듯한 2황자의 음성이 흘러나오자 클레오는 지체하지 않고 답했다.
쿵.
“예, 전하!”
다시 한번 이마로 바닥을 찧은 클레오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석실은 다시금 고요한 침묵 속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