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49)
249화
“진정하고 천천히 다시 말해 보게. 뭐라고? 무슨 자료?”
하악. 하악.
어찌나 다급하게 뛰어왔는지 벌게진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던 길버트는 이내 들고 온 자료를 보여 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게, 70년 전 이 역병과 비슷하다는 레스타붐이 터졌을 때 말입니다. 동부에서 유일하게 아무런 피해도 없던 영지가 있었습니다!”
“뭐?”
“동부의 영지 15곳이 초토화되었는데, 동부 끝에 있는 그란트 남작령에선 사망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길버트가 눈을 빛내며 자료를 들이밀었지만, 그 내용을 읽은 로건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거야 거기까지 번지기 전에 역병이 끝난 것이 아닌가?”
역병 진원지의 중심에 있다면 모를까.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영지에서 피해를 보지 않았다고 해서 역병을 이겨 낸 영지라고 하기엔 근거가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이 자료엔 그란디아…… 아, 죄송합니다. 맥라인 왕국의 상황만 기록되어 있지만, 저희 길드에서 수집한 옛 자료와 합쳐 보면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의미가 있다?”
“당시 그란트 영지 너머 소왕국 연합의 서부 영지 다섯 곳도 레스타붐에 박살이 났습니다. 여기, 여기 쪽이죠. 그럼 이렇게 보시면…….”
길버트가 그리는 원. 그 원을 따라가 보니.
“허?!”
“역병이 퍼진 영역 전체에서, 딱 그란트 영지만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겁니다.”
충분히 의미 있는, 아니 획기적인 단서가 될 수 있는 자료였다.
“그 영지의 무엇이 역병을 막았는지 조사해서 알아낸다면, 어쩌면 이 역병도 확실히 막아 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당장 그란트 영지를 조사하라 명하겠다.”
“제가,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자네가 직접?”
“그란트 영지면 이곳에서 북으로 이틀 정도 거리입니다. 충분히 다녀올 수 있습니다.”
그 자신감 어린 표정을 보며 로건은 속으로 갈등했다.
솔직히 지금 라프탄 영지에서 역병을 극복하는데 가장 불필요한 인력은 자신과 기사들.
치료사인 길버트보다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조사하는 게 나을 것 같았지만, 어제 일리아 주교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자 그리 좋지 않은 생각인 듯했다.
– 내가 직접 할 일이 없을까? 이래 봬도 초인인데.
– ……폐하께서는 그냥 이곳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됩니다.
– 그게 무슨 말인가? 쓸데없는 아부는…….
– 아부가 아닙니다. 폐하께서 이곳에 머무신다는 것만으로도 백성들에겐 힘이 됩니다. 왕국이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는 반대로 말하면 만약 역병이 진압되기 전에 떠나신다면…….
‘내가 역병을 포기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일리 있는 말이야.’
왕이라는 자리는 이럴 땐 불편하기만 했다.
“……좋다. 그리하라. 다만 다른 치료사들은 여기에 두고 가도록. 이미 증상을 보이는 이들도 있으니.”
“아…… 그, 그렇죠. 이런…….”
길버트는 그리 대답을 하면서도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대신 기사들을 데려가라, 중급 이상의 포스유저들은 역병에 걸린 적이 없으니…….”
“폐하. 기사들도 도움이 되겠지만 의학이나 약초에 관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낫습니다. 아니면 조사에 특화된 인력이라도……. 제가 수도에 있는 길드에 요청을…….”
“아, 그런 쪽이라면 적합한 인력이 있다. 걱정하지 말고 바로 그란트로 향하도록.”
로건은 길버트의 근심을 일축하며 말을 이었다.
“기사들 말고 전문 인력도 함께 붙여 주겠다. 이쪽이 아닌 그란트에서, 그들이 알아서 찾아갈 테니 최대한 빨리 그란트 영지가 무사했던 이유를 알아 와라.”
조금 미심쩍기는 했지만, 왕의 명령을 어찌 거부할 수 있을까.
“……예. 폐하!”
4서클의 마법사이자 의사, 길버트는 중급기사 다섯 명과 함께 곧바로 라프탄 영지를 벗어나 북상하기 시작했다.
* * *
“정지!”
“워, 워!”
히이이잉!
“누구냐?”
그란트 영지, 그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질주해 오는 한 기의 기마들을 막았다.
시골 영지의 병사들답지 않은 침착한 태도가 돋보였지만.
