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41)
241화저벅저벅.
화려한 예술품들이 늘어서 있는 황궁의 복도를 걷고 있는 청년.
화려한 금실로 수놓은 금룡이 장식된 예복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 잘생긴 청년이었지만, 청년과 마주친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 분분히 고개를 숙이기 바빴다.
검은 머리, 검은 눈에 노란 피부는 제국 황실 직계 혈통의 상징이었고, 금룡의 문장 또한 황실의 인물이 아니라면 쓰지 못하는 것.
그러니 청년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이라도 마주치는 족족 고개를 90도로 숙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헙! 죄, 죄송합니다.”
“귀한 분을 뵙습니다!”
“아아, 괜찮습니다. 일 보세요.”
사람들의 뻣뻣한 반응에도 청년은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었고, 이내 그가 사라진 뒤에 남겨진 시종들이나 귀족들은 그 자신감 넘치고 여유로운 뒷모습을 보며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저분이 2황자님?”
“그래. 유력한 계승 후보시라고…….”
“역시 풍채부터 남다르시네.”
자기들 딴에는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하는 작은 목소리였지만, 2황자가 주변에 상시 펼쳐 놓은 은밀한 마법은 그 말을 고스란히 당사자에게 전달했다.
싱긋.
때로는 숙청의 대상을, 때로는 상을 줄 대상을 찾아 준 습관이 된 마법은 오늘도 가벼운 미소를 그에게 선물해 주었다.
하지만 그 자신만만한 얼굴도, 그리고 거침없는 걸음걸이도 어느 한 곳에 이르러서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조금은 긴장한 얼굴.
그리고 조심스러워진 걸음.
금룡이 그려진 문 앞에 선 2황자가 그곳을 지키던 기사에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사가 그의 방문을 고했다.
“바로스 반 아레스 전하가 뵙기를 청합니다.”
– 들라 하라.
중후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2황자 바로스 반 아레스는 깊게 심호흡한 후 조심스레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한 사람을 눈에 담았다.
옥좌를 가득 채우는 거대한 체구와 각진 얼굴, 묘한 광채가 번뜩이는 검은 눈동자.
그의 눈이 자신을 응시하는 순간, 2황자는 그 자리에 바로 부복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들어라, 바로스.”
“예, 폐하.”
“그래. 할 말이 있다고?”
“그란디아, 아니, 이젠 맥라인 왕국으로 이름을 바꾼 동쪽 접경 국가에 대한 보고입니다.”
“아, 로건 그 아이의 나라 말이로군. 그런데 맥라인 왕국?”
“최근 그 로건 맥라인의 반정으로 왕조가 바뀌었습니다.”
“허…….”
피식.
“……그래, 그런가. 국왕이라. 영입은 글렀군.”
상황이 이렇게 흘러갔는데도 아쉬워하시는가.
2황자는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부황의 인재 욕심에 속으로 혀를 찼다.
물론 겉으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으니, 담담하게 자신이 아는 또 다른 사실을 읊을 뿐이었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세금을 크게 올렸다고 합니다. 또 그 돈으로 왕실 직속의 군대를 양성하고 있다고 합니다.”
“……호오?”
“그 전격적인 행보를 볼 때, 전형적으로 야심이 넘치는 젊은 국왕으로 보입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향후 ‘그 계획’에 꽤 걸림돌이 될 것 같습니다.”
무리한 정책 때문에 그대로 자멸할지도 모른다는 보고는 굳이 하지 않았다.
대비책은 언제나 최악을 말해야 하는 법.
손에 쥘 수 있는 인재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진 이상, 황제의 관심사는 오직 몇 년 후가 될지 모를 ‘그 계획’뿐이었으니까.
다행히 그것을 언급하는 순간 심드렁하던 황제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음. 그래서?”
“제가 전에 말씀드렸던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자 합니다. 윤허하여 주십시오.”
서로 닮은 검은 눈이 잠시간 서로를 응시했다.
그리고 이내 황제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리해 보는 것도 좋겠지.”
“감사합니다, 폐하.”
다시금 고개를 깊이 숙이고 황제의 집무실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들어올 때보다는 조금 가벼워 보였다.
* * *
“요즘 분위기가 흉흉하군요.”
“아랫것들이 살기 힘들다고 왕을 욕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민심이 각박해져서 툭하면 싸움이 난다고…….”
