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31)
231화- 고맙다.
차마 긴말은 하지 못하고 마친 릭과의 통신은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그리고 로건의 생각을 복잡하게 만든 것은 릭뿐만이 아니었다.
“이상 없습니다.”
“수고.”
“충!”
기사의 인사를 받으며 통신실을 나서는데,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헤인켈 경?”
“대공자님. 여기 계셨군요. 안 그래도 병사들 처소 문제로 찾아뵙고 싶었습니다.”
“병사들 처소요?”
“예. 그동안은 압수한 귀족의 저택이나 기존 왕궁수비대와 근위대의 숙소를 써 왔는데, 체계도 안 잡혀 있는 데다가…….”
로건은 열변을 토하는 헤인켈을 바라보았다.
가문을 위해 평생을 충성하다 포스와 오른팔까지 잃은 충신.
그런데도 가문의 일에 이렇게 열정적으로 나서 주는 모습이 고마웠고, 또 미안했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것일까.
헤인켈이 자신의 비어 있는 오른쪽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이제 익숙해졌습니다. 그렇게 계속 쳐다보시면 제가 좀 부끄럽습니다만.”
이렇게까지 배포를 보여 주는 대인배에게 계속 미안해하는 것도 실례라, 로건은 슬쩍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실례했습니다. 처소에 관한 건은 경의 뜻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감사……라.
이 열정적인 가신에게는 언제나 감명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무심결에 툭 대답이 나왔다.
“저야말로.”
“예?”
“저와 가문이 언제나 경에게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 달라는 말입니다.”
“하하. 과분한 말씀입니다. 안 그래도 저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기사의 길만이 삶인 것은 아니니까요.”
“알지요. 알지만 그래도 경께서 잃은 것이 너무 큽니다.”
“……확실히 당시의 그 좌절감과 허탈함은 말도 못 할 지경이었죠. 외길을 달려온 사람인지라, 인생 자체가 무너진 느낌이었거든요.”
“……그렇겠죠.”
“하지만 마음을 좀 달리 먹으니 다른 길이 여럿 보이더군요. 저는 이제 편안합니다. 오히려 공자님이 조금 걱정이 됩니다.”
“제가요?”
조금은 생뚱맞게 튄 이야기에 로건이 어리둥절했지만, 이어진 헤인켈의 말에는 안색이 조금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직 한 가지 길만 보시지 않습니까. 목표를 위해서는 누가 봐도 무모한 도전도 상관하시지 않으시니까요.”
“…….”
“그 모습이 저에겐 예전의 저처럼 한 가지 길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달려가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다행히 공자님께선 대부분 좋은 성과를 거뒀습니다만, 혹여나 한 번이라도 실패했을 경우 그대로 무너질 것 같이 위태해 보였거든요.”
그 말을 그저 흘려들을 수는 없었다.
실제로 자신은 회귀한 이후 도박이나 다름없는 일들을 수도 없이 진행해 왔고, 만약 한 번이라도 실패했다면 그대로 박살이 났었을 테니까.
‘그래도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어.’
그렇게 스스로를 포장해 보려 해도, 그 무모한 선택의 과정에서 피해를 본 사람이 눈앞에 있는지라 섣불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제는 공자님께 달린 인생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하고자 하시는 목표를 포기하시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길, 좀 더 안전한 길로 갈 수는 없는지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 제가 참 많은 걱정을 끼친 모양이군요.”
“하지만 그만큼 많은 성과를 이루셨지요. 생각해 보니 주제넘은 말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아닙니다. 조언 고마워요, 헤인켈 경.”
그날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지만, 헤인켈의 말은 오래도록 로건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또한.
[주인, 얼굴이 안 좋은데? 뭐 고민이라도 있어? 무슨 고민인지 몰라도, 원래 주인은 이득이 되면 하고, 안 되면 안 하는 사람 아니었나? 간단하게 생각하지?]타렌에서 마도 공방을 운영 중인 드워프의 염려 어린 말과.
[오! 그럼 전 국영상단 주인이 되는 겁니까? 좋은데요? 언제 왕위에 오르세요?]제국에서 상행 중인 상인의 적극적인 지지.
