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3)
23화 ‘주군이 막혔다!’
패드릭의 옆에서 돌진하던 헤인켈은 예상외의 광경에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차징이 적 기사 하나에게 중상을 입혔다는 것은 중요치 않았다.
자신들의 두 배에 달하는 적들의 사이를 파고들기 위해선 가주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지금 이대로는 전진해 봤자 자살행위일 뿐이었다.
이를 악물고 말을 돌려 또 다른 기사를 공격했지만, 그조차 쉽지 않았다.
챙!
공격이 막히는 순간, 어느새 그를 목표로 두 명의 기사가 좌우에서 덮쳐 오는 것이 보였다.
나머지 기사들 역시 그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수비 태세로 전환한다! 최대한 뭉쳐라! 기회는 온다!”
적 중에 가주를 막을 기사는 없다. 반드시 돌파구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 기대 하나로 내린 지시였지만, 곧바로 적의 기사 다섯이 가주를 몰아붙이는 믿기지 않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에 생각도 하기 싫은 최악의 미래가 헤인켈의 눈앞에 그려졌다.
‘지는 건가. 전쟁에서.’
노년의 기사 헤인켈은 머릿속이 아득해져 오는 절망감과 먼저 싸워야 했다.
* * * 기사단이 밀리는 과정은 뒤를 따르던 보병들에게도 확연히 보였다.
기사 개개인의 움직임을 정확히 볼 수는 없어도, 아군 기사들의 돌격이 막히고 진형 전체가 뒤로 밀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병사들의 발걸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무거워졌다.
전장의 광기가 조금씩 수그러들고, 그 빈자리를 공포가 채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느려지고 있는 이가 바로 릭이었다.
‘으으으으.’
그는 내성에서 일하는 만큼, 일반 병사들보다는 이 전쟁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알고 있는 만큼 더 무서웠다.
‘가주님이 막히면 분명히 진다고 했는데…….’
자연히 발걸음이 더 무거워지는 와중, 그를 더욱 살 떨리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파바바박.
“으아아아악!”
“끄아아!”
“꺼어억!”
아차 하는 순간 릭의 앞에서 진군하던 병사들이 단체로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화살 비.
릭의 코앞으로도 화살 한 발이 떨어져 꽂혔다.
한 발짝만 더 내디뎠다면 그대로 머리가 꿰뚫렸을 거라고 생각하니 섬뜩함이 몰려왔다.
‘으억!’
전신을 점령하는 공포로 몸이 얼어붙었지만, 뒤쪽에서 밀려오는 아군의 움직임에 릭은 의지와 상관없이 전방으로 떠밀렸다.
“아, 안…….”
겁에 질린 혓바닥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움직였다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터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파랗게 질린 얼굴로 억지 걸음을 떼는 병사들이 보였다.
아마 자신의 얼굴도 저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안 돼, 안 돼, 안 돼!’
패닉에 빠진 릭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보병들은 공포가 완연한 얼굴로도 착실하게 진군해 나갔다.
잠시 후, 결국 최전선에서 보병들이 격돌했다.
카캉! 챙! 쾅!
요란한 금속음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며 전장을 뒤덮는 가운데.
악에 받친 병사들이 서로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죽어라!”
“너나 죽어라, 이 개자식아!”
최전선의 병력이 치열하게 대치한 것도 한순간, 이내 맥라인 진영이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떨어진 사기, 부족한 병력의 수.
모든 것이 불리한 상황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차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참상을 만들어 냈다.
가장 먼저 무너진 전열은 하필 릭의 바로 앞쪽이었다.
“으아아악!”
“내 팔, 내 팔!”
“사, 살려 줘!”
빵집 아들 존의 팔이 잘려 나가고, 양치기 데릭의 심장이 꿰뚫리는 광경이 보였다.
소작농인 펠프스는 단번에 목이 잘렸지만, 편안한 죽음이라기엔 표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보였다.
릭이 너무도 잘 아는 얼굴들이 피로 물들어 바닥에 처박혔다.
그 밖에도 한 번쯤은 본듯한 익숙한 얼굴들이 연달아 쓰러져 가고 있었다.
“으아아!”
전방의 전열이 무너지며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릭은 사신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온 느낌이었다.
연신 비명을 지르면서도 몸이 얼어붙어 제자리에 굳어 버린 순간, 눈앞으로 불쑥 창이 하나 나타났다.
“으악!”
생존본능이 공포를 이겨냈는지,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머리가 있던 자리에 바람처럼 창이 하나 지나갔다.
서늘해진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창대가 그대로 릭의 머리를 강타했다.
“죽어!”
뻐억.
“억!”
쓰러져 뒹구는 릭의 머리 위로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의 적 병사가 창을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으아아!”
