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48)
248화 ‘아, 맞다. 그래, 들은 적 있어. 제국 서부에서 발병한 역병이…….’
시체를 태우고 또 무언가를 하는 것만으로도 역병이 조기 진압되었던 사례.
분명히 전생에 그런 일이 있었다.
‘젠장. 그때 유심히 들었더라면 다른 방법도 기억났을 텐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로건이 활동하던 지역과 너무 먼 곳의 이야기였고, 그란디아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 생각해 흘려들었던 탓이었다.
‘그나마 이거라도 기억이 나는 것이 다행이지.’
그러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한가지였다.
“설득력 있는 말이다. 좋다. 역병으로 죽은 시체를 모두 태워라.”
대륙 전체적으로 보면 화장(火葬)도 장례 문화의 한 갈래이기는 했지만, 왕국에서는 특별한 사연이 없는 한 매장이 가장 보편적인 장례 방식이긴 했다.
큰 죄를 저질렀을 때 당하는 사형의 방법 중에 화형이 있는 만큼, 죽은 자를 모독한다는 인식도 있었으니까.
“다소 저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감수하고 시행해. 역병을 막기 위함이다.”
“……예.”
“그리고 시체를 불태울 때, 평소 고인이 애용하던 물건도 함께 태워라. 모욕이 아니라 고인을 추모하는 것이라 하면 거부감도 덜할 거야.”
그 이어진 지시에 길버트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그렇게 막사의 임시 회의가 파하고, 구호단의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때.
길버트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로건에게 물었다.
“혹시 전에 비슷한 말을 들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음? 무슨 뜻이지?”
“그게, 고인의 소지품도 같이 태워야 한다는 말씀도 드리려 했는데 먼저 이야기를 꺼내셔서요.”
“……그것도 그 균이라는 것 때문인가?”
“예. 그 균이라는 것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아아, 설명은 됐고. 내가 한 지시가 역병 진압에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예.”
“그럼 그걸로 충분하네. 아, 그리고…… 혹시 시체를 태우는 것 말고 다른 대책은 없는가? 이대로 사제들이 한계에 달하게 되면 결국 사망자가 나올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최대한 빠르게 치료제를 만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약. 약이라…….”
사제들의 치료는 워낙 비싸기에, 일반 백성들은 약초와 민간요법에 주로 의존했다. 그리고 그런 방식을 집대성해서 실제로 효과가 있는 방법들을 추리고 연구하는 집단이 이 치료사들, 치료사 길드로 알려진 집단이었다.
그들의 이름이 민간에도 익숙해지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 십여 년이 채 되지 않았고, 20년 뒤에는 나름대로 신뢰받는 이름이 된다.
사제들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백성들의 바람이 그들의 뒤를 받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직은 사제들을 흉내 내는 사이비라 생각하는 이들도 많은 실정.
‘지금부터 내가 이들을 지원한다면?’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곧바로 회의적인 결론이 나왔다.
지금은 여력도 없고, 그 효과도 미지수인 일.
얼른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 버리는데, 그 반응을 어찌 해석했는지 길버트가 한층 굳어진 얼굴로 다시 말했다.
“반드시 효과가 있는 약을 개발하겠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아, 그래. 부디 힘내 주게. 그리고 지원이 필요한 것이 있다면 뭐든 다 말하게. 지원해 줄 테니.”
“아…… 가, 감사합니다.”
형식상 한 말인데 인사 전 길버트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혹시 당장이라도 필요한 게 있나? 있다면 말하게. 난 역병을 조기에 진압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생각이니. 도움이 된다면 크게 치하할 것이야.”
“……그렇다면, 혹시 신전의 기록을 볼 수 있을까요?”
“뭐?”
“70년 전 레스타붐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고 싶습니다. 당시의 상황과 지금 저희 길드의 자료를 비교하다 보면 치료약 개발이 훨씬 빨라질 것 같습니다.”
길버트 역시 사제들을 대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지, 청을 하는 목소리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로건은 잠깐의 미묘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일리아 주교와 얘기해 보도록 하지.”
“가, 감사합니다!”
‘사제들과 분란이 있었던 참인데.’
아무리 얼굴 가죽이 두꺼워도 조금은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로건은 아쉬운 소리를 하기 위해 다시금 주교를 찾았다.
그런데.
“역병에 관한 자료라면 얼마든지요. 기록이 상세하게 남겨져 있을 겁니다.”
