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45)
245화로건이 역병 구호단이라는 임시 작명으로 부르고 있는 일행이 라프탄에 도착한 것은 수도를 떠난 지 불과 4일 뒤였다.
보통 행렬이 대규모일수록 그 속도가 늦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일반인의 걸음으로 일주일이 걸리는 거리를 천여 명이나 되는 인원이 고작 나흘 만에 주파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무척이나 서둘러 움직였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렇게 숨 가쁘게 이동한 일행이 라프탄 영지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본 광경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어, 엄마…….”
“아들, 자면 안 돼. 알겠지? 조금만 더 참아.”
“조금만, 조금만 더…….”
얼핏 봐도 지치고 피로한 얼굴들.
가족으로 보이는, 하나같이 해쓱한 얼굴의 영지민들이 짐 보따리를 한 아름 둘러메고 냇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라프탄 영지의 경계가 되는 기다란 시내 앞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자유가 아닌 사신의 손길이었다.
“대장! 또, 또 옵니다!”
“젠장, 저들끼리 죽을 것이지 왜 자꾸……! 왜 날 봐?! 쏴!! 죽이라고!”
냇가를 따라 길게 늘어선 병사들이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었다.
대장이라 불린 이의 지시를 받은 병사들은 입술을 깨물면서도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는데, 그들이 겨누는 방향 앞쪽에는 이미 화살의 세례를 받고 쓰러진 것으로 보이는 시체들 십여 구가 나뒹굴고 있었다.
“쏴!”
파바박.
대장의 구령과 함께 쏘아지는 화살들.
“억!”
“여보!!”
사내가 쓰러지고, 아이를 업고 있던 아낙네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윽! 자, 잠깐! 여, 여기……!”
부들부들 떨리는 손.
화살에 허벅지를 맞은 상태에서도 남자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상인임을 증명하는 신분 패.
아무리 봐도 상인으로 보이는 일행은 아니었지만, 신분 패는 꽤 정교해 보였다.
“빌어먹을, 하나같이 마음 약해서는……. 제대로 안 쏴?! 젠장!”
부하들을 째려보며 투덜거린 대장은 한숨을 내쉬며 남자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이상한 걸 구해 와서는!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돌아가! 라프탄 영지민은 어디로든 나갈 수 없다!”
대장의 고함에 화살을 맞은 남자의 표정이 시커멓게 죽었다.
전 재산을 털어 구한 상인 신분증도 통하지 않는다니 절망감이 엄습했다.
‘이젠 돌아갈 길도 없어…….’
돌아가 봤자 무단 탈주민으로 간주되어 처벌이 기다릴 뿐이었다.
무엇보다 처벌보다 무서운…….
안 돼. 절대로 돌아갈 순 없다.
어차피 돌아가도 죽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좀 도와주시오, 나으리! 돌아가면 우리는 죽소!”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낸 듯, 처절한 감정이 그대로 담긴 외침이었다.
하지만.
‘빌어먹을. 어쩌다 이런 재앙이.’
대장이라고 이런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위에서 내려온 명령은 강경했고, 나름의 설득력도 있었다.
게다가 그 역시 한 가정의 가장.
역병이 자신의 집으로 옮겨 오는 상상은 꿈에도 하기 싫었다.
“아, 아들. 아들만 나가게 해 주시오. 이 아이는 아직 건강하오! 그 저주받을 질병은 우리 마을에 오지도 않았고, 어린 애들은 그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 않소!!”
자신의 속도 모르고 남자는 근거 없는 말을 마구 내뱉었다.
“웃기지 마라! 다시 한번 경고한다. 돌아가지 않으면 죽는다. 이게 마지막 경고다!”
그 서슬 퍼런 경고에 남자는 이내 결심한 듯 굳은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죽이쇼! 어디 무고한 사람 죽이고 잘 사나 봅시다!”
지랄, 누구는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 줄 아나?!
바로 앞에 널린 시체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거야?
남자의 대답에 대장은 이를 악물었다.
“뭐 해! 쏴! 죽겠다는데 소원 들어줘야지!”
그 말에 병사들이 이를 악물고 다시 활을 들었다.
재차 떨어지는 명령.
“쏴!”
파바박.
“여보!”
새카만 화살 비가 움직이지 못하는 남편을 감싼 아낙네와 기절한 듯한 아이 위로 쏟아졌다.
다시금 참상이 펼쳐지기 직전.
번쩍.
