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32)
232화- 신(臣), 펠릭스 에스페란자. 새로운 왕국의 군주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검공의 선언은 대전에 상황에 어울리지 않은 적막을 가져왔다.
귀족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서로를 바라봤고, 이내 모두가 부릅뜬 눈으로 입을 벌렸다.
‘그 검공이?’
어느새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해진 대전.
그 갑작스러운 침묵 속에서 로건의 눈빛이 서서히 변했다.
흔들리던 눈빛이 안정을 찾아 가고, 벌어졌던 입은 굳게 다물어졌다.
무언가 확고하게 결심한 듯한 표정.
옆에서 아들을 지켜보던 패드릭의 표정 역시 조금은 가벼워졌다.
‘검공께서…… 로건을 인정해 주셨다.’
어떻게 이 순간 대전에 등장한 것인지.
왜 저렇게 행동한 것인지.
충분히 의아해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간 치열하게 고민해 온 아들의 마음을 알기에 그저 안도의 한숨이 나올 뿐.
그렇게 가장 영향력이 큰 부자가 침묵하고.
적막에 잠긴 대전 안에서 검공이 홀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저에 앞서 왕국의 모든 이들이 마음을 정했다 들었습니다. 몇 년간의 재난으로 고통받은 이 나라의 백성들을 위해 확실히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폐하.”
폐하.
그 단어가 주는 울림에 섭정의 자리에 앉아 있던 로건의 눈빛이 다시금 떨렸다.
꽉 쥐어진 주먹과 떨리는 입술은 심중의 격동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굳게 다물었던 입술이 열리는 순간에는 마치 그런 흔들림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또렷하고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맹세,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자.
“허억.”
“이게…….”
“그럼…….”
고요하던 대전에 놀란 귀족들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단호한 얼굴의 로건은 그 목소리들을 뒤로 한 채, 더는 흔들리지 않는 결심을 모두에게 선언했다.
“나, 로건 맥라인은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나라 모든 이의 뜻을 받아들여 새로운 왕조의 시작을 선포하겠다!”
“오오!”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과 함께 대전 안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뒤로, 패드릭 맥라인의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대신들은 새로운 왕조의 시작을 알릴 즉위식을 준비하라! 새 시대의 시작을 준비하라!”
“예!”
새로운 왕국 선언.
그 소문이 왕궁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 나가기 시작할 때.
로건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등장한 스승과 대면하고 있었다.
* * *
“스승님,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전장에 나설 때부터 결심한 일입니다. 패배자는 승자를 따라야지요. 이 왕국의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로건의 물음에 대한 스승의 답변은 단호했고, 그와 더불어 달라진 말투 또한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말씀 편히 하십시오, 스승님. 갑자기 그러시면 불편합니다.”
로건이 어색한 얼굴로 말했지만.
“아니, 아닙니다. 스승이란 이유로 군주에게 경어를 쓰지 않는다면 이제 새로 시작할 왕조의 권위가 살지 않습니다.”
“제가 불편합니다. 적어도 둘만 있는 자리에서만이라도 말씀을 편히 해 주셨으면 합니다.”
로건의 부탁에도 검공의 태도는 완강했다.
“아닙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는 법이지요.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죄를 청할 것이 있습니다.”
“……네?”
“멋대로 감옥을 벗어나며 기사들을 몇 상하게 했습니다. 이 죄인을 벌하여 주십시오.”
쿵.
오히려 더욱 극진하게 나오는 스승의 태도에 로건은 결국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잠시 후.
로건은 긴 한숨과 함께 스승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십시오. 저는 스승님이 죄인이라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검공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태도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말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는 스승.
그런 스승을 보면서 로건은 최근 가슴속에 쌓아 온 고민을 털어놓았다.
“알고 계십니까? 스승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저는 계속 고민 중이었습니다.”
“예. 그럴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네?”
“그래서 제가 그 망설임을 없애 드리고자 폐하를 찾아뵌 것입니다.”
“아…….”
그 말에 아직도 식은땀이 흐르고 있는 스승의 얼굴이 다시금 눈에 들어왔다.
굳은 표정 아래, 오러유저답지 않은 창백한 안색도.
‘스승님…….’
한때는 한없이 따르고, 한때는 또 반목했던 스승.
하지만 그 극단적인 대립의 끝에서도 스승은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다.
에스페란자군의 전격 투항과 대전에서의 일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칼을 마주했지만, 패배한 이후의 일까지 생각해 놓은 것이다.
‘만약에 내가 패배했으면 어찌하셨을까.’
