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30)
230화한 발짝만 내디디면 끝나는 길.
가볍게 고개만 끄덕여도 마무리되는 일.
혹은 그림을 완성하는 마지막 점.
누군가에게는 쉽다면 쉬울 수도 있는 선택들이지만.
내디딘 길의 끝이 절벽일 수도 있다면.
한 번의 끄덕임으로 마무리된 일이 내 인생을 바꿔 버릴 수도 있다면.
마지막에 찍은 점 때문에 그림이 망가질 수도 있다면.
그래도 그리 쉽게 선택할 수 있을까?
로건에게는 지금의 고민이 그랬다.
– 왕이 된다. 혹은 되지 않는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을 알기에 더욱 쉽지 않은 선택.
자신의 인생과 가문의 운명이 바뀔 선택이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고,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도통 결론이 나지 않는 고민에 마음만 심란해질 뿐이었고, 결국 로건은 밤중에 홀로 밖으로 나섰다.
자신이 만들어 낸 계엄령 아래 고요하기 그지없는 거리를 그는 밤새 거닐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어느새 밝아 온 아침 해가 중천으로 넘어가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로.
심각한 안색으로 수도의 거리를 홀로 걷고 있는 붉은 머리, 붉은 눈의 청년.
그 눈에 띄는 모습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종종 청년을 돌아보았다.
‘설마…….’
개중에는 그 특징적인 외모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고민에 잠긴 듯한 청년은 주변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아무런 호위도 없이 방황하는 청년의 모습에 의문을 품었던 사람들도 이내 그 곁을 무심히 지나칠 뿐이었다.
청년을 알아본 누군가가 사색이 되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소리를 지르기 전까지는.
“로, 로건 맥라인 각하! 어, 어찌 이곳에……?!”
화려한 복장의 노신사. 귀족으로 보이는 그가 바닥에 지체함 없이 무릎을 꿇는 광경은 생각에 빠져 있던 청년의 주의를 끌었고, 곧 일대에 크나큰 파장을 몰고 왔다.
“로, 로건 맥라인?”
“그 맥라인?”
“으아압!”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던 이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가까이 있던 이들은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 엎드렸고, 멀리서 그 모습을 본 이들은 숨어서 수군거렸다.
“왕을 죽인 사람……?!”
“일레인 백작가를 식솔 하나 남기지 않고 몰살시켰다는…….”
“눈만 마주쳐도 다 죽인다던데…….”
청년의 귀에 다 들리는 줄도 모르고 자기들 딴에는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떠드는 사람들.
그를 중심으로 거리가 점점 더 소란스러워지자, 수상한 기운을 감지한 사람들은 멀리서부터 그 자리를 돌아가기도 했다.
“저, 저기……!”
“로, 로건 맥라인…….”
“무서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음에도 공포에 떠는 사람들.
하지만 최근에 수도, 아니 왕국을 장악하고 혈풍을 벌인 주인공의 이름에는 그만한 힘이 있었다.
왕을 죽인 자.
그가 왕궁에 입성한 날 죽은 자만 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 학살의 범위에는 반항한 귀족들의 식솔들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청년이 씁쓸한 미소와 함께 한숨을 내쉬는데, 그런 그를 향해 몰려든 기사들이 거리의 소란을 더욱 키웠다.
“로건 각하!”
“각하!”
“모두 비켜라!”
두두두두.
히이이잉.
황급히 말 위에서 뛰어내린 기사들이 일제히 청년의 앞에 부복했다.
“대공자님, 어찌 홀로 나오셨습니까. 저희에게 말씀하시지요.”
“……이럴까 봐.”
“예?”
“아니다, 됐다. 이제 돌아가야지.”
“……예. 모셔라!”
“됐다. 내 발로 갈 것이다.”
슉.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라지는 청년의 모습에 기사들은 멍한 표정으로 그가 있던 자리를 쳐다봤다.
자리에 있던 기사 중에는 그가 어느 방향으로 사라졌는지 알아챌 만한 실력자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로부터 한참 뒤.
수도의 가장 높은 지붕 위에서 소란스러운 거리를 내려다보는 로건의 표정은 무겁기만 했다.
“이런 것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나지막하게 흘러나온 혼잣말.
갑자기 불어온 바람이 마치 위로하듯 그를 감싸고 지나갔지만, 멍하니 거리를 내려다보는 쓸쓸한 표정은 한참 동안 변하지 않았다.
* * * [……사람이 좀 많이 모여들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통제 가능합니다. 이상입니다.]
맥라인의 시대가 왔다.