두런두런 이어지는 이야기 가운데 좋은 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이내 눈을 마주친 화자들의 얼굴에는 웃음꽃만 가득했다.
“푸하하하, 역시 생각 없는 아랫것들은 다루기가 편하지 않습니까. 세금은 우리가 거두고 욕은 왕이 먹고.”
“어디 아랫것들만 그렇겠습니까. 왕도 마찬가지지. 세금에 군대에 겨울철 대공사라니. 실정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뭐, ‘우리’에게는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지요.”
다시금 응접실에 울려 퍼지는 화기애애한 목소리들.
‘그래. 우리, 그중에서도 나한테 제일 좋겠지.’
자크 후안은 속내를 감추며 자신의 앞에서 미소 짓는 두 사람에게 매끄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자신에게 동조하던 이반 클로드와 딴죽을 걸던 마이크 테로다.
둘의 태도는 달랐지만, 자크는 영지도 근방인 데다가 같은 백작인 그들과 손을 잡는 것을 택했다. 귀족들의 목소리를 좀 더 모으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 모든 것을 주도한 것이 자신이니만큼, 동맹이라 해도 다른 하위 귀족들은 전부 자신을 수장으로 생각할 터.
동급이라 생각하며 웃고 있는 눈앞의 두 사람도 언젠가는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살짝 염려되는 것은 있소이다.”
“음? 말씀해 보시지요, 마이크 백작님.”
“그 댐 공사라는 것 말입니다. 이미 맥라인 영지에서 여러 번 재미를 보았다는데, 온전하게 완공되면 왕실 직할령의 소출도 확 늘어나는 것 아니오? 그러면 나중에는 그 군대도 그럭저럭 운용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되는구려.”
그래, 아주 바보는 아니라는 거지?
마이크 테로다의 지적에 자크 후안은 차를 우아하게 한 모금 넘기며 냉소를 감춘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명하신 말씀입니다. 확실히 ‘나중에는’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요.”
말에 뼈가 있다는 것을 느꼈을까.
“다른 대책이 있다는 말이오?”
살짝 표정이 굳은 마이크 테로다가 자신의 매부리코를 긁었다.
“황무지를 농지로 개간하는 그 댐이라는 공사는 제가 봐도 대단하긴 합니다. 하지만 그 맥라인 쪽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제대로 성과를 거둔 곳이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요.”
“지금 그 맥라인이 공사를 하고 있는…….”
“그 인부들에게 주는 임금에 대해 들으신 게 있습니까?”
“뭐요?”
“겨울철인 데다가 힘든 공사라고 일반적인 막일꾼의 임금보다 30%를 더 지급한다고 합니다. 식량에 잠자리까지 제공하고요. 1만에 가까운 인부를 동원하면서요.”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피식.
“예. 왕이 그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 투자 수준이라면 황무지를 개간한다 한들 그곳에서 나는 한 해 소출로 바로 공사비를 메꾸는 것은 무리입니다. 첫해에는 소출도 크지 않을 테니, 적어도 몇 년은 걸리겠지요.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다면 모를까.”
“그럼 그렇다 해도 몇 년 뒤에는 안정이 된다는 말 아니오.”
“저는 그 전에 모아진 귀족의 힘과 여론을 바탕으로 그 군대의 해산을 요구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국왕이 열심히 키운 군대의 정예병들은 ‘우리가’ 잘 데려다 사용하면 되겠지요.”
“아……!”
자신을 견제하던 마이크 테로다가 진심으로 감탄하자 자크 후안은 미약한 승리감을 느끼며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왕의 자폭이 우리에게 새 시대를 열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쭉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축배사처럼 건네는 그의 말에 이반과 마이크가 웃으며 호응했다.
‘새 시대, 나의 시대가 온다.’
자크 후안은 언젠가부터 꿈틀거리기 시작한 가슴속 깊은 곳의 욕망을 느끼며 진하게 웃었다.
* * * 새해가 시작되기 전의 겨울은 맥라인 왕국의 국민에게 참으로 힘겨운 날들이었다.
새 국왕이 즉위하고 올라간 세금 때문에 예년보다 곳간을 채우지 못한 백성들은 돌아올 농번기에 먹을 식량은 고사하고 당장 겨울철을 나는 것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오히려 활기가 넘치는 곳이 있었으니.