푸욱.
릭이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옆으로 굴림과 동시에 창이 바닥에 내리꽂혔다.
간신히 한 번은 피해 냈지만,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죽어! 죽어! 죽어!”
푹. 푹. 푹.
릭은 정신없이 몸을 굴릴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악!”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무슨 철천지원수라도 졌는지 미친 듯이 창을 내려찍는 놈이 원망스러웠다.
푸우욱.
그때, 조금 이질적인 소리와 함께 간신히 놈의 창이 멈추었다.
“얼른 일어나! 창 들어!”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아군.
어디선가 본듯한 얼굴이었지만, 멍한 정신에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이 사람이 자신을 구했다는 것.
미친놈을 처리해 준 은인이라는 것이다.
“가, 감사…….”
푸우욱.
그리고 그 은인은 인사도 채 받지 못하고 목에 구멍이 뚫렸다.
“끄륵. 끅.”
기괴한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은인.
목을 꿰뚫은 화살을 붙잡고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모습이 마치 자신을 원망하는 듯해 소름이 끼쳤다.
“히이이익!”
릭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털썩 주저앉았다.
“도, 도망가야 해. 도망가야…….”
그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앉은 채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던 그는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달렸다.
하지만 그 달리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와아아아!”
“으아아악!”
사방을 가득 메운 비명과 고함이 이제야 귀에 들려오면서 불현듯 정신을 차린 릭이 홀린 듯 멈춰선 채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덧 시야 가득 적의 병사가 들어차 있었다.
‘포위? 지, 지는 거야? 이대로 죽는 거야? 전부?’
전략을 모르는 그의 눈에도 이미 승산이 없어 보였다.
“아, 아니. 살 거야. 난 살 거야!”
그나마 뒤쪽에는 자신과 같은 복장을 한 이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이성적인 판단이 아닌 본능적인 공포심에 창을 내팽개친 릭은 아군을 거슬러 조금이라도 더 후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와아아아!”
“돌진하라!”
릭이 있는 곳보다도 더 뒤쪽, 어느새 전장을 우회해 뒤를 덮친 적의 기마병들이 후미의 병사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뒤, 뒤에도!”
“적이다!”
말 위에서 쏟아지는 참격은 창까지 통째로 잘라 내며 사람의 몸을 장난감처럼 부쉈다.
“어, 어? 아, 안 되는데…….”
앞뒤에서 죽음의 손길을 뻗쳐 오는 사신들.
갈 곳을 잃은 릭의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 * * 꽈아아앙!
장검 둘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 굉음을 만들어 낸 이들 중 하나는 비틀거리고, 하나는 곧바로 자신의 적을 향해 뛰어들었다.
하지만 정작 그 부딪침의 승자인 패드릭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 뒤에 이어질 익숙한 공방의 모습이 바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역시나 비틀거리는 적의 좌우에서 창과 대검이 튀어나왔다.
이어서 자신의 후방을 노리는 장검과 단창까지 매섭게 달려들자, 패드릭은 또다시 다 잡은 기회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놈들! 기사로서 자존심도 없느냐!”
패드릭이 고함을 내질렀지만, 자신도 그것이 헛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적의 반응은 비웃음뿐이었다.
“뭐래.”
“내버려 둬. 죽기 직전 발악이야.”
“이 자식들아 그래도 숙련된 상급기……! 이크!”
살기로 가득 찬 붉은 눈을 번득이며 기합도 없이 휘둘러진 패드릭의 검이 빈틈을 노렸다.
콰아앙!
하지만 그의 검격을 상급 한 놈이 가로막는 사이, 다른 놈들이 다시 사방에서 칼을 휘둘렀다.
스각.
또다시 옅은 상처가 생기고 말았다.
아까부터 반복된 패턴이건만 패드릭은 알고도 이것을 깰 수가 없었다.
채채채챙!
쾅!
쉴 틈도 없이 공세가 톱니바퀴처럼 이어졌다.
얼마나 합을 맞춰 온 것인지는 몰라도 이놈들은 서로 연계하여 강자를 상대하는데 특화된 놈들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패드릭을 잡기 위해 훈련한 놈들이었다.
“지독한 놈들…….”
으르렁거리는 음성으로 한탄해 보지만 도무지 이 덫을 빠져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빠져나간다 해도…… 이미 늦었다.’
발이 묶인 기사단은 수세에 몰린 가운데서도 간신히 버티고 있었지만 이미 일반 보병이 압도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후방의 기마병이 적의 뒤를 잡으려 하고 있지만 그것은 적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적의 기마병은 이미 공격을 하고 있었다.
“으아아악.”