갑작스레 번득인 황금빛과 함께 일가족을 향해 날아들던 화살 비가 순식간에 그쳤다.
죽을 위기에 처했던 일가족은 물론, 병사들 또한 어리둥절한 가운데.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설명을 해 줘야겠다.”
그들의 앞에 살벌한 기세를 줄줄 흘리는 붉은 눈의 기사가 나타났다.
* * *
“이상 없습니다. 일가족 모두 멀쩡합니다.”
일가족을 치료한 사제의 보고를 들은 로건은 병사 대장을 향해 다시금 눈을 부라렸다.
“경계를 봉쇄하라고만 했더니, 아예 영지민들을 쏴 죽여?! 이 미친 것들이……!”
무릎을 꿇은 병사 대장의 설명을 들은 로건의 눈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타, 탈주민들만 쏜 것입니다. 대부분은 경고를 먼저 했고…….”
“시끄럽다! 처음부터 쏴 죽이려 한 것을 내가 똑똑히 보았는데 감히 거짓말을 해?”
“여, 영주님 지시였습니다! 그래도 보통은 일부러 빗맞히고 경고를…….”
“됐다. 네놈, 어디 영지의 병사냐. 네놈의 영주에게 책임을 물어야겠다.”
“케, 켈로만 영지입니다. 폐, 폐하.”
“켈로만?”
“이곳이 켈로만 자작령입니다, 폐하. 라프탄 영지의 서쪽과 인접해 있습니다.”
로건은 다가온 기사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일행은 라프탄으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역병을 종식시킬 것이다. 켈로만 자작에게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지원하라 이르라. 만약 그리하지 않는다면…….”
우지직.
로건이 걸터앉은 나무 둥지를 시작으로, 지진이라도 난 듯 지면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콰아앙.
“히이익!”
이내 멀쩡히 서 있던 나무 한 그루가 통째로 터져 나가는 것을 본 병사들이 기겁하며 주저앉았다.
왕의 권위만으로도 강제할 수 있는 이들에게 다소 지나친 행위라 볼 수 있었지만, 로건은 좀 더 직접적인 경고를 전달하고 싶었다.
“켈로만 가문 자체가 박살이 날 것이라고.”
“예? 예! 예! 알겠습니다, 폐하!”
쯧.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다 뒤집어엎을 수도 없는 노릇.
‘일의 선후라는 게 있으니.’
가지고 온 물자가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2차 구호품이 오기 전까지 근처의 귀족들에게 각종 물자를 요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자신이 이 사건을 직접 목격한 만큼, 빠져나갈 구실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우리만 그런 것도 아닌데…….”
돌아서는 로건의 뒤에서, 아마도 들리지 않을 것이라 믿었을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그의 얼굴에 더욱 살벌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켈로만 자작령, 겐치스 남작령, 페로나 남작령 세 군데 모두 동일한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일행이 잠시 이동을 멈춘 사이, 좌우로 퍼져 나간 기사들이 정보를 가져온 것은 금방이었다.
덕분에 로건은 라프탄 영지와 맞닿아 있는 세 군데 영지에서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경계를 봉쇄하고, 그걸 넘으려는 영지민들을 쏴 죽이는 방법을?”
“……예.”
“그냥 몰아내는 것으로는 성에 안 찬다던가?”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병사들에게 병이 옮을까 걱정하는 것 같습니다.”
하아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해는 한다. 이해는 하는데.’
그러다 문득 일리아 주교의 말이 떠올랐다.
–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굶주림이 만연하고 위생이 불량하다는 것이지요.
그래, 이참에…….
“식량…….”
“예?”
“세 영지 모두에게 전해. 라프탄 영지에 식량을 최대한 지원하라고. 만족스럽지 않을 경우, 내 백성을 허락 없이 죽인 죄를 묻겠다고.”
“전령을 보내겠습니다.”
빅토르가 그렇게 고개를 조아리는 순간 기사 세 명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떠났고, 일행은 무거운 안색으로 라프탄 영지에 진입했다.
* * *
“이렇게 직접 찾아와 주시다니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폐하.”
에릭 라프탄 남작은 외성 밖에서부터 로건을 기다리다 깃발을 보자마자 달려와 엎드렸다.
투실투실한 볼살에 어울리지 않게 움푹 들어간 눈과 시커먼 눈 밑 그늘은 그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지만.
“지난 세금 조치 이후, 영지의 세율을 8할로 올린 자입니다.”
