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50)
250화간절한 바람이 통했는지, 사슴 피를 마신 사내는 바로 다음 날부터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진물이 사라지고, 피부의 붉은 기도 확연하게 줄어든 것이다. 무엇보다 당사자가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끼고 오히려 먼저 기사들을 찾았다.
그것도 혼자만 온 게 아니었다.
“여, 여기 제 처자식도 데려왔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기사님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뚜렷한 사내의 가족들.
이제는 오히려 어제까지만 해도 진물이 흐르던 사내의 얼굴이 더 정상처럼 보였다.
“모두 데려와라.”
“예, 폐하.”
“감, 감사합니다! 폐하!”
로건이 사내의 가족들에게만 사슴 피를 먹인 것은 아니었다.
고작 한 사람의 실험 결과만을 가지고 대대적으로 일을 벌이는 것은 그에게도 부담이 되는 일이었으니까.
다행히 어제 사슴 피를 먹인 다섯 모두 획기적인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고, 다음 치료 대상을 찾던 차.
자청하는 이들을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되었다. 이게 다 모두를 위한 일이니까.”
사내가 데려온 그의 아내와 딸은 처음에는 사슴 피에 심각한 거부감을 보였다.
[예, 옛?! 정말, 정말 그렇게 효과가 빠릅니까?!]“그래. 그대가 해냈다.”
[감, 감사합니다, 폐하!]“수고 많았다. 이대로 역병을 진압하게 되면 그대가 최고의 공훈자다. 포상을 기대해도 좋아.”
[은혜에 감사드립…….]“쓸데없는 말은 됐다. 전국의 사슴을 생포하여 라프탄으로 보내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대는 이제 하루빨리 돌아와서 사슴 피가 병을 고치는 과정을 분석하라. 그리고 확실한 치료제를 만들어!”
[예. 알겠습니다, 폐하!]힘차게 대답하는 길버트의 얼굴은 더할 수 없이 환했다.
사슴의 피를 마시면 역병이 낫는다.
이 믿기지 않는 소문은 구호단이 머무는 마을 안에서 그야말로 번개처럼 퍼져 나갔다.
그것을 마시고 병이 나은 자들이 앞장서서 그 사실을 퍼트리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국왕이 보증하기까지 하니, 차례를 기다리느라 사제들의 치료를 받지 못하고 끙끙 앓고만 있던 이들 모두가 환호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폐하!”
국왕의 막사에 예고도 없이 쳐들어온 일리아는 막사 안의 광경을 마주한 순간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오, 왔나. 일리아 주교.”
가뜩이나 붉은 눈, 붉은 머리라는 이색적인 외모를 가진 왕이 아예 전신에 피 칠갑을 하고 사슴의 머리를 붙들고 있는 상황.
그리고 그 앞에는.
꿀꺽꿀꺽.
“역해도 끝까지 마셔야 해! 얼른!”
아비로 보이는 사내 옆에서 한 사발의 사슴 피를 들이마시는 소녀가 있었다.
피 칠갑을 한 왕과 그 앞에서 짐승의 피를 마시는 소녀.
그야말로 지옥을 담아낸 그림에서나 볼 법한, 끔찍하고 기괴한 광경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막사 한옆에선 열 명에 가까운 기사가 사슴의 목을 틀어잡고 피를 뽑아내고 있었고, 그 앞에는 그 피를 성배처럼 받아들고 마시는 백성들이 줄지어 있었다.
신실한 사제인 일리아의 눈엔 그야말로 지옥의 단면이 현실로 펼쳐진 듯한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폐, 폐하. 대, 대체 이게 어찌 된……?”
덜덜 떨리는 손.
그보다 더 떨리는 음성.
하지만 그 물음에 먼저 답한 것은 로건이 아니라 피 칠갑을 한 소녀였다.
“여, 열이 내리는 것 같아요. 사제님.”
어색하게 웃는 소녀의 입가에선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고, 그 모습을 본 일리아는 결국 인내심의 한계를 맞이하고 말았다.
“꺄아악!”
새된 비명과 함께 막사를 뛰쳐나가 버린 것이다.
– 우웨엑!
로건이 그녀의 체면을 생각해 막사 밖에서 벌어지고 있을 광경을 상상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을 때.
입을 틀어막은 채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돌아온 일리아가 따지듯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폐, 폐하. 대체 이 광경은 뭡니까? 설마 정말로 사슴의 피를 마시고 있는 겁니까?”
그 물음에 로건은 태연하게 답했다.
“아아. 아직은 이 근방에 사슴이 몇 없어서 이 정도가 전부네. 하지만 곧 전국에서 사슴을 보내올 테니,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본격적으로 지옥을 만들겠다.
일리아의 귀에는 로건의 말이 그렇게 들렸다.
“절대! 절대 안 됩니다! 살아 있는 짐승의 피를 마시다니요! 그건 신성 모독입니다!!”
일리아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목격한 극도로 분노한 모습.
하지만 그에 대한 로건의 답은 간결하기만 했다.
“사슴의 피가 역병의 치료제라는 것을 알았는데 하지 말라? 그럴 수는 없네. 나는 내 백성을 살려야겠어.”
“폐하! 이건 신전의 금기입니다! 절대로 용납할 수도 없고, 결코 해서는 안 될! 다른,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파리한 안색, 덜덜 떨리는 손.
코를 막아 피비린내를 차단한 일리아가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말이 통할 리는 없었다.
“무슨 다른 방법? 자네도 지금 쓰러지기 직전이지 않나.”
그 말에 일리아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사실 그녀의 창백한 낯빛과 떨리는 손은 단순히 눈앞의 광경에 충격을 받아서만은 아니었다. 아니, 굳이 비중을 따져 보자면 3일째 계속된 금식 기도의 여파가 더 클 것이다.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환자를 치료한 대가였지만, 지금 이 상황만큼은 주교로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 이건 절대로 안 돼요! 그건…….”
열변을 토하는 일리아의 설명이 길게 이어졌다.
살아 있는 동물의 피를 마시는 행위. 그것은 고대에 신전의 주적이었던 악마를 숭배하는 종족이 가졌던 특징이며, 그들이 숭배하는 악마를 다시 세상에 불러들이는 죄악이라는 게 주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열성적인 주장에 돌아오는 것은 냉소였다.
“뱀파이어. 그에 대한 전설은 대륙인 모두가 알고 있지. 그들이 사람의 피를 빨았다는 것 또한. 하지만 동물과는 상관없지 않나?”
“하지만 폐하! 신전에서는 살아 있는 생물의 피를 마시는 행위 자체를 금기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9대신께 적대하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슴의 고기를 먹는 것과 피를 마시는 것이 뭐가 다르지? 근