일리아 주교의 반응은 생각보다 훨씬 적극적이었다.
“……고맙군. 혹시 다른 지원이 필요한가?”
“어차피 신전에 지원을 더 요청하려 했습니다. 그런 김에 자료도 함께 요청하는 것뿐입니다.”
“지원을 요청한다 한들 들어주겠나? 신전의 입장에서는 이미 과하게 투자한 것 같은데.”
투자.
그 불신 가득한 단어 선택에 일리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상황이 급하니 어쩔 수 없지요. 신전의 여력을 쥐어짜서라도 역병을 조기 종결하는 것이 신민들을 위하는 길이니까요.”
새삼 신기한 주교인지라, 로건은 이 고맙고도 열성적인 주교를 조금 더 믿어 보고 싶어졌다.
‘더 지원이 올 리는 없겠지.’
물론 로건은 그 생각에 부정적이었다.
역병으로 죽은 이들은, 이미 매장된 시체까지 다시 꺼내서 태우겠다는 구호단의 명령에 대한 반발은 예상보다 거세지 않았다.
사제와 국왕이 명령한 일에 대해 반발하기에는 영지민들의 기력이 너무 없었다. 연이은 재난에 시달린 탓이었다.
거기에.
“……저이는 그럼 신이 버린 건가요?”
“절대 아니에요. 남겨진 가족들을 수호하는 영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을 구하기 위해서요.”
구호단에서 가장 존귀한 신분이라 할 수 있는 주교가 죽은 남편의 시체를 태우며 울먹이는 아낙네, 그것도 역병의 증상까지 있는 이를 끌어안았을 때는 미약한 반발마저도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저리 귀한 분이…… 천한 우리를…….”
“……다들 힘내자고.”
자의 반, 타의 반이기는 해도 열성적으로 치료를 하는 다른 사제들까지도 영지민들의 신뢰를 얻게 되는 계기였다.
거기에 다른 희소식도 들려왔다.
“라테의 풀이 효과가 있습니다, 길버트 님!”
“다행이군, 다행이야!”
밤낮없이 환자를 조사하고 약초를 캐고 다니던 치료사들 역시 소정의 성과를 낸 것이다.
“해열제?”
“예. 아직은 역병의 증상을 조금 가라앉히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분명 효과가 있습니다.”
“좋아. 계속 수고해 줘.”
“예, 폐하!”
역병으로 발생한 시체를 불태우고 그 소지품도 같이 태움으로써 치료사 길드에서 말한 ‘균’의 번식을 막았고, 효과가 있는 해열제를 찾아내면서 증세가 다소 심각하던 환자들도 조금씩 차도를 보였다 구호단의 활동이 분명한 효과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사망자는 줄어들고, 완치자는 슬슬 늘어나는 양상을 띠게 되면서 로건도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였다.
일리아가 심각한 목소리로 보고를 해 왔다.
“생각보다 훨씬 독한 역병이에요.”
“무슨 뜻인가?”
“신전에 기록된 어떤 역병보다도 신성력에 의한 치료가 더뎌요. 거기다 어제 제가 완전히 치료했다고 생각했던 환자가 다시 증세를 보였습니다.”
어두운 안색의 일리아의 말에 로건의 얼굴도 한층 어두워졌다.
“신전의 지원을 다시 재촉하겠습니다. 이대로는 어려워요.”
일리아 주교는 입술을 깨물며 그리 말했지만, 로건의 예상대로 3일 뒤 신전에서 보내온 것은 과거 레스타붐의 자료뿐이었다.
“지금 맡고 있는 지역의 구제 활동을 하기에도 바빠서 여력이 없습니다.”
자료를 가지고 온 사제는 그리 변명했지만, 그 말을 믿는 이는 사제 중에서도 아무도 없었다.
“아! 여기가 가장 심각한데 무슨 구제 활동이야!”
파비안이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계속되는 치료와 금식 기도, 일주일째 반복된 그 고행은 허리가 투실투실하던 비만 사제를 거의 정상인의 체형으로 되돌려 주었지만.
“당장 지원 보내!”
정신도 그만큼 더 망가진 듯, 그는 괜한 사제를 붙잡고 성질을 부렸다.
“역병이 점점 퍼지고 있는데 대체 상부에서는 뭘 하고 있는 거야!”