그러다 문득 스승과의 대결, 그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마지막에 급격하게 힘이 떨어졌던 스승의 검과 그 검로.
그것은 어쩌면 자신을 생포하려 했던 시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신은 스승의 생사를 도외시하고 검을 휘둘렀는데 말이다.
‘확실히…….’
생각이 한 번 그렇게 쏠리기 시작하자, 근거 없는 확신까지 따라왔다.
‘아무리 내가 그럴 여유가 없었다곤 해도…….’
부끄러웠다.
그래서 로건은 무심결에 입을 열었다.
“스승님. 혹시 그때…….”
“지나간 일은 이제 그만 언급하시지요. 이제는 앞으로의 일을 대비할 때입니다.”
하지만 스승은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끊었다.
“……후회되지 않으시겠습니까?”
“제가 이제 와 후회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미 마음의 정리는 끝났습니다. 그보다는 폐하께 확인받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
“폐하께서 일전에 말씀하신 제국의 침공, 얼마나 확신하고 계십니까?”
무겁게 가라앉은 푸른 눈이 예전에도 나누었던 화제를 다시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확실히 상황이 달랐다.
당시 그 확률을 의심하고 확실한 증거를 원했던 검공은 결국 그것을 반정을 꾀하려는 로건의 핑계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100%. 제국은 무조건 침략해 올 겁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 목을 걸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핑계를 댈 이유도 없는 상황.
그런데도 로건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아니. 전에도 그랬겠지. 내가 내 아집에 갇혀서 외면했을 뿐.’
원했던 답을 듣고, 자신의 고집이었음을 인정한 검공은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금 맹세하겠습니다. 저 펠릭스 에스페란자는 제국의 침략을 막고, 이 왕국을 지키기 위해 이 한목숨 바치겠습니다.”
쿵.
다시 무릎을 꿇은 스승을 보는 로건의 표정은 난감하기만 했다.
* * *
“우리 대공자님이 왕이 되신대!!”
“정말?!”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되긴, 더 살기 좋아지겠지!”
“그, 그런가?”
“어…… 나도 잘 몰라! 어쨌든 공자님이 왕이 되셨다면 축하할 일이잖아?”
“그렇지!”
– 로건 맥라인 만세!
맥라인 타운을 비롯한 맥라인 영지 전역에서 새로운 왕을 칭송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나 맥라인 영지 여기저기에서 로건의 업적을 찬양하며 새로운 나라의 시작을 기다리는 것과는 달리, 그들을 제외한 다른 영지민들의 반응은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다.
“새 나라?”
“그럼 그란디아가 더 이상 그란디아가 아니게 되는 거야?”
“맥라인이 된다던데?”
“그게 뭐야. 이상해…….”
거리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수군거림이 가득했다.
새로운 왕조를 선언했다 한들, 당장 왕국의 백성들에게서 나올 만한 반응은 그 정도가 전부였다.
그들에게는 왕국의 이름보다는 자신들이 먹고사는 문제가 더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새 왕국의 출범을 알리고자 하는 새 왕조의 수뇌부들에게는 그 시작부터가 아주 중요했다.
그렇기에 즉위식을 준비하기 위해 열린 대전 회의는 여느 때보다 치열했다.
“행사 순서는…….”
“장소는 대전과 왕궁 앞, 그리고 수도를 도는 행진으로…….”
“행진까지는 과하지 않소이까? 차라리…….”
치열하게 토론하는 대신들의 목소리가 대전을 가득 채웠고.
즉위식의 준비를 위해 초청받은 각 지방 영지의 귀족들 역시 빠짐없이 참석하여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형식상으로는 왕국의 모든 귀족이 동의하여 열리는 새 왕조.
그 시작을 위해 영향력 있는 귀족들이 모두 모인 것이었다.
하지만 국무대신들의 토론을 지켜보는 일부 귀족들의 눈은 열띤 대화가 오가는 자리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돌아가 있었다.
대전의 상석.
이제는 옥좌에 앉은 로건 맥라인의 옆에 서 있는 노기사.
검공 펠릭스 에스페란자에게로.
수도에 오기 전 나름대로 말을 맞춘 그들은 이 상황 자체가 곤혹스러웠다.
– 이대로 맥라인 왕조가 시작되면, 왕이 절대 권력을 가지게 된다.
–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우리가 뭉치는 것도 결국 나라를 위한 것이다.
– 귀족으로서 최소한의 권익을 지켜야 한다.