왕국 전역에 퍼진 그 말에 사람들이 미친 듯이 모여들고 있는 타운의 상황을 드웨인은 간단하게 정리해서 보고했다.
“수고했어, 드웨인. 나도 아버지도 없지만, 조금만 더 힘내 줘.”
[물론입니다. 큰 고비를 넘은 직후니까요. 공자님, 영지의 모두가 공자님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피곤하시더라도 힘내십시오!]털보 행정관의 웃는 표정이 로건의 씁쓸한 마음을 잠깐이나마 달래 주었다.
그래서일까.
“드웨인은 내가 왕이 되면 어떨 것 같아?”
로건은 자신도 모르게 불쑥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예? 어…… 음……. 왜 저한테 그런……?]역시나 당황하는 표정.
“아니야, 됐어. 말이 헛나왔다.”
씁쓸한 마음을 감추며 고개를 젓는데.
[……혹시 그래서 표정이 안 좋으신 겁니까?]드웨인이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그에 멈칫한 로건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여러 가지로 마음이 복잡할 뿐이야.”
그 표정을 본 드웨인은 한참 동안 망설이더니, 이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그렇게 중대한 일에 관해서는 가신으로서 함부로 의견을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그래, 그렇겠지. 못 들은 거로 해.”
덩달아 분위기가 무거워진 드웨인을 보며 로건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조금 당황한 표정이 된 드웨인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아니, 진짜 제 솔직한 마음은 별거 없거든요. 그래서 말씀드리기가 좀 더, 하하, 그렇습니다.]“별거 없다니?”
로건의 눈에 이채가 어리자, 드웨인은 수염이 수북한 자신의 턱을 긁적이며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입을 뗐다.
[저는 공자님이 그런 고민을 하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요.]“음?”
[보통은 주변에서 말려도 그냥 지르고 보셨잖아요. 제가 아는 그 누구보다 고민 없고 생각 없…… 아차차. 이 말은 취소, 취소입니다.]치명적인 말실수에 식은땀을 흘리며 딴청을 부리던 드웨인은 로건이 멍한 표정으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용기를 얻은 듯 바로 말을 이었다.
[아, 아무튼. 공자님은 가능성이 보인다 싶으면 일단 저지르고 보는 성격이셨잖습니까. 솔직히 정말 위험한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공자님은 그 위험한 시도들로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결과물들을 만들어 내셨죠.]“……그래.”
표현은 조금 달랐지만, 결국 에일렌과 같은 말.
아버지와 더불어 그 누구보다 자신을 오래 지켜본 가신 역시 같은 뜻을 전한 것이다.
[저는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믿습니다. 아니, 맥라인 사람들 모두가 같은 생각일 겁니다. 공자님 뜻대로 하십시오. 왕이 되고 싶으시다면 왕위에 오르시고, 아니라면 안 하시면 되는 겁니다!]호쾌하게 웃으며 시원한 결론을 제시해 주는 드웨인.
그에 로건의 얼굴에도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고마워, 드웨인.”
그 대답이 모든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해진 것은 분명했다.
– 이제는 내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당신이 무엇을 선택하건.
다시금 떠오르는 에일렌의 말과 더불어 가슴이 든든해지는 지원이었다.
물론.
[그리고 왕이 되시면 저 좀 확실하게 챙겨 주시고요. 영지 행정관보다는 아무래도 왕국 대신이…….]이상한 사심이 조금 덧붙기는 했지만, 그저 뻘쭘한 마음에 하는 농담이라는 것을 알기에 로건도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기왕이면 재무대신 쪽이면 더 좋겠습니다.]……농담이 아닌가?
로건의 눈가에 살짝 경련이 일어날 때.
[우리 공자님께서 왕이 되시는 거예요?]드웨인의 덩치에 가려져 있던 뒤편에서 익숙한 갈색 머리 갈색 눈의 청년이 튀어나왔다.
휘둥그레진 눈에 놀란 기색이 역력한 가운데.
통신을 하던 두 사람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릭?”
[야! 너 언제 들어왔어!] [행정관님이 심부름시키셨잖아요! 불러도 대답이 없으셔서……] [아니, 그래도 통신실에 함부로…….]통신구 너머에서 소란이 일자, 로건이 목소리를 높였다.
“됐어, 드웨인. 그렇게 큰 비밀도 아니잖아.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니고.”
[아, 죄송합니다.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니었는데…….]순간 두통이 이는 듯했지만, 어차피 곧 알게 될 일이라 로건은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확정된 것은 아니야. 혹시나 쓸데없는 소리 퍼트리면 크게 혼날 줄 알아.”
