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42)
242화
“폐하!”
“주인!”
다소 피로한 안색의 클레이튼과 뺨이 홀쭉해진 하마르는 로건을 마주하자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고생한 것이 훤히 드러나는 얼굴들에 긴장까지 어리는 게 보이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로건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쓴웃음과 함께 그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이 많아, 다들.”
“나라를 위한 일인데 어찌 마다…….”
“알면 좀 쉬게 해 주…….”
180도 다른 대답을 한 두 책임자가 서로를 보며 어색하게 웃음 짓는 사이, 로건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몇 차례의 대공사를 함께한 경험이 있는 탓인지, 공사는 매끄럽게 진행되고 있는 듯했다.
왕도의 서쪽 황무지를 개간하기에 가장 적합한 위치를 잡아 시작된 공사.
완성되어 가는 수문도, 산맥 아래를 가로지르는 공동 너머로 보이는 테논 강까지의 거리도 흠잡을 곳 없어 보였다.
다만 혹시나 했던 문제가 어김없이 발생하고 있었다.
“저수지 규모가 이 정도로 충분하겠어? 맥라인 댐보다 작은 것 같은데? 개간해야 할 경작지가 두 배는 크다는 걸 잊은 거 아냐?”
“계속 흘러들어 올 강물을 생각하면 이 정도면 적당하다는 계산이다, 주인. 우리도 몇 번 경험이 있으니…….”
“아니, 더 파. 수용 가능한 수량의 두 배 이상으로.”
그 단호한 대답에 하마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빨리 끝내야 한다면서? 그러면 준공 시간이 훨씬 늘어난다!”
“폐하. 제 계산 역시 하마르 공의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클레이튼의 변호에도 로건은 고개를 저었다.
“한 번에 황무지 전체를 적실 수 있는 양이 되어야 합니다. 이곳에도 마정수 농법을 사용할 거니까요. 흐르는 물보다 고여 있는 물에 마정석을 녹이는 것이 비용을 훨씬 절감할 수 있습니다.”
로건의 말에 하마르와 클레이튼의 눈이 커졌다.
“마정수…… 재정적으로 힘들다고 하지 않았나, 주인?”
“괜찮으시겠습니까? 정말?”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 일단 내 말대로 해.”
“아…….”
놀라는 것도 잠시,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의 규모가 엄청나게 늘었다는 것을 깨달은 하마르의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끄으응. 이걸 두 배로 더…….”
클레이튼 역시 한숨을 내쉬었지만, 로건은 흔들리지 않았다.
‘필요한 일이야. 해야만 해. 조금이라도 시간을, 그리고 자금을 줄이려면.’
피곤이 쌓인 것인지 약간의 두통이 느껴졌지만, 굳이 여기서 티를 낼 필요는 없었다.
“하마르, 그렇게 하면 예상 완공 시기는?”
하아.
하마르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연신 고개를 저었지만, 바로 답을 했다.
“앞으로 두 달은 걸리겠다, 주인.”
“……한 달 정도로 줄여 봐.”
“아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아하하하. 하마르 공, 일단 해 보죠. 폐하,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입이 틀어막힌 채 눈만 부릅뜨는 하마르에게도, 어색한 웃음으로 고개를 젓는 클레이튼에게도 다 미안했다.
클레이튼이 저러는 것은 재정이 이미 한계에 달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테니까.
“예. 그럼 마무리까지 잘 부탁합니다, 클레이튼 공.”
“맡겨 주십시오, 폐하.”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피로에 찌든 상황.
하지만 빡빡한 현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이들은 불만을 가질 틈도 없었다.
“아니, 어떻게 한 달을 줄……!”
“하마르 님. 쉿!”
업무량이 가장 증가한 한 드워프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 * * [에스페란자 영지까지 마정수 농법 시행을 완료했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군. 댐 공사가 끝날 시기가 되어서나 끝날 줄 알았는데.”
[마정석 비율을 확실히 정립한 것이 컸습니다. 관련 보고서는 따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그래. 잘했다, 리아.”
빅토리아의 보고에 로건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계획이 틀어졌다면 틀어진 것이지만, 그 방향이 좋은 쪽이라 절로 웃음이 나온 것이다.
“일단은 수도로 돌아와라. 댐이 완공되면 거기에 들일 마정석을 챙겨서.”
[이미 챙겨 놨습니다.]“……좋아. 수고했다.”
생각보다 더 일 처리가 깔끔한 빅토리아의 보고가 간만에 로건을 웃게 해 주었다.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으니 대가를 줘야 할 텐데……. 리아, 뭐 바라는 게 있느냐?”
[아닙니다. 마법사로서 얻은 성취가 큰 임무였습니다. 믿어 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일 처리뿐만 아니라 하는 대답도 예쁘기만 했고, 로건은 그래서 더욱 뭐라도 챙겨 주고 싶었다.