– 새 왕에게 충성하되, 우리끼리 뭉쳐 발언권을 확보해야 한다.
암암리에 그렇게 합의를 보았던 귀족들에게 가장 좋은 수단은 바로 검공, 아니, 에스페란자 대공가였다.
마지막까지 맥라인과 대립하다 쓰러진 가문.
그럼에도 로건 맥라인의 존중하에 명맥을 유지한 가문.
그런 가문이라면 그들이 새롭게 결성할 ‘귀족파’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 가문의 수장이자 쓰러졌다 알려진 검공이 떡하니 새 왕의 옆 자리에 서 있었다.
그것도.
“시국이 어수선한데 즉위식의 비용은 최소로…….”
“안 됩니다, 폐하. 새롭게 천년을 나아갈 왕조의 시작이 초라해서는 안 되지요. 자금이 부족하다면 에스페란자의 창고를 풀어서라도 맞추겠습니다. 지금은 권위를 드높일 생각만 해 주십시오.”
한때는 제자였던 이에게 지극한 공경의 자세를 보여 가면서까지 말이다.
‘이건 글렀다.’
새로운 귀족파의 태동을 꿈꿨던 귀족들의 계획은 그 순간 좌절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직 몸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으셨을 텐데 벌써 이렇게 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새 왕조의 시작부터 다른 마음을 품는 이들이 나오지 않을 겁니다.”
멀리서 보면 티가 나지 않지만, 가까이서는 검공의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이 보일 정도였다. 그 정도로 좋지 못한 몸 상태로도 그의 태도는 완강하기만 했다.
오랜 기간 정치 중립적인 입장으로 살아온 검공이었지만, 그랬기에 오히려 귀족의 생리를 잘 알았다.
하여 그는 자신이 뱉은 말대로 새 왕조의 초석을 다지는 일을 확실하게 하고 있었다.
그저 이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새로운 귀족파의 태동이 무산되는 순간.
“그럼 즉위식 일정은 그렇게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전의 회의도 끝을 맺었다.
공식적으로 맥라인 왕조가 시작되는 날을 확정하면서.
* * * 둥. 둥. 둥. 둥.
“대열을 지켜 서시오!”
“간격을 맞춰!”
“거기! 오른쪽으로 조금만!”
그랑의 내성 서문에서 왕궁의 입구까지 이어지는 대로.
그 드넓은 대로를 가득 메운 인파가 병사들의 지시에 따라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왕궁 밖에서부터…….”
“내가 들었는데, 폐하가 처음 왕궁에 오신 길을 기념하며 즉위식을 시작하려는 거래.”
“그게 뭔 소리야?”
“나도 몰라.”
“뭐, 우린 새 폐하의 얼굴만 보면 되지. 복 받는다잖아.”
“그럼!”
“조용조용!”
기사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을 간신히 정리해 가며 진열을 정비한 대로의 인파는 정오 무렵이 되어서나 질서가 잡혔다.
둥. 둥. 둥. 둥.
이내 다시 시작된 북소리와 함께 거대한 목소리가 대로 전체에 울려 퍼졌다.
– 맥라인 왕국을 건립하신, 로건 맥라인 폐하 듭시오!
그와 함께 내성의 서문이 열리며 일단의 무리가 천천히 걸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갈기와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말 위에 올라탄 화려한 갑옷을 입은 남자.
타고 있는 말의 붉은 갈기와 같은 색의 머리가 눈에 띄는 그가 좌우와 뒤편에 수행원을 거느리고 천천히 내성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 뒤를 따르는 수행원들 모두가 시종이 아닌 기사들이었다.
화려한 갑옷을 두르고 그에 대비되는 엄숙한 표정을 한 기사들이 왕과 함께 행진을 시작하는 순간.
“우와아아아아아아!”
수도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함성이 새로운 왕국의 시작을 알렸다.
“만세!”
“맥라인 왕국 만세!”
“로건 맥라인 폐하 만세!”
사방에서 끝도 없이 들려오는 만세 삼창.
스승께서 어렵게 구해 준 루벤스 종의 명마가 놀라 얼어붙을 정도로 거센 함성에 로건은 포스까지 동원해 말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내 그가 움직이는 동선을 따라 뿌려지는 꽃가루들.
대로의 좌우, 저택들의 지붕에서 끝도 없이 뿌려지는 꽃가루들이 사방에 휘날리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자신을 수행하는 기사들의 모습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을 정도로 요란하고 화려한 모습.
그 비현실적인 광경 속에서 로건은 사방을 둘러보며 천천히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