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27)
227화로건 맥라인이 왕을 죽였다.
삽시간에 왕성을 휩쓴 소문은 가뜩이나 살벌하던 분위기를 더욱 얼어붙게 했다.
– 왕까지 죽었으니 이제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니 이런 생각이 퍼져 나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곧 수도의 일반 시민들까지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꺼리게 됐고, 사람들은 이내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 이제 맥라인이 이 왕국의 지배자다.
맥라인 가문이, 그리고 로건 맥라인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수도 안팎의 모든 사람이 그들의 움직임에 주목하는 와중.
세상이 완전히 변했음을 가장 절실하게 체감하는 이들은 아무래도 맥라인 병력에 의해 구금된 수도의 귀족들이었다.
그들이 갇혀 있는 창살 너머로, 죽은 왕에 의해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구 국무대신들이 밝은 표정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보였으니까.
수도의 거리를 점령한 불꽃 문양의 병사들.
그 앞에서 떳떳하게 고개를 쳐들고 돌아다니는 자들은 로건 맥라인 파라고 분류되었던 귀족들뿐이었다.
그렇게 수도를 장악한 맥라인 가문은 며칠 지나지 않아 그런 귀족들을 모두 소집하여 왕성의 대전에서 대회의를 열었다.
– 지금, 이곳에서 앞으로 왕국의 미래를 정하겠다.
듣기만 해도 살이 떨리는 공언.
막중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의제에 이제 칠순이 넘은 늙은 대신, 팔먼 테리히는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맞는가 하는 생각에 연신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감옥 생활 탓에 후유증이 있다고 말하고 쉴 걸 그랬나.’
아예 거짓은 아니었다.
찌릿찌릿하게 저리는 허리.
가슴을 짓누르는 부담감에 그 후유증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그가 그렇게 부담감을 견뎌 내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운데.
“수도와 수도 근처의 귀족들 대다수가 복종의 뜻을 전해 왔습니다.”
“대다수라면 아닌 자들도 있다는 건가?”
“아주 소수 있습니다. 죽은 왕이 국무대신으로 삼았던 자들의 친인척들입니다만, 후작 각하께서 직접 나서셨으니 금방 정리될 것입니다.”
맥라인 가문이 사실상 이 나라를 장악했다는 말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당연하겠지. 항복한 에스페란자까지 전폭적으로 협력하기로 했는데 감히 누가 반항할 수 있을까.’
이제 이 나라엔 맥라인 가문과 비교할 수 있는 세력조차 없었다.
늙은 자신조차 이렇게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마당에, 다른 이들이 그것을 느끼지 못할 리 없다.
“좋아. 그렇다면 이제 이 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논의할 차례군.”
‘임시 섭정’을 자처하며 빈 옥좌의 바로 아래 앉은 로건의 말에 대전은 금세 싸늘한 침묵에 잠겼다.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같았다.
올 것이 왔다.
그리고 그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새로운 그란디아의 왕위에 관한 의견을 받는다. 어떤 의견이라도 좋으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말해 보도록!”
로건의 말에도 섣불리 나서는 이는 없었다.
‘이것 또한 당연한 일이지.’
그 누가 쉽사리 나설 수 있을까.
어떤 말이 나오건, 저 로건 맥라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바로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데.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는 게 느껴졌다.
기존 국무대신 중 최연장자를 바라보는 귀족들의 눈빛에는 모종의 기대가 서려 있었고, 결국 팔먼은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앞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감옥까지 갔다 왔는데 설마 죽이기야 할까.’
사실 이만큼 살았으면 삶에 큰 미련도 없다.
팔먼은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하며 침을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각하.”
“오, 팔먼 공. 말씀하시오.”
덜덜덜.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왜 다리가 떨리는 걸까.
팔먼은 숨을 크게 삼키고 발음이 뭉개지지 않도록 유의하며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란디아 왕실의 방계 혈족을 찾아 직계에 가장 가까운 이를 새 왕으로 옹립하면 어떨까 합니다.”