[네가 왕이 되면 로니안의 소식을 좀 더 확실히 알아볼 수 있지 않겠니? 꼭 좀 부탁한다. 응?]가문의 운명보다는 자기 자식의 안위가 먼저인 새어머니의 부탁까지.
주변의 모든 목소리가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자꾸만 떠오르며 고민이 더욱더 깊어지는 데 일조했다.
심지어 올란도 페르히를 토벌하고 돌아온 패드릭 역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오자마자 그를 찾았다.
“여전히 고민하는 것이냐? 생각하는 장소도 하필…… 쯧.”
아무도 없는 왕궁의 대전, 널찍한 공간에서 두 부자가 마주했다.
여유롭게 웃는 아버지의 얼굴이 로건의 입가에 오랜만에 미소가 떠오르게 했다.
“이미 다 저질러 놓고 고민하는 게 웃기지 않습니까?”
“전혀. 중요한 문제일수록 신중하게 결정해야지.”
“……아버지께서는 이미 결론을 내리신 모양입니다?”
“물론!”
“정말이십니까?”
그 자신만만한 대답에 로건의 눈동자가 대번에 커졌다.
가문과 관계된 일인 만큼, 가주인 아버지의 의견이 확실하다면 그도 수용할 의사가 있었다.
하지만.
“네가 뭘 하든지 무조건 믿고 지지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어진 말에는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중요한 일인 만큼 신중하게 고민하고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는 것도 맞다. 하지만 방향을 정했으면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느냐? 자, 어느 쪽이냐? 방향은 정했느냐?”
“…….”
아버지의 떠보는 듯한 말에 로건은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 애국심은 개뿔, 나는 그냥 복수가 하고 싶을 뿐이야.
지워지지 않은 전생의 기억.
그 기억을 따라 여기까지 왔고, 많은 것을 바꾸었다.
가문을 지키고, 가족을 지켜 냈다.
전생의 복수심은 그 근거를 잃었다.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로건은 여전히 자신 안에서 들끓는 불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보 같은 생각이야. 그건 알아.’
하나 진창에 구르며 짓밟히며 살아온 그 세월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아득한 절망감을 안겨 주었던 놈들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죽이고 싶었다.
단순히 전쟁을 막는 것을 넘어서 놈들을 박살 내고 싶었다.
그 감정을 직시하고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선택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선택이 과연 미래를 생각한 합리적인 답인지, 그저 복수심으로 인한 제 욕심인 건지.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마치 그 생각을 짐작한다는 듯 아버지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가 가문을 살렸고, 모두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네가 없었다면 이미 망해도 몇 번은 망했고, 죽어도 몇 번은 죽었다. 가문의 모두가 그래.”
“…….”
“그러니 이번에도 네가 생각한 그 길을 따라가거라. 망설이지 말고 나아가!”
이미 무슨 선택을 내렸는지 짐작하는 듯한 말.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선 아버지의 모습이 그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더했다.
아버지를 포함한 측근들 대다수가 하는 말은 결국 그 본질이 같았다.
– 믿겠습니다.
그래서 더 무겁게 느껴졌다.
‘모든 게 그저 제 욕심일지도 모릅니다.’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언제까지 판단을 미룰 수도 없는 노릇.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왕궁의 대전.
옥좌를 올려다보는 로건의 시선은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했다.
* * * 왕국의 대전에서 또다시 대회의가 열렸다.
“……이상. 왕국의 영지를 가진 모든 이의 뜻을 모아 로건 맥라인 각하께 전합니다. 저희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셔서 새로운 왕조,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담 모건은 그 말과 함께 검은 철목으로 된 커다란 목판을 내밀었다.
그 위에는 귀족 가문의 이름들과 인장의 표식이 하얀색으로 새겨져 있었다.
혹자는 형식에 불과하다고 할지 몰라도, 영지와 힘이 있는 모든 귀족의 뜻을 모은 연판장은 이 나라의 모든 것을 뜻대로 할 수 있다는 거대한 권력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뒤이어 등장한 여섯 명의 사람들.