“국왕 폐하의 명령이다! 래리 그란트 남작은 폐하의 명을 받들라!”
그런 그들도 앞으로 나온 기사가 일갈하는 순간에는 확 바뀐 낯빛으로 성안에 뛰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길버트와 기사들은 이 영지의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하하, 이거 고생이 많으셨군요. 라프탄에서 오신 분들이라…….”
각진 얼굴, 단단한 체구의 중년인이 길버트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역병이 퍼진 영지에서 온 국왕의 사자.
어떻게 봐도 좋게 받아들이기는 힘든 것이리라.
‘설마 우리에게 지원을 요구한다거나…….’
하지만 심적인 여유가 없는 길버트는 그런 남작의 마음을 다독여 줄 겨를이 없었다.
“남작님.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70년 전, 이 근방에서 역병이 창궐했음에도 이 영지에서만 피해가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는 그 이유를 찾고자 이곳에 온 것입니다.”
“음?”
그 말에 래리 그란트의 표정이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한숨이 나오는 상황.
딱딱하게 굳은 길버트의 눈썹에 경련이 일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로 조력자가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데미안이라고 합니다. 왕실 조사단에서 나왔습니다. 저와 제 부하들이 길버트 공의 임무를 도울 것입니다.”
“……반갑습니다.”
길버트는 처음에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갈색 머리 푸른 눈의 사내는 적어도 정보 조사에 있어서는 달인임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영지의 주인이라는 래리 그란트 남작도 모르는 영지에 관한 정보들을 불과 반나절 사이에 취합하여 가지고 왔으니까.
문제라면 그것들에서도 별다른 특이점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역 특산물……이라고 해 봤자 사과군요. 이건 라프탄에도 있어요.”
길버트가 데미안이 조사해 온 자료를 뒤적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다른 것은요?”
“조사하라고 말씀하신 주민들의 주 식생활과 사는 집, 의복 재질 같은 것에도 특별한 점은 없었습니다. 거의 왕국 평균이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입니다.”
데미안의 말에 길버트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분명 특별한 게 있을 텐데? 있어야만 하는데?’
그가, 아니 길드가 연구해 온 지식에 따르면 특별한 병에 대한 저항력이 강한 지역은 그 식생이나 의식주 등에서 무언가 다른 곳과 구별되는 특성이 있어야 한다.
‘길드의 자료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없어야 해.’
질끈 깨문 입술은 초조한 마음을 달래지 못했다.
단순히 임무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평생을 바쳐 온 이 치료사라는 직업에 대한 운명의 갈림길이 바로 이 기회에 달려 있었다.
그래. 기회.
‘이번 역병 치료에서 성과를 거둬야 그놈의 사이비 사제 소리가 확 들어간다. 치료사 길드가 민중의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해.’
그리고 그 힘은 축적된 자료에서 나온다.
그러니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기보다는.
‘지금의 영지에 특별한 게 없다면, 7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사라진 것으로 볼 수밖에.’
그것이 담지 못한 방향을 찾는 것이 옳았다.
그러니.
“데미안 님. 이 영지의 노인들과 대화를 해 보고 싶습니다.”
“노인이요?”
“이 영지에 70년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것들. 그런 것들을 찾아내야겠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남작에게 협조를 구하겠습니다.”
그란트 영지에 도착한 다음 날, 그들은 래리 그란트 남작의 협조하에 영지의 최연장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만 그 과정도 그리 쉽지는 않았다.
일단 70년 전에도 살아 있었던 사람들이 영지를 통틀어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고, 그들이 성을 기준으로 여러 마을에 각기 흩어져 있다는 것도 문제였다.
더구나.
“70년 전? 에이, 그때 일을 어떻게 다 기억하나.”
다짜고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노인부터.
“똑같아. 여기에 뭐 변할 게 있으려고. 이런 시골이.”
질문의 뜻을 이해하면서도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는 노인이 다수였다.
그리고 가끔은.
“늙어서 기억이 가물가물 혀. 그런데 뉘슈? 아, 70년 전? 늙어서 기억이 가물가물 혀. 그런데 뉘슈?”
“…….”
안타깝지만 속 터지는 대답들까지.
하지만 거듭된 조사 끝에, 몇몇 긍정적인 대답도 찾아낼 수 있었다.
다만.
“그, 그 나 어릴 적에는 사냥이 유행이었어.”
“사냥이요?”
