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33)
233화내성 대로에서부터 이어진 행렬이 왕궁 앞에 다다랐다.
그러자 어느새 본래의 화려한 모습을 되찾은 왕성 성문이 열리고, 왕궁의 커다란 앞마당 안에 대열을 맞춰 대기 중이던 대신들과 기사들, 시종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격식을 갖춰 차려입은 신하들의 절도 있는 외침이 울려 퍼지자 군중들의 함성과는 또 다른 멋이 느껴졌다.
이내 행렬의 수행자로 따라온 기사들이 왕성 성문을 중심으로 일제히 좌우로 늘어서고, 뒤따라온 군중들의 시선이 왕궁 안으로 향할 때.
로건은 홀로 대신들이 만들어 놓은 길의 가운데를 걸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
궁전 앞 제단에는 머리보다 몇 배는 길어 보이는 순백의 법관을 쓴 노사제가 서 있었다.
전전대 국왕의 장례식에서 한 번 보았던 이.
그란디아, 아니 이제는 맥라인의 신전 총괄 책임자이자 9대신 중 첫째인 물과 농업의 신 아이온의 대주교, 파미엘 게른하임.
그가 주름진 얼굴에 인자한 웃음을 띠며 로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폐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주교.”
미소가 만연한 얼굴로 서로 덕담을 주고받는 두 사람.
인사치레가 끝나자, 파미엘 대주교가 품 안에서 아홉 개의 문양이 찍혀 있는 알록달록한 두루마리를 꺼내 들었다.
이내 그것을 요란하게 펼친 그가 좀 전과는 달리 엄숙한 목소리로 외쳤다.
“맥라인 왕국의 국왕, 로건 맥라인은 신의 뜻을 받들라!”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우렁찬 외침이 왕궁 앞을 가득 메우고, 로건은 그 앞에서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대는 아이온의 뜻에 따라 순리를 추구하며 농업을 장려하겠는가?”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대는 아게론의 뜻에 따라 빛나는 가치를 추구하며 상업을 장려하겠는가?”
“예. 그리할 것입니다.”
“그대는 아트란의 뜻에 따라 단단한 가치를 추구하며 광업을 장려하겠는가?”
“예. 그리할 것입니다.”
“그대는 아니마의 뜻에 따라…….”
그 뒤로도 쭉 이어지는 대주교의 축사.
9대신의 상징을 나열하며 묻는 대주교의 질문에 로건은 침착하게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맥라인 왕국의 국왕, 로건 맥라인의 즉위를 신의 이름으로 인정하며 축복하노라!!”
대주교 파미엘의 외침과 함께.
“로건 맥라인 폐하 만세!”
“맥라인 왕국 만세!”
“몸과 마음을 다해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대열을 갖추고 서 있던 신하와 대신들이 왕궁 전체가 울릴 정도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그 자리에 엎드렸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돌아본 로건은 오연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대들의 맹세를 받아들이겠다. 그리고 신과 백성을 위한 왕국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
담담한 목소리가 왕궁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가고.
“만세, 만세, 만만세!”
엎드린 신하들은 또다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로건의 말에 응답했다.
왕궁 ‘밖’에서 이뤄진 즉위식은 그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국왕 폐하 듭시오!”
그그그긍.
기사의 외침과 더불어 대전의 문이 열리자, 로건은 천천히 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오부터 몇 시간째 계속된 이 의식이 조금은 과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 권위를 높이기 위해선 왕조의 시작을 최대한 화려하게 선언해야 합니다.
엄격하게 주장하던 스승의 얼굴을 떠올리며 로건은 표정 관리에 신경을 썼다.
그러고는 모든 대신과 영지 귀족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가운데 대전의 옥좌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저벅저벅.
자신의 발걸음 소리 외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
그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왕좌 앞에 멈춰 선 로건은 조용히 왕좌의 팔걸이를 쓰다듬었다.
몇 년 전까지는 자신이 앉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자리.
그 자리를 앞에 둔 지금도 조금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자리를 발판으로 더욱 효율적으로 왕국을 움직여 제국을 막는다. 어찌 보면 잘 된 거야.’
로건이 다시금 각오를 다지고 숨을 길게 한 번 내쉰 뒤 왕좌에 앉았다.
그러자.
“로건 맥라인 폐하 만세!”
“신 맥라인 왕국 만세!”