그곳은 세간에 퍼진 좋지 않은 소문들과는 전혀 다른, 서부 황무지에 물을 융통할 댐 공사 현장이었다.
“그쪽 아래 더 파!”
“옳지! 됐어! 조금만 더!”
“돌 너무 큰 건 마법사님들한테 맡기고!”
수로를 파고 돌을 나르며 산맥 밑에서 움직이는 1만에 가까운 인부들의 얼굴에는 열의가 있었다.
그냥 멀리서 보기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활기.
얼어붙어 단단해진 땅은 불과 몇 달 전에 비해서도 몇 배는 파기 힘들어졌고, 조금만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름이 돋게 만드는 날씨는 칼바람으로 사람을 괴롭혔다.
하지만.
“집에 식량 든든히 보내 뒀으니 안심이야. 잘 먹고 있다고 우리 딸이 편지도 보냈어!”
“나만 힘쓰면 가족들이 겨울을 편히 나는데, 이게 농사일보다 마음이 편하구만.”
“일정보다 빨리 완공하면 추가 임금도 준다잖아. 내년 농번기 전에 끝내야지!”
“그래. 힘내자고!”
감독관도 아닌, 인부들이 서로를 격려해 가며 움직이는 모습.
가까이 다가가기 전 멀리서부터 그 목소리를 인지한 로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마도사님이나 하마르 공방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요. 사람을 보내 마중하라 이르겠습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공사를 빨리 완공하는 게 먼저야. 직접 찾아가 보면 되지.”
“……알겠습니다.”
왕이 되면서 불편한 점이 생겼다면 바로 이러한 것들이었다.
쓸데없는 허례허식에 시간을 빼앗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
형식상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지만, 로건은 왕궁 밖에서까지 그런 것을 지키고 싶지는 않았다.
“인부들 일 방해하지 않게 최대한 사람 적은 곳으로 우회한다.”
뭘 그렇게까지.
호위하는 기사들의 얼굴에 불만이 스치는 것을 보았지만, 지금은 아주 조금이라도 공사의 완공을 앞당겨야 할 때.
로건은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으로 우회하여 산 아래쪽으로 접근해갔다.
물론 아무리 돌아간다 해도 인부들이 높게 걸린 불꽃의 깃발을 보지 못할 리는 없었다.
그러나 멀리서 높으신 분의 깃발이 보이는데 그 근처에 굳이 다가가는 인부들은 없었으니, 결국 가장 먼저 로건의 행차에 반응한 것은 댐의 수문 공사가 한창인 드워프들과 골렘 마탑의 마법사들이었다.
“구, 국왕 폐하?!”
“작업 중지!”
“폐하의 행차시다!”
히이이잉.
소란스러워지는 광경에 속보로 걷던 로건이 말을 멈췄다.
그러자 그 앞으로 익숙한 얼굴의 마법사가 조금은 피곤한 얼굴로 튀어나왔다.
“폐하. 어찌 기별도 없이 오셨습니까.”
“작업까지 멈출 필요는 없어, 그릭. 하던 일 계속하게. 클레이튼 공과 하마르는?”
“산맥 안쪽에서 내부 점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쪽으로 가 보지.”
“제,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어허. 일하라니까?”
당황하는 그릭을 남겨 둔 채 산 중턱을 깎아 만든 동공으로 향하는 로건.
낯설지만 익숙한 느낌의 현장이 굳은 로건의 얼굴에 약하게나마 미소를 만들었다.
‘맥라인에 댐을 처음에 만들 때만 해도 정말 신나게 했었던 것 같은데.’
당시에 시달린 하마르가 알았다면 경기를 일으킬 생각이었지만, 로건은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
예정된 시일이 다가올수록 느껴지는 막중한 부담감.
거기에 아직도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왕관의 무게가 더해지자 점점 웃는 일이 줄어드는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 더 높은 자리로 가시면 지금보다 더 힘들어하실 것 같아 걱정됩니다.
오랜 시종의 말이 다시금 떠오르며 가슴을 울렸지만.
‘내가 택한 길이야. 이제 최후의 고비가 몇 년 남지 않았어. 반드시 이겨 내고, 그 후에 마음껏 웃자.’
그렇게 각오를 다지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얼굴들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거 외에도 아직 할 일이 많아.’
이 겨울, 신임 왕이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많이 밀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