“어어. 그래. 특히나 이 지역에 사슴들이 많아서 그놈들이 밭을 갈아엎고 농작물을 죄 씹어 먹기도 했거든. 그래서 철만 되면 사람들이 모여서 사슴 사냥을 했더랬지.”
“사슴?”
“그럼 지금은……?”
“수십 년을 그러다 보니 놈들이 씨가 말랐는지 잘 안 보여. 그래서 안 하지.”
올해 90이라는 왜소한 노인의 대답이 거의 유일하다 싶은 정상적인 대답이었다.
물론 그것도 큰 의미는 없어 보였다.
“……사슴 사냥이 역병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데미안의 말이 옳았다.
사슴을 죽이면 역병이 낫는다?
아니면 사슴이 많으면 역병이 퍼지지 않는다?
깊게 이론을 파 보거나 자료를 따지고 들지 않아도 그냥 헛소리로 들리는 말들.
그렇게 길버트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는데, 마지막으로 찾은 노인이 귀가 솔깃해지는 말을 꺼내 들었다.
“사슴이 줄어서 사슴 사냥이 사라진 게 아닙니다.”
“예?”
“그때 이곳의 풍습이 좀…… 괴악해서 신전에서 경고를 받았었거든요. 그래서 사라진 겁니다. 사슴 아직도 많아요.”
나이가 팔순이 넘었는데도 정정한 체격의 노인이 또렷한 눈빛으로 길버트의 물음에 응대했다.
“괴악한 풍습이라니요?”
“……그, 그게. 말씀드리기가 좀 어렵습니다. 신전에서 신성 모독이니 뭐니, 아주 살벌하게 경고를 해 대서…….”
무언가 눈치를 보는 모습.
‘이거다!’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는지, 지쳐 가던 데미안과 길버트의 표정에 한 줄기 빛이 드리워졌다.
“말씀해 주십시오, 어르신. 저희는 신전과 관련이 없습니다. 탓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해도 상관없소이다. 나야 어릴 때라 딱 한 번 그랬던 건데, 뭐. 근데 사제들이 부정 탄다고 언급도 하지 말라고 해서…….”
“부정한 것은 역시 빛나는 것으로 쫓아야죠. 여기 부적을 드리겠습니다. 어르신, 말씀 좀 해 주십시오.”
길버트가 다급한 안색으로 내민 손에 쥐어져 있는 빛나는 부적.
5골드짜리 금화가 노인의 부정한 기운을 싹 날려 버렸다.
“흠흠. 그게…… 당시에 이곳에서는 사슴 사냥을 하면 걔들 피를 받아 마시는 관습이 있었다오. 우리 영지민이라면 다 한 번씩은 마셔 봤을걸? 부정한 것을 쫓고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했던 건데 사제들이 오히려 그게 더 부정하다고 말한 뒤로 사라졌지만…….”
사슴의 피.
그 말이 나오는 순간, 길버트와 데미안의 눈이 동시에 번뜩였다.
* * *
“사슴의 피?”
[예. 시험해 볼 가치는 충분합니다.]“흐음……. 그럴듯한 소리기는 한데. 이곳에는 사슴이 그리 많지 않을 텐데?”
[여기 그란트 영지에는 사슴이 넘친답니다. 효과가 있다는 것만 입증되면 여기서 사슴을 대량으로 잡아서 끌고 가겠습니다.]“……그래.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지.”
길버트의 보고에 로건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 직후부터 라프탄 영지의 기사들은 영지의 산속을 뒤지며 사슴을 찾기 시작했다.
“갑자기 웬 사슴?”
“몰라. 귀족들이 심심했나 보지.”
“역시 왕이…….”
역병이 돌며 흉흉해진 민심은 그조차 굉장히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3일 뒤.
스각.
쓰러지는 사슴의 목을 가르고 떨어지는 피를 받아 낸 로건의 손길은 아주 신중하기만 했다.
“자. 마셔 보거라.”
“……예. 폐하.”
울상이 된 눈으로 무릎을 꿇은 채 로건을 올려다보는 사내.
그 사내는 얼굴이 온통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도 모자라 진물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심각한 상태의 중환자.
이미 라프탄 영지에서는 사제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에서 이런 중환자들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었다.
만약 사슴 피조차 효과가 없다면 이제 며칠 후부터는 대량의 사상자가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까지 맞이하게 된 것이다.
‘절대 그래선 안 돼.’
로건의 강렬한 바람은 무거운 기세가 되어 사내를 압박했고.
사내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사슴의 피가 가득 담긴 대접을 들고는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