[에이, 저 입 무겁습니다. 아시잖아요. 그래도 우리 공자님이 왕이라니, 그런데 그게 되…… 뭐, 되니까 말이 나온 거겠죠?]자신이 들은 말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지 혼란스러운 표정.
녀석의 충성심은 믿지만, 확실히 단속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확정된 게 아니라고!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
[예? 아, 예. 그럼 왕이 되시지 않을 수도 있다는……?]“그래.”
[아…… 아하하. 다행이다.]다행?
“……다행이라고?”
릭의 생각지도 못한 말에 로건이 무심결에 되물었다.
[아, 아니요. 말실수입니다. 다행이 아니라 뭐랄까, 안심이 된다고 할까? 아니, 이것도 아닌가?] [릭, 지금 공자님께…….] [아니, 행정관님. 말실수라니까요!] [그래도 이 녀석이…….]통신구 너머가 다시 소란스러워지자 로건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드웨인, 먼저 나가 봐.”
[예?]“오랜만에 내 전담 시종이랑 둘이서 얘기 좀 하려고.”
[고, 공자님. 제가 실수……한 건가요?]정말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뿐인데 파랗게 질린 릭의 모습에서 얼마 전 수도 시민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아, 로건은 억지로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 냈다.
적어도 릭은 아닐 것이다.
후…….
“아니. 아니다, 릭. 정말 얘기가 해 보고 싶은 것뿐이야. 드웨인……?”
[예, 공자님. 그럼 나중에 또 보고 드리겠습니다.]“그래.”
드웨인이 방문을 나서자,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의 릭만이 통신구 속에 비춰졌다.
[공자님. 제가 실수한 건가요? 저, 전 그냥 무심결에…… 제 의견은 중요하지 않잖습니까. 그냥 무시하셔도…….]“릭.”
[전 그냥 걱정되어서 한 말일 뿐인데…….]“릭!”
[예, 예. 공자님. 듣고 있습니다.]거듭되는 부름에 그제야 릭이 경직된 표정으로 응답했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
그 표정을 보며 로건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탓하고자 하는 게 아니야. 정말로 네 의견을 듣고 싶은 거야. 네가 가장 오랫동안 곁에서 날 봐 왔잖아.”
[그, 그렇죠. 제가 공자님과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시종이죠.]“그래. 내 전담 시종이고, 내 친구고, 어떤 의미에서는 내 형제처럼 지내 왔지.”
[……공자님. 절 그렇게까지…….]금세 눈물을 글썽거리던 릭은 그제야 조금 침착해진 듯 차분한 표정으로 로건을 바라봤다.
“그래서 진지하게 네 의견을 묻고 싶어. 내가 왕이 된다면 안 좋을 것 같아?”
[……아니요. 분명 멋진 일일 것 같습니다.]좀 전에 무심결에 흘린 말과는 전혀 다른 말.
“멋진 일? 아까는 안 되면 다행이라더니?”
로건의 미간이 다시 좁혀지는데, 고개를 푹 숙인 탓에 그 모습을 보지 못한 릭은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게…… 분명히 멋진 일이지요. 예, 멋진 일이긴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모신 공자님이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어찌 싫겠습니까. 어쩌면 덕분에 저도 왕실에서 한 자리 차지하게 될지도 모르구요. 그런데…….]“……그런데?”
망설이며 우물쭈물하는 릭의 모습에 로건이 기다리지 못하고 반문했다.
그럼에도 한참을 더 망설이던 릭은 마침내 무언가 결심했는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로건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멋진 일도 좋지만, 그래도 전 솔직히 옛날이 좋았습니다.]“응?”
[지금처럼 복잡한 영지가 아니라, 한적한 시골 맥라인일 때가요. 공자님은 수련하시거나 가끔 말 타고 놀러 가시고, 저는 그런 공자님 모시고. 그 걱정 없던 날들이 더 좋았습니다.]“…….”
[물론 지금의 가문이 더 잘된 거라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공자님의 웃는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그게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지금 표정도 그렇구요. 공자님…… 지금 힘드시죠?]진한 염려가 담긴 갈색 눈동자.
목소리에도 진심 어린 걱정이 잔뜩 실린 것을 느낀 로건은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시선을 하늘, 아니 천장으로 돌렸다.
[더 높은 자리로 가시면 지금보다 더 힘들어하실 것 같아 걱정됩니다. 저는 그래서 다행이라고 한 겁니다. 그냥 무식한 시종의 생각 없는 걱정이라고 여겨 주세요.]연신 고개를 숙이는 통신구 속 릭을 보며, 로건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