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36)
236화첫 대전 회의 이후 영지의 세율을 올리고 거둬들이기 바빴던 귀족들은 왕실 직할령에서 내건 군대 모집 공고를 보며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세금을 만들어서 군대를 기르는 게 왕국을 안정화하는 거라고?”
“국왕이 제정신인가?”
“아니 그보다는, 저만한 군대를 길러서 뭘 하려고? 기존 맥라인과 에스페란자의 전력만 해도 무시무시한데…….”
그리고 그런 불안감은 그들 중 다수를 한자리에 모이도록 만들었다.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
“오. 하멜 자작. 잘 왔소이다.”
자크 후안은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귀족을 보며 부드럽게 웃어 주고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심각한 상황으로 만들어진 모임이기는 했지만, 그는 충분히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국왕의 연이은 실정으로 인해 귀족들이 구심점을 찾았고, 그것이 자신이 된 것이다.
‘왕은 어리석다. 어떻게 영웅이라 불리게 된 것인지 신기할 정도로.’
만일 에스페란자와 맥라인이라는 힘을 한 손에 쥔 것이 자신이었다면, 자신은 주변의 귀족들을 어르고 달래며 차츰차츰 심복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리하면 길어 봤자 서너 해만 지나도 왕국 전체가 왕의 심복이 되었을 터였다.
‘세금에, 군대에. 쯧쯧, 바보 같은 짓을 연달아서 하다니. 뭐, 나야 좋지만.’
절대적인 것으로만 보였던 새 왕의 권력이 점차 추락하고, 그 대척점에 서는 귀족들의 중심이 자신이 된다.
상상만 해도 가슴 떨리는 일이 눈앞에 실현되고 있었다.
왕의 양팔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가문을 제외한 공, 후작 가문이 사라진 지금의 왕국.
백작이라는 작위는 그 작위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물론 그게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처신에 있었겠지만.
“오! 이반 백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하. 대전 회의 때 보지 않았습니까. 그때 모습 감명 깊었습니다.”
“하하. 뭘요, 우리 귀족들의 당연한 권리를 지키기 위함인데요.”
자신과 같은 백작인 이반 클로드조차 이렇게 숙이고 들어올 정도였으니, 상상 속에 그리던 권력자의 자리가 이미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는 것 같았다.
“자, 자. 귀빈 여러분. 부족한 저의 초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국이 하 수상한 만큼, 모쪼록 우리 푸른 피의 귀족들이 온전히 힘을 합쳐 이 위난을 헤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모임이 그 장구한 항해의 초석이 되길 바랍니다.”
자크 후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박수 세례가 끝나자마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왕이 우리를 노리고 칼을 갈고 있으니 형식적인 절차는 생략하고 대책부터 말해 봅시다. 대책이 있습니까? 자크 백작님.”
마이크 테로다 백작.
왕국에 몇 남지 않은 백작 중의 한 사람이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표출했다.
자크와 비슷한 야망을 품고 있던 그는, 귀족들이 자신이 아닌 후안 백작가의 저택에 모여든 것 자체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그의 심정을 짐작하면서도 자크 후안은 부드럽게 웃어넘겼다.
그러나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 전 마이크 테로다의 발언을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하. 크게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마이크 백작님.”
“뭐요?”
마이크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다른 귀족들의 표정 역시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가뜩이나 막강한 병력을 가진 왕이 수만에 이르는 군대를 다시 양성하고 있는데, 걱정할 일이 아니다? 지금 당장 왕의 군대에 가입하겠다고 영지에서 빠져나가는 기사들도 있소이다! 우리가 농담 따먹기나 하러 여기 모인 것 같습니까?”
꼬투리를 잡았다는 듯 터져 나오는 마이크 테로다의 말에 다수의 귀족이 호응했다.
이 자리에 모인 귀족 중에는 중립이 아니라 애초에 친 맥라인파로 분류된 귀족들도 다수 있었는데, 그런 그들까지 불안해할 정도로 최근 국왕의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그런데 걱정할 것이 없다니?
쏟아지는 시선에도 자크의 부드러운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이면을 보셔야지요.”