“왕국의 모든 푸른 피가 폐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다시 한번 맥라인을 칭송하는 소리가 대전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 직후.
“맥라인 왕국은 옛 그란디아의 전통을 그대로 인계받고 신전도 그 전통성을 인정했으니, 이제 국왕 폐하께서 그란디아의 모든 것을 이어받으신 적통임을 증명할 차례요!”
패드릭 맥라인 후작, 아니 이제는 대공이 된 아버지의 목소리와 함께 다시금 대전의 문이 열렸다.
이내 십수 명의 기사들이 보물이 담긴 투명한 상자를 가운데 두고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오오!”
그 옆에 서 있던 귀족들이 자연스레 감탄사를 뱉어 냈다.
지배자의 왕관(The Crown of ruler).
그란디아의 왕에게만 허용되었던 5클래스의 아티팩트가 상자 안에서 여전히 그 찬란한 빛을 뽐내고 있었다.
로건이 보기에는 주인을 잃었기에 갈 곳 또한 잃은 마나가 사방에 흩뿌려지는 것뿐이었지만, 그 실질을 떠나 왕관의 아름다움이 더 돋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로건은 그 흘러넘치는 마나를 보며 눈을 빛냈다.
‘새 왕조의 시작에 어울리는 물건을 다시 만들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지금으로선 제국이 아니면 만들지도 못하는 5클래스의 아티팩트를 그런 단순한 이유로 없앨 수는 없다는 게 로건의 생각이었다.
왕실의 보물 창고를 통틀어도 손에 꼽히는 보물.
더구나 이 왕관에는 한 가지 전설도 전해 내려오고 있었으니까.
– 그란디아의 적통이 아니면 반응하지 않는다.
신하들이 새로운 왕관을 만들자고 건의한 것은 그것을 염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로건은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그란디아의 적통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는 이 보물을 온전히 사용하기 위해 지어낸 말에 불과했다.
죽은 왕의 즉위식 때 느꼈던 그 마나의 파동.
초월 감각에 전해진 그 파동에는 혈통을 구분하는 마법 따위는 없었으니까.
‘오랜 역사가 이어지는 동안 서자나 차자로서 왕위를 차지한 자들이 만들어 낸 헛소문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오히려 이러한 의식을 제안한 것이기도 했다.
최고의 아티팩트를 폐기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면서, 거기에 명분까지 더해 줄 수 있게.
쿵.
왕좌에 올라서기 위한 계단 앞에 내려진 지배자의 왕관.
뒤로 물러서는 기사들을 보며 옆에 있는 아버지와 스승은 여전히 우려 섞인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 그 전에 한번 써 보는 것은 어떠냐.
– 주인을 찾는 빛? 그게 없다고 폐하를 반대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 말들이 떠올라 슬쩍 웃음 지은 로건은 태연한 표정으로 상자를 열어 왕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온갖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시선들 속에서 그것을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렸다.
그러자.
우우웅.
한차례 눈부신 빛을 뿌린 왕관은 이내 옅은 진동과 함께 그 빛을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대상을 찾지 못하고 밖으로 흩어지던 마나가 온전한 마법이 되어 로건의 몸에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순간 로건은 그 능력을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5클래스급 방어막에 4클래스급 해독과 피로 해소, 거기다 자동 복구 기능까지.’
과연 지배자의 왕관은 그 명성에 걸맞은 최고의 아티팩트였다.
그리고.
“정말……?”
“……왕관이 폐하를 인정했어!”
“허, 정말 그란디아의 적통을 이었다는 건가?”
지켜보던 귀족들 사이에서 탄성 섞인 수군거림이 번져 나갔다.
로건은 그 말들을 들으면서 그가 의도했던 부가적인 효과도 확실히 챙겼음을 실감했다.
이내 그가 담담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 로건 맥라인은 이 자리에서 그란디아의 ‘전통을 잇는’ 맥라인 왕조의 시작을 선언하고,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린다!”
“만세, 만세, 만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로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마자, 반 박자 늦게 시작된 검공의 선창을 필두로 대전의 모든 귀족이 다시 무릎을 꿇으며 만세를 외쳤다.
‘결국엔 여기까지 왔다.’