“그래도 말해 보거라. 상벌이 확실해야 다른 이들도 의욕을 갖고 일할 테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음…… 최근 마법 병단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저도 그곳에 들어가고 싶습니다.]“뭐?”
막을 이유는 없었다.
로건은 이 나라의 모든 마법사가 마법 병단에 소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주의였으니까.
더구나 공병이면 공병, 전투 지원이면 지원. 골렘 학파가 보여 준 효용성은 이미 맥라인의 전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왜지? 이유가 궁금하구나.”
[사실 마탑에서 연구만 하는 것은 체질에 맞지 않아서요. 직접적으로 마법을 사용하고 훈련도 하는 곳이면 좋겠다 싶었습니다.]싸우고 싶다라.
그 예상외의 대답에 로건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통신구 너머, 빅토리아의 뒤에 서 있는 빅토르를 바라보았다.
“뭐, 나야 네 오빠만 괜찮다면…….”
[괜찮습니다.]“음?”
동생이 대놓고 전투 훈련을 받겠다는 것은 싫어할 줄 알았는데?
빅토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빅토르의 표정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이전의 과보호가 많이 사라진 느낌.
통신구를 통해서 보는 것이라 느껴지는 괴리감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동생을 믿는다는 느낌이 확연히 풍겼다.
‘저 아이들도 확실히 성장했다는 건가.’
이 또한 긍정적인 변화라 로건은 기꺼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클레이튼 님에게는 네가 알아서 고하고, 원하는 때에 병단으로 가거라.”
[예. 감사합니다!]“빅토르. 너도 수고 많았다. 그래서 너는 따로 선물을 준비했다.”
[……예? 저는 별로 한 것도…….]“오늘부터 왕실 기사단 수련에 합류해라. 한동안 호위기사 임무는 배제다. 정규 훈련 뒤에 검공께서 너의 수련을 봐주실 테니 열심히 배우도록.”
[……예?]순간 표정이 멍해진 빅토르.
하지만 이내 얼굴이 잔뜩 상기된 그는 당장 환호성을 지르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흥분된 기색을 보였다.
불과 스물한 살의 나이에 최상급기사의 경지에 오른 천재는 이로써 더욱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댐 공사는 순조롭고, 마정수 농법은 거의 끝났고. 이제 병력 훈련 상황만 확인하면 되나?’
돈 잡아먹는 3대 정책 중 마지막.
이제 훈련을 시작한 지 대략 3개월 된 병사들.
왕국의 미래를 위한 또 다른 발판들을 확인할 차례였다.
* * *
“발이 보인다!”
“고작 이 정도로 뒤처지나!”
“기사라는 놈들 기초 체력이 이 모양이라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
왕실 연병장에서 하루가 멀다고 터져 나오는 비난 섞인 고함.
갑옷에 불꽃의 문양을 새긴 기사들이 아직은 민무늬 갑옷을 입은 기사들을 쫓아다니며 연신 닦달하고 있었다.
물론 그 대상이 된 기사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푸륵.
약에 취해 잠든 전투마들이 그들의 어깨 위에 얹어져 있었으니까.
“왜, 사람이 말을, 으드득, 들고, 뛰는 건데.”
“미, 미친놈들.”
“이게 훈련이야, 끄윽, 학대야?!”
딴에는 들리지 않게 작게 얘기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감각이 예민한 몇몇 사람들에게는 고스란히 들리는 목소리들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기사들의 훈련을 보는 로건의 표정을 어찌 해석했는지, 검공이 헛기침 소리와 함께 변명 같은 말을 내뱉었다.
“흠흠. 제가 제시한 훈련은 아닙니다. 맥라인에서는 저렇게 훈련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본인의 말과 일체심을 기르겠다는 의도도 좋다고 생각돼서 써 보고 있는 겁니다.”
“……효과는 확실할 겁니다. 이미 맥라인에서 증명된 방법이니까요. 물론 산이 아니라 평지니까 강도는 좀 덜하겠지만요.”
“그런 미친…….”
“……?”
“……짓을 했으니까 맥라인 기사들이 강한 거겠지요. 에스페란자의 부하들도 칭찬이 자자합니다. 기사들의 수준이 우리 못지않다고.”
그건 너무 과찬일 것 같습니다만.
“그런데 말씀드린 철혈검을 전수하시기로 한 거 아니었습니까? 왜 체력 훈련만 하고 계신 겁니까?”
“기초가 부실한 놈들도 제법 있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조금 망설이는 듯한 검공의 표정에 로건은 잠자코 말을 기다렸고, 검공은 이내 한숨과 함께 속내를 드러내 보였다.
“그런 놈들 가운데 자기 주군을 버리고 왕실 기사단으로 투신한 놈들이 반입니다. 아무리 명목상 그 주군의 주군이 폐하라지만, 그 정신 상태 정도는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아니, 제가 새롭게 새겨 주려 합니다.”
“……그러십시오.”