도착하기 직전에 들었던 귓속말 때문에 그다지 동정심이 들지는 않았다.
‘원인 제공자가 그저 명령에 따른 자를 탓해 무얼 하겠냐만.’
이렇게라도 책임을 전가하고 싶은 마음은 너무 이기적인 것일까.
로건은 스스로의 생각을 비웃으며 바로 본론을 물었다.
“현재 상황은?”
그 담담한 물음에 대한 대답은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호소로 돌아왔다.
“열두 개의 마을에서 감염자가 나왔습니다! 증상이 나타난 직후부터 감염자들을 격리했는데도 자꾸 하나둘씩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제 아침에는 내성 시종이 증상을 보이기도……!”
울먹이며 소리치는 남작.
돼지가 우는 듯한 모습이 그리 좋게 보이지는 않아 로건은 남작의 말을 끊었다.
“그래서 조치는?”
“여섯 개의 마을이 전멸했고, 나머지 마을들은 병사를 보내 외부 봉쇄를 명했습니다. 어제부터 내성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남작의 말에 로건은 고개를 들어 성을 바라보았다.
예전, 몰락했을 때의 맥라인 성보다 조금 더 커 보이는 성.
저 성의 내성이라고 해 봤자 그리 넓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그 시종부터 보는 게 낫겠습니다.”
일리아 주교가 로건의 시선을 따라 내성을 바라보며 그리 말하는데.
“주교님. 주교님께서 신성력으로 치료하시기 전에 제가 먼저 그 시종이란 자를 만나 봐도 되겠습니까?”
치사 길드의 대표라는, 길버트라는 중년 남자가 그 말에 살짝 끼어들었다.
치료사이기 이전에 4서클의 마법사이기도 한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겁도 없이 역병 환자를 가장 먼저 만나 보겠다고 나서는 것이었다.
실제로 마나유저든 포스유저든, 일정 경지 이상의 이능력자들이 역병에 죽었다는 기록은 없기도 했다. 길버트의 담담한 자신감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로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들었나? 남작, 그들은 어디 있지?”
“그, 그게…….”
시선을 회피하는 에릭 라프탄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찜찜함이 느껴지는데, 늘어선 남작령의 병사들 뒤쪽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나, 남작이 내성의 모든 시종을 죽였습니다! 우, 우리 누나도……!”
울음기 섞인 커다란 목소리.
그 처절한 목소리에 로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 *
“이건 정말 미친놈인가? 못해도 수년간 함께한 사람들일 텐데, 병이 의심된다는 이유만으로 모조리 죽였다고?”
다시 내성 안.
들어가기 싫다고 발버둥을 치던 남작을 억지로 끌고 들어선 대전에는 아직도 피 냄새가 진동했다.
전염될까 두려워 죽은 시종들의 시체조차 치우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무릎 꿇려진 남작을 보는 일행 모두의 표정에는 혐오감이 가득했다.
“저, 저는 그저 살고 싶어서…….”
바둥거리는 꼴이 이제는 정말 돼지처럼 보였다.
그것도 몹쓸 병이 걸린 돼지.
“하. 이걸 그냥 죽여 버릴 수도 없고…….”
로건의 한숨 섞인 한탄에 에릭 레프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저는 그냥 역병이 퍼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저질러 놓은 단면만 보아도 이 에릭 라프탄이라는 놈은 귀족으로서 자격이 없는 놈이었다.
하지만 시종을 죽였다는 이유만으로 영지 귀족을 참하기에는 그 반발이 거셀 터.
더구나 로건은 라프탄 영지를 구하겠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자원을 이끌고 방문한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영주를 죽인다?
주변 귀족들이 지원은커녕 대놓고 반발할 거리를 만들어 주는 일일 뿐이었다.
“……영주를 감방에 가둬라. 일의 수습이 먼저다.”
일단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더 중요했다.
에릭 레프탄 역시 그나마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에 안도한 것인지 자신을 잡아끄는 기사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놈에 대한 처분은 역병 이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거기, 기사.”
“……예. 폐하.”
“가장 가까운 마을로 안내해라. 병자가 있는 마을로.”
“그게, 저기…….”
꾸물거리는 기사의 태도에서 불안감이 느껴졌다.
“설마……?!”
“오전에 영주님께서 병자가 나온 마을의 몰살을 명하셨습니다.”
일리아의 의혹 섞인 외침이 터지자마자 고개를 숙인 기사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대전은 싸늘한 침묵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