“이면이라니요?”
“그 엄청난 군대를 키울 돈이 다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그거야 지금 우리에게서 뺏어 가는 세금이 아니겠소! 지금 누가 그걸 몰라서……!”
“그리고 그 세금은 한시적이죠.”
“그게……?!”
그 말에 마이크를 비롯한 몇몇 귀족들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것이다.
“제 계산상 이번에 거둬들인 세금으로 그 정도 수의 군대를 유지하기는 반년도 어렵습니다. 맥라인과 에스페란자에서 자금을 보탠다고 해도 거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겠지요. 왕의 군대 때문에 이 나라 최강의 두 가문이 오히려 망가지기 시작할 겁니다.”
자크 후안은 그 말과 함께 자신이 계산한 근거 자료가 적힌 문서를 돌렸다.
왕국의 전체 세금 수입과 맥라인과 에스페란자의 재정 도움 예상까지 적혀 있는 자료는 자금 흐름에 관해 조금이라도 아는 귀족들이라면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마이크 테로다 역시 떨리는 눈길로 자료를 살펴본 뒤에는 그 논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왕이 생각도 없이 막무가내로 일을 벌였다는 것이오? 설마 그 로건 맥라인을 바보로 보는 건 아니겠지요?”
로건 맥라인.
그 이름이 가진 무거움에 귀족들의 안색이 일제히 굳어졌다.
자크 후안 역시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자신의 실수를 자각하고는 더욱 힘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젊고 혈기 넘치는 왕이지요. 전쟁을 통해 그 힘을 증명해 온 전쟁영웅이자 초인. 하지만 어립니다.”
“왕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다 크게 뒤통수를 맞을지도 모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이크 백작님. 왕위에 오르자마자 세금을 두 배로 늘리고, 군대를 찍어 내고. 이게 현명한 사람이 할 만한 행동으로 보이십니까?”
“…….”
“누가 봐도 미래의 부작용이 확실한 어리석은 정책입니다. 과거에 쌓아 온 업적이 어떻든지 간에, 눈앞에 현실은 현실이지요. 왕이 된 영웅이 폭군으로 변하는 것 역시 역사에선 생각 외로 흔한 일입니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오.”
마이크 테로다는 여전히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사실 전 국왕 역시 알게 모르게 왕재로 소문난 사람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왕이 되고 나서 어찌 변했는지, 우리 모두가 보지 않았습니까? 왕좌에는 그런 마력이 있다는 것을 우리의 경험과 역사가 이미 증명하고 있습니다.”
귀족들 대다수는 이미 자크 후안의 말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좌중의 분위기를 느끼며, 자크 후안은 결정타를 날렸다.
“그리고 혹시나 왕에게 다른 복안이 있다고 해도, 이미 겉으로 드러난 실정의 후유증은 오래갈 겁니다. 그리고 설령 그리되지 않으면 우리가 더 오래가게 만들면 그만입니다.”
우리가.
그 말에 귀족들이 움찔했다.
“우리가 뭉치면 뭐가 두렵겠습니까. 맥라인의 성세를 이끌었던 연사 석궁도 이제는 왕국 전체에 퍼졌습니다. 초인 전력? 소수의 강자가 전장을 좌지우지하던 시대는 지났다는 것을 그 왕이 증명해 왔습니다.”
좌중에 웅성거림이 번졌다.
전국에 퍼진 귀족들이 일사불란하게 뭉치는 것도 어려운 데다가, 초인 전력에 대한 확실한 대처법도 내놓지 않았다.
하지만 다소간의 억지가 섞인 말에도 이미 분위기가 넘어왔다는 것을 자크 후안은 직감했다.
“시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우리가 있습니다. 왕이 실정을 거듭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뭉쳐서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니 저를 믿어 주십시오. 제가 여러분을 대변해서 왕국의 중심인 우리 귀족들의 지위와 권한을 지켜 내겠습니다!”