검공의 굳은 표정에선 미약하게나마 살기까지 보였지만, 이 노기사가 이미 한 번 주군을 저버리게 한 전적이 있는 로건으로선 차마 그런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물론.
“그래도 스승님 마음에 찬 기사들은 올해 수확기가 가기 전까지 철혈검 기본은 떼게 해 주셔야 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
“……알겠습니다. 일단은 그거면 충분합니다.”
“아, 그런데 폐하.”
“예?”
“맥라인 기사들 말이 그 철혈검이라는 것을 제가 전수해 줬다고 하던데…….”
“아, 전 오늘 일정이 빡빡해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스승님.”
대답을 회피하며 사라지는 로건.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검공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훈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전체 차렷!!”
“충!”
카이솔론의 창술 시범을 보고 있던 남자 훈련병들은 로건이 다가오자 절도 있게 자세를 잡았다.
전체 인원이 다 모인 것은 아니지만, 대충 어림하기에도 5천 명 정도는 되는 듯했다.
그만한 인원의 대열이 흐트러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로건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총 모집 인원 5만 2천 명 중 남자 훈련병 38,580명 훈련 결과, 낙오 121명을 제외한 전원이 기초 체력 훈련과 제식 훈련을 마쳤습니다. 현재는 체력 훈련을 중심으로 무기술 훈련을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헤인켈의 덤덤한 표정은 달리 말하면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조만간 여군과 통합 훈련도 진행할 예정입니다.”
“네. 그런데 훈련 상태는 좋지만 왜인지 맥라인 영지보다 강도는 약해진 모양입니다만?”
그 말에 헤인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내 그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답했다.
“맥라인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했던 맥라인 기사단과 돈 때문에 들어온 사람들 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맥라인 식으로 하기엔…….”
“그게 교관의 능력 아닌가요?”
“…….”
“아, 미안합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
까득.
“이제부터 제대로 다시 훈련시키겠습니다.”
헤인켈의 표정이 험악해지고 훈련병들의 비명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지만, 로건은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훈련소를 돌아 나올 수 있었다.
“앞으로 창!”
“하!”
맨 앞 열에서 교관의 역할을 하고 있는 장신의 여자 병사의 구령에 따라 휘둘러진 창들은 아직 전체적으로 어설펐다. 그러나 대열은 흐트러지지 않게 유지되고 있었다.
훈련을 시작한 지 불과 3개월.
옛 그란디아의 문화 속에서, 농사일을 제외하면 평생 운동이라고는 해 보지 않았을 여자 훈련병들의 눈빛은 그야말로 뜨거웠다.
오전에 본 남자 훈련병들과 비교해도 말이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일렌은 햇볕에 그을려 까무잡잡해진 얼굴에 뿌듯함을 한껏 띄우곤 성과를 보고했다.
“최종 시험을 통과한 병사 지원자 5만 2천 명 중 13,420명이 여군이었습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거의 낙오하지 않고 제대로 훈련을 소화하고 있지요. 남성 병사들보다 낙오율은 오히려 더 낮습니다. 지금 보고 계신 캐시를 비롯한 맥라인의 선임 병사들이 교관 역할을 훌륭히 해 준 덕분이기도 하지요.”
“이 나라 최초의 여기사가 훌륭한 본보기가 되어 주었다는 소문도 들었는데?”
“물론 그것 역시 사실입니다.”
당당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에일렌의 얼굴은 로건이 내심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밝아 보였다.
여군의 훈련을 맡겨 놓고 바쁘다는 핑계로 석 달 넘게 찾지도 못했는데…….
“좋아 보이네요.”
“당연하죠!”
“……당연?”
“이 나라 최고의 검호에게 검술 수련도 받고, 만 명이 넘는 여군들의 우상도 되고. 매일매일 살아 있는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행이군요.”
분명 다행이었지만, 뭔가 허전한 마음에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뭐, 매일같이 바쁘신 님을 못 보는 것 하나 빼고는요.”
무심한 듯 훈련장을 보며 던진 에일렌의 한 마디가 로건의 심장을 쿵 울렸다.
“미안해요. 할 말이…….”
반사적으로 변명이 나오는데.
“괜찮아요.”
“음?”
“지금은 그래야만 한다는 거 알아요. 전 다 이해하니까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더 집중하세요.”
“그게…….”
“그래야 타운에서 같이 말 달리던 그 시절이 더 빨리 돌아오는 거잖아요. 그렇죠?”
흔들리지 않는 푸른 눈동자가 로건을 응시했다.
“그럼요. 꼭…….”
그 단단한 눈빛이 답답했던 로건의 마음에 한결 힘을 더해 주었다.
“그렇게 만들 겁니다.”
굳게 잡은 손.
오랜만에 만난 연인은 잠깐이나마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설렘보다는 결심을 다졌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동남부 지방에 역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생각지도 못한 최악의 변수가 로건을 얼어붙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