“허…….”
“어찌 저런 말씀을…….”
“아냐. 일리는 있어, 있는데…….”
웅성웅성.
금세 소란스러워지는 대전.
하지만 팔먼의 신경은 오로지 상석의 로건에게만 쏠려 있었다.
그의 미간이 살짝 좁혀지자 자신의 수명도 그만큼 줄어드는 것 같았고, 흘깃 미소를 짓자 줄어들었던 수명이 다시 늘어나는 것 같았다.
‘그냥 정석을 말했을 뿐인데…….’
분위기는 자신이 뭔가 대단히 잘못 말한 듯한 모양새로 흘러갔다.
하지만 이내.
“흠. 그럴듯한 말이군. 다른 의견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로건을 보며, 팔먼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그 순간, 다른 이가 딴죽을 걸고 나섰다.
“방계의 왕족을 찾는다고 해도 그 혈통의 순서는 어찌 매기겠습니까. 부계? 모계? 아니면 선왕과의 촌수? 지금껏 선례가 없었던 일인만큼 오히려 더 곤란한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좌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나선 또 다른 대신은 아담 모건 자작으로, 처음엔 맥라인 파가 아니었으나 이번 수도 점령전에서 적극적으로 맥라인에 협력했던 귀족 중 하나였다.
‘이자가?’
팔먼이 의문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40대의 젊은 대신이 자신감 어린 어조로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차라리 로건 각하께서 새 왕조를 여시는 것이 이 나라의 만백성을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자 대전이 삽시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싸늘해지는 분위기.
모두가 내심 고려하던 가능성 중 하나지만, 함부로 꺼내기 어려웠던 그 말을 아담 모건이 너무도 당당히 꺼낸 것이다.
‘젊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이미 얘기가 된 것인가.
팔먼의 노회한 머리가 오랜만에 빠르게 돌아갔다.
왕까지 죽인 마당에 로건 맥라인이 왕위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마도 아담 모건의 발언은 이미 맥라인 가문과 합의가 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팔먼이 로건과 자작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는데, 로버츠 플로이드 백작이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
“저 역시 아담 공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휙.
대전 내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로버츠에게로 몰렸다.
“지난 몇 년간, 그란디아 왕실의 혈족들이 왕국에 끼친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천 년 전 영웅의 피는 이미 흐려질 대로 흐려져 피닉스가 아닌 잡새의 핏줄이 되었으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그란디아의 별’이 새로운 왕조를 여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장구하고 예스러운 묘사와 함께 말을 마친 로버츠 플로이드가 고개를 숙이자 대전이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그래도 천년 왕실의 핏줄은 보전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저는 방계의 혈족을 찾아 옹립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새 왕의 역량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로건 각하께서 섭정하시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귀찮은 과정을 거치느니, 직접 통치하시는 게 낫지요. 또 죽은 왕과 같은 문제가 생기면 어찌합니까!”
“그거야 섭정을 하면 해결될 문제입니다!”
“이니, 그러니까 그 불필요한 과정을 왜 거쳐야 하냔 말이오!”
와글와글.
논쟁이 삽시간에 장내 전체로 번져 나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 슬쩍 웃는 로버츠의 얼굴을 확인한 팔먼은 이 과정 역시도 맥라인 가문이 의도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눈 가리고 아웅이군. 명분을 챙기려는 것인가…….’
그 와중에 자신은 이 중대한 논의에 끼지도 못하고 이렇게 눈치만 보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같은 파벌이라 할 수 있음에도 논의에서 아예 제외되었다는 것을 깨닫자 가슴속에 찬바람이 불어닥치는 듯했다.
‘……은퇴해야겠어.’
회의를 시작할 때 느끼던 긴장감은 어느새 씁쓸한 회한으로 변질되어 늙은 대신의 뇌리를 잠식했다.