지금의 언행만 두고 보면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이 가득한 진짜 사제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그런다 한들 그가 원하는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 사망자가 더 나오지 않고 있으니, 진압되고 있는 게 아니냐며…….”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러다가는 환자가 아니라 내가 죽겠어! 당장 지원 더 보내라고 해!”
그렇게 전령으로 온 애꿎은 하급사제만 파비안에게 시달리는 사이.
길버트는 신전의 자료들을 빠르게 집어 들고 자신의 동료들에게 향했고, 창백한 얼굴의 일리아 주교는 입술을 깨물며 사제들의 추태를 외면했다.
사망자가 나오지 않고 있는 만큼, 사제들이 점점 힘겨워지는 날들.
그 아슬아슬한 균형은 그 3일 뒤, 구호단이 라프탄에 도착하면서 10일 만에 깨어졌다.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로.
“폐, 폐하. 라프탄의 다른 마을에서도 역병 환자가 발생되었습니다. 봉쇄된 마을 근처 6개 마을입니다!”
“뭐?! 제대로 봉쇄 안 한 거야?!”
“그, 그게. 저희가 도착하기 전에 발병한 마을에 들렀던 이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다수가 증상이 발현된 이후에도 신고하지 않아서…….”
“이런 빌어먹을!”
구호단이 도착한 지 10일째.
다시금 역병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했고, 한군데 모인 환자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라프탄 영지에서 도착했을 때 로건이 근처 귀족들에게 한 협박이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것이었다.
그그그그.
히이이잉.
수십 대의 수레에 쌓인 곡물들과 그를 따라온 십수 명의 기사와 수백의 병사들. 그리고 생소한 꽃문양의 깃발.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을 느끼며 한 중년의 기사가 한 발 앞으로 나서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켈로만 자작령에서 왔습니다, 폐하. 명에 따라 식량과 병사를 지원하겠습니다.”
“……잘 왔다.”
가장 먼저 로건과 갈등을 일으켰던 켈로만 자작령에서 막대한 지원을 해 왔고.
“겐치스 남작령에서도…….”
“페로나 남작령에서도 곧 도착한답니다!”
곧 다른 두 군데서도 켈로만보다는 부족하지만 무시할 수 없을 만한 물량의 지원이 보내 왔다.
세 가문의 지원만으로도 18개 마을의 백성과 구호단이 족히 석 달은 식량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막대한 물량이었다.
‘이렇게나 여력이 남으면서 그냥 학살하려 했단 말이지.’
로건으로서는 그만큼 불쾌한 감정도 들며 귀족에 대한 불신감이 커졌지만, 그는 그것을 티 내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증상자가 발생한 지역이 12개의 마을에서 18개의 마을로 늘어나며 라프탄 영지와 구호단의 여력만으로는 봉쇄마저 힘겨워지던 찰나에 세 귀족가의 지원은 구호단의 숨통을 그나마 트여 주는 가뭄의 단비 같은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구호단에 그나마 활기를 불어넣는 일들이 생긴 3일 뒤, 모두의 얼굴에 절망감을 번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치, 치료사분들 중에서 역병의 증상을 보이는 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역병을 막기 위해 노력하던 구호단에서 오히려 발병자가 나오고.
“봉쇄를 위해 경계를 서던 병사 중 몇몇이 쓰러졌습니다. 증상은 환자들과 동일합니다.”
마을의 출입을 통제하던 병사 중에서도 발병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젠 끝장이야.”
“어찌 이런 일이…….”
“신전에서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구호단의 신전 기사와 사제들의 입에서마저 한탄이 흘러나올 무렵.
로건은 굳은 얼굴로 상황을 보고 받고 있었다.
“완치자는?”
“재발한 사람을 제외하면 이제 120명 정도입니다.”
“발병자는?”
“……처음 보고된 321명에서 점차 늘어나 현재 600명이 넘어갑니다.”
암담한 보고에 로건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쩔 수 없군.’
없는 살림을 더 쥐어짜서라도 신전에 지원을 요청해야 할 듯싶었다. 적어도 지금의 두 배 정도는…….
‘……버틸 수 있을까?’
왕실의 재정이, 군대가.
무거운 마음에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역병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는 제국 전쟁 전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다.
어찌 일이 이렇게 꼬이는지.
로건은 한숨을 쉬며 통신구 쪽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그때.
“폐, 폐하! 획기적인 자료를 찾았습니다!”
길버트가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그를 향해 뛰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