멀리서 들리는 병사, 아니 영지민들의 고통스러운 비명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에 꽂혔다.
‘크흑.’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마땅한 타개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절망 속에서 끌어 올린 미약한 투지는 늘어나는 상처와 전장을 뒤덮은 아군의 신음 앞에 속절없이 흔들렸다.
나약해진 마음이 비겁한 상념을 불러왔다.
‘그래. 로건, 잘 도망쳤다. 가문의 명맥이라도 이어다오.’
서걱.
“윽!”
“남작이 지쳤다!”
“끝장내자!”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간 잡생각이 부상을 불러왔다.
“이놈들…….”
뿌득.
절망감이 머리를 잠식하자 남는 것은 발악에 가까운 오기뿐이었다.
패드릭이 마지막 전의를 불태우며 다시 검을 쥐는데…….
그 실낱같은 전의마저 꺾이게 만드는 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두두두두두.
‘기마대?’
적 군세의 꼬리 쪽에서 질주해 오는 기마대의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울렸다.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죽음을 각오한 마지막 투지에 찬물을 끼얹기에는 충분했다.
‘병력이 더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이 패드릭의 눈을 의심하게 했다.
파바바박!
“으아아악!”
멈추지 않고 적의 후방을 헤집고 다니는 기마대의 모습과 쓰러지는 적의 병사들.
‘아군이라고?!’
적의 후방이 순식간에 혼란에 빠지고 당황한 적 기사들 사이로 패드릭은 보았다.
그 기마대의 선두에서 자신과 닮은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돌진하는 한 청년을.
“로건?!”
흔들리는 패드릭의 시야 속에서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전장의 뒤편 숲속.
테스론의 군대가 지나간 직후, 절묘한 타이밍에 산맥을 크게 돌아 적진의 뒤로 따라붙었던 수백의 기마병이 기척을 숨기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숲속에 숨어 있던 그들이지만, 전투가 시작되자 작게나마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직 아니야. 기다려.”
아버지 패드릭 맥라인의 공격이 막히는 모습을 보며 이를 갈면서도 로건은 침착하게 말했다.
‘저렇게…… 저놈들에게 막혀서 쓰러지신 건가.’
전생에 들었던 정보가 떠오르며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로건은 냉철하게 상황을 주시하며 스스로를 다스렸다.
기사단이 수세에 몰리고 순식간에 포위되며 밀릴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으으음.”
“로건 님? 지금이라도?”
“아니, 아직이야.”
반수에 불과한 숫자로도 맥라인 기사단은 잘 버티고 있었지만 소수의 기사는 그러지 못했다.
재수 없게 랜스 차징이 빗나가며 두 개의 창에 좌우로 강타당한 한 하급기사가 그랬다.
“그롭! 젠장!”
최근에 자신에게 살갑게 다가오기 시작한 몇 안 되는 기사 중 한 명이었다.
물통을 건네며 웃던 모습이 아직 로건의 눈에 선했다.
“로건 님. 괜찮으십니까?”
“……그래. 괜찮아.”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분기에 찬 낮은 음성은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지만, 카이는 얌전히 입을 닫았다.
이미 완벽한 타이밍에 매복에 성공한 것만으로도 이 어린 고용주의 전술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진 것이다.
하지만 보병들이 충돌하고 전열이 무너지는 순간에는 다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로건 님. 지금도…… 아닙니까?”
“아직, 아직이야.”
로건의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 역시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기에 그렇게라도 이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아예 모르는 얼굴들이라 해도 가슴이 아플 텐데 쓰러지는 병사 중에는 익숙한 얼굴이 많았다.
척박한 영지에서도 그나마 귀족의 품위를 지킬 수 있게 해 주었던 정원사 콥이 화살에 눈이 뚫려 쓰러졌다.
이제야 조금 웃으며 인사하게 된 하인, 리오는 쓰러지는 콥을 기겁하며 피하다 적의 칼에 목이 베여 쓰러졌다.
포스코어로 인해 증폭된 감각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아프게 눈을 파고드는 광경이었다.
로건은 그 참혹한 모습을 억지로 외면하며 생각했던 목표들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아직, 아직인 것이냐.’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가문의 전력이 온전하지 못할 듯했다.
로건의 고민이 깊어지던 그때. 드디어 기다리던 목표, 적의 기마병이 그가 원하던 곳에 도착했다.
으아아악!
아군의 후방에서 터지는 비명.
로건의 가슴을 찌르는 듯한 그 외침이 신호가 되었다.
“지금이다!”
참고 참았던 분노를 고스란히 토해 낸 로건이 말을 박찼다.
마침내 지축을 울리며 숲속에서 뛰쳐나간 삼백여 기의 기마들이 전장을 향해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