분명히 처음 계획했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의 난관을 하나하나 넘다 보니, 어느 순간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여태까지 자신이 해 온 일들이 최선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나은 선택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부족했을지언정 그는 항상 최선을 다해 왔고, 그 과정에서 이룬 결과가 이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로건은 지금까지의 매 순간 역시 최선을 다하기 위한 과정 중에 일부라는 것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러니 나는 계속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해 나간다.’
자신의 향해 환호성을 지르는 저 많은 사람의 목소리에 언젠가는 진심이 오롯이 담길 수 있도록.
그리고 자신의 영혼 깊숙이 박혀 있는 한을 씻어 낼 수 있도록.
‘끝없이 노력할 것이다.’
로건은 새삼 각오를 다지며 좌중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우와아아아아!”
터져 나오는 함성들이 그 각오를 응원하는 것 같았다.
* * *
–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었다.
– 계엄령이 풀렸다.
– 새 왕조의 시작을 기념하는 축제를 시작한다.
수도 곳곳에 새 왕조의 시작을 알리는 불꽃 문양의 깃발이 내걸리고, 초청된 상인들과 노점상들이 길거리에 좌판을 열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는 소식과 축제 소식이 퍼진 후에도 수도의 주민들은 쉽게 집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다 똑같은 귀족 놈들이야. 지들끼리 바꿔 먹은 거지, 뭐 달라질 게 있다고.”
“더 무섭지. 그놈들이 수도 입성할 때 벌인 학살 잊었어?”
“축제라고 괜히 나돌아 다니지 마.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죽을라.”
소문이 점점 흉흉해지며 거리는 축제 기간임에도 더욱 삭막해졌고.
“쯧쯧. 새 왕조는 무슨. 찬탈이지.”
“선왕을 죽이고 왕이 된 놈들이니까 저주를 받는 게야.”
“내가 그란디아 사람이지, 언제부터 맥라인 사람이었다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은 좀처럼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그런 목소리가 모이고 모이다 보니.
피로 세워진 새 왕조인 만큼 곧 최악의 폭정이 시작될 것.
근거 없는 소문이 기정사실처럼 수도의 주민들 사이에 번지기 시작했다.
결국 즉위식이 끝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검공과 패드릭은 함께 왕의 집무실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폐하. 흉흉한 소문 때문에 민심이 좋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왕실의 곳간이라도 털어 백성들이 축제를 적극적으로 즐길 수 있게 하심이 어떨는지…….”
“부족하다면 에스페란자의 창고도 모두 풀겠습니다.”
“어찌 에스페란자에만 부담을 떠넘기겠습니까. 맥라인의 창고도 풀겠습니다. 폐하, 허락해 주십시오.”
검공과 패드릭이 굳은 얼굴로 그렇게 청했지만.
“아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마세요. 일시적으로 민심을 얻어 봤자 그냥 낭비일 뿐입니다.”
로건은 그 요구를 칼같이 잘라 냈다.
“하지만 지금 수도의 분위기가 너무 좋지 않습니다.”
“소문이 흉흉하여 무언가 조치를 하지 않으면 상황이 더욱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대로는 건국제의 분위기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단순한 분위기 전환을 위한 낭비는 사절입니다.”
계속되는 로건의 굳건한 태도에 두 사람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검공과 패드릭이 돌아가고 창밖을 향해 돌아서는 로건.
황량한 거리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에 고민이 깊어졌다.
* * * 황량한 축제의 기간이 끝을 향할 무렵, 새 왕조의 첫 대전회의를 앞둔 로건은 측근들을 불러모았다.
“새 왕조의 가장 큰 목표는 국방력 강화입니다. 빠르면 3~4년, 늦어도 5년 안에는 시작될 제국의 침략을 막아 내기 위한 준비. 그것이 모든 것에 우선해야 할 목표라는 것을 새겨 두십시오.”
“이 상황에서까지 말입니까……?”
“적어도 어느 정도는 민심을 다스린 후에 해야 맞지 않을까요?”
로건의 말에 측근들이 모두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이라고 수도의 분위기를 모를 리 만무했다. 그러나 로건의 태도는 완강했다.
“몇 년 뒤에 다 같이 노예가 되거나 죽는 것보다는 지금 좀 분위기 나쁜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군사력 강화를 위해 생각나는 방법이 있으면 모두 말해 주십시오.”
각오를 다진, 흔들리지 않는 붉은 눈동자가 살벌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