자신감 있게 울리는 자크의 목소리에 모여든 귀족들이 하나둘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자크 후안은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 * *
“어떻게든 예산은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만의 군대가 계획대로 양성된다고 해도, 맥라인과 에스페란자의 지원이라면 빡빡하게나마 운영해 볼 만합니다. 우리에겐 ‘그게’ 있으니까요.”
눈 밑 그늘이 입가까지 내려와 있음에도, 드웨인은 시종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지옥 같은 예산 소모의 최저점을 찍었다. 어떻게든 해냈어!’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은 마음.
그런데 돈을 쓸 줄밖에 모르는 그의 주군이 또다시 엄청난 소리로 그의 복장을 뒤집어 놓았다.
“그 마정석을 몇 달간은 다른 데에 써야겠는데.”
“……아. 하하하, 농담하지 마십시오. 하하하. 하하…….”
드웨인은 어떻게든 웃어넘겨 보려 했지만, 진지함이 잔뜩 어린 붉은 눈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썩을.”
순간 임계점을 돌파한 가슴속 울화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는 곧바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힘들어 죽겠다고 하니까 정말 죽나 실험해 보실 생각이십니까?! 예?! 차라리 제 배를 째십시오!! 못합니다! 안 돼요! 절대!”
그야말로 처절하게 결사반대를 외쳐 보지만.
“그리고 예산 좀 더 끌어다가 왕실 서쪽 능선에 황무지 있지. 그 산맥에 막혀서 테논 강이 들어오지 않는 황무지 말이야.”
“서, 설마…….”
“거기다 댐 하나만 더 만들자. 그리고 왕실 직할령과 에스페란자 영지에도 마정수 농법을 써 볼까 해. 한 석 달만 더 허리띠 바짝 조여 보자고, 드웨인. 응?”
“또요?! 왜 하필 지금입니까! 도대체 한정된 예산을 무시하고 일을 몇 개나 벌이는 거예요?! 정말 왕위에 오르시더니 머리가 더 나빠지기라도 하신 겁니까?!”
절절한 외침이 조금도 먹혀들지 않자, 분노한 행정관은 선을 세게 넘고 말았다.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지 충분히 자각하고 있는 왕은 쓴웃음을 지을 뿐 그런 가신을 탓하지 않았다.
그저.
“올해 우리 영지가 증명했잖아. 마정수 농법이 10년은 간다니까 댐 공사와 더불어 몇 달만 더 고생하면 당장 다음 수확기부터 군대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식량이 생겨.”
제 생각을 말하며 차분히 가신을 설득할 뿐.
“으으으.”
그러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드웨인의 얼굴빛은 도무지 쉽게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로건은 담담하게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였다.
“마정석 광산의 존재는 여전히 우리와 드워프들밖에 몰라. 1년, 1년 안에 왕국의 모든 것을 확실하게 장악하려면 이게 최선이야. 석 달이면 될 거야. 해 보자고.”
“저희 영지…….”
“응?”
“저희 영지, 그러니까 맥라인 영지는 이번 세금 인상에도 영지민들의 세금을 더 걷을 생각은 없습니다. 알고 계시죠?”
“으응. 알고 있지.”
그것이 다 마정수 농법 덕분이라고 말을 이으려는 찰나에 이어진 드웨인의 말에는 로건도 안색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공자님 말씀대로 하려면 맥라인 영지도 다른 영지들처럼 세금을 높여서 영지민들을 괴롭혀야 합니다. 마정석 광산의 생산량을 석 달이나 다른 데 쓴다는 것은 그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폐하?”
“…….”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폐하를 추앙하고 있는 고향 영지의 백성들마저 폐하께 욕을 하고 등을 돌리게 될 겁니다. 정말 그렇게까지 하셔야 하는 겁니까?”
숨이 턱 막혀 오는 말.
반대를 각오하고 있던 일이지만, 수치의 보고가 아닌 영지민들의 감정을 얘기하는 드웨인의 호소엔 로건도 일순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잠시간의 망설임 끝에, 그는 고뇌에 찬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1년. 1년이면 돼. 다음 수확기가 지나고 겨울이 오기 전에 모든 것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을 테니까.”
그 말에 드웨인은 흐려진 얼굴로 억지로나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