5대 마탑의 탑주들을 등 뒤에 둔 클레이튼이 대전의 앞으로 나와 로건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 골렘 마탑의 탑주 마도사 클레이튼을 위시한 5대 마탑의 탑주들은 로건 각하를 지지한다는 의중을 모았습니다. 왕국의 모든 마탑들 역시 저희의 결정을 따라 각하를 지지할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그 말과 함께 클레이튼이 고개를 숙이자, 그것을 지켜보던 귀족들이 눈을 빛냈다.
‘이제 요식 행위는 모두 끝났다.’
영지 귀족들과 마탑.
사실상 왕국의 모든 무력 세력이 맥라인에 복종을 택했다. 그리고 모든 결정권을 넘겼다.
명분 쌓기는 이미 넘치도록 끝낸 상황.
정말 새 왕조?
아니면 세상에 다시없을 강력한 섭정?
무엇을 선택하건 저 로건 맥라인이 살아 있는 한, 이 왕국에 그의 말을 거역할 자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섭정의 자리에 있는 로건의 바로 아래, 로버츠 플로이드 백작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정작 그 선언의 당사자가 된 로건은 두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었다.
‘역시 새 왕조겠지.’
귀족들 대다수의 머릿속에 든 생각과.
‘그래도 천 년을 이어 온 왕국인데, 명목이라도 남겨 놓지 않을까?’
몇몇 귀족들의 기대.
그 모두의 시선이 로건에게로 향하는데도 그의 침묵은 계속되었다.
‘음? 왜 저래?’
처음에는 긴장하며 상황을 지켜보던 귀족들도 이내 서로를 돌아보며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러자.
“로건 각하. 결단을 내려 주시지요.”
입가에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는 로버츠 플로이드가 대전의 아래에서 로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로건이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
대전 회의가 시작된 이래 처음 뜨인 눈은 여전히 조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제는 선택해야 할 때.
좌중의 기대 어린 시선을 받으며 로건의 입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흠……. 나는…….”
– 거, 검공. 펠릭스 에스페란자 대, 대공 납시오!
대전의 문밖에서 기사의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누구?”
“검공이 왜 여기에……?!”
웅성웅성.
애써 침묵을 유지하던 대전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지는데.
그그그긍.
잠겼던 대전의 문이 열리며 그 안으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빛나던 금발 머리는 절반이 넘게 새하얗게 변했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탱탱하던 피부엔 어느새 깊은 주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비틀거리는 발걸음에 조금은 창백한 안색은 그의 몸이 아직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만천하에 광고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누가 이 노인을 무시할 수 있으랴.
“진짜 검공?”
“진짜라고……?”
“이게 대체……?”
대전에 모인 귀족들의 시선이 왕국을 상징하던 노기사에게 쏠리고.
로건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흔들리는 눈으로 스승을 바라보았다.
검공은 그런 로건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 발짝, 한 발짝 상석을 향해 걸었다.
우르르.
검공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연스레 뒤로 물러나는 귀족들.
그 움직임은 자의가 아니었다.
“윽?!”
“이, 이거 뭐야?!”
비틀거리는 노기사의 걸음걸음마다 피어나는 살벌한 기세가 대전을 억누르기 시작하자, 무력이 약한 귀족들이 사방의 벽으로 몰려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뭐야, 이거 진짜 큰일 나는 거 아냐?”
“서, 설마…….”
“기사들은 뭐 하는 거야?”
웅성거리는 목소리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한 발자국씩 상석에 가까워지던 검공은 끝내 허리춤에서 검까지 뽑아 들었다.
스르릉.
“이런……!”
“검공! 멈추시오!”
“각하를 지켜!”
대전의 구석에 시립해 있던 기사들이 급히 뛰쳐나오며 로건의 앞을 막아섰다.
그렇게 갑자기 생긴 기사들의 장벽을 사이에 두고, 검공과 로건의 눈이 마주쳤다.
일순간 침묵에 잠긴 대전.
깊고 고요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과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붉은 눈이 서로를 마주 보는데.
침착한 푸른 눈이 이내 고개를 숙였다.
푸욱.
쿵.
대전의 바닥에 검을 꽂은 검공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신(臣), 펠릭스 에스페란자. 새로운 왕국의 군주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말에 대전의 분위기가 일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