팔먼이 그런 결심을 하고 있을 때.
“그만! 모두 조용히 하라!”
탕. 탕.
대신들의 논쟁이 점점 과열되는 것을 지켜보던 로건이 무심한 표정으로 소란을 잠재웠다.
“지금은 왕위를 놓고 논쟁할 때가 아니다! 대신들 간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모든 것은 왕국을 안정화한 다음에 다시 결정하겠다!”
오늘은 이만 회의를 끝내자는 말.
하지만 치열한 논쟁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것인지, 바로 반론이 나왔다.
“각하! 일국의 왕위가 비어 있는 기간이 길어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결론을 내리시는 것이…….”
아담 모건.
새로운 왕조를 주창했던 젊은 대신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로건을 바라보았지만.
“자작님. 백작 각하의 말씀을 못 들으셨습니까.”
로건의 아래 기립해 있던 맥라인 기사단장, 디그롬의 싸늘한 한 마디가 다시 분위기를 냉각시켰다.
로건 역시 굳은 표정을 내보이는 것으로 기사단장의 의견을 지지하자, 아담 모건은 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바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저는…… 죄, 죄송합니다.”
– 차기 왕위에 관한 결정은 보류한다.
그날 대전 회의는 그렇게 끝을 고했다.
하지만 회의가 끝난 직후부터, 아담 모건을 위시한 젊은 대신들 사이에서 서명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그란디아의 별, 로건 맥라인 님이야말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할 영웅이십니다. 그분이 직접 왕국을 이끌어야 왕국이 삽니다!
그 주장은 수도를 기점으로 왕국 전역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 이제 완벽한 맥라인의 세상이 왔다.
모두가 그것을 체감하고 있을 무렵.
로건은 다소 마음이 무거워지는 보고를 받았다.
“검공 각하께서 응급 치료를 마치고 수도로 이송되셨습니다.”
“……의식은?”
“상처는 모두 치료되었지만, 아직 의식을 찾지는 못하고 계신답니다.”
“……그래. 가능한 안전한 곳으로 모셔라.”
“……예!”
안전한 곳.
그 말을 입에 담는 로건의 표정은 씁쓸하기만 했다.
토벌군과 반란군의 입장이 뒤바뀌었으니, 이제 토벌군의 수장은 죄인이 되어 감옥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가 말한 안전한 곳 역시 그나마 편안한 감옥일 수밖에 없었다.
“에스페란자에서 나와 만나고자 하면 얼마든지 허락하고, 의식을 찾으시는 대로 내게 기별하라 일러라.”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기사를 돌려보낸 로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무언가 결론을 내린 듯한 로건은 왕국 유일의 마도사, 클레이튼을 왕의 집무실로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예.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예?”
“왕국을 안정화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다른 무력 집단이 남아 있더군요. 그것도 꽤 큰 집단’들’이.”
로건의 말에 클레이튼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의 그란디아에?
맥라인을 거부할 집단이 남아 있다?
‘그렇다 한들, 그런 이야기를 왜 나한테……?’
그가 미묘한 표정으로 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로건이 그 혼란을 정리해 주었다.
“마탑들 말입니다, 마탑들.”
“아……?!”
“마탑들의 명령권을 전부 통합해야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왕국 유일의 마도사이신 클레이튼 님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한 체제를 만들어야지요. 마탑도 왕국의 전력이니까요.”
“……마탑은 관례에 따라 여태 정치적 중립을 고수해 왔습니다만.”
“그 관례, 이제는 없앨 때가 되었습니다.”
“예? 아무리 그래도…….”
클레이튼으로선 곤욕스러울 따름이었지만.
“시작은 대지의 마탑입니다.”
이어진 로건의 말엔 그의 표정도 확 바뀌었다.
“……좋은 생각 같습니다, 공자님. 제가 앞장설까요?”
급격한 태세 전환.
맺힌 게 많은 듯한 마도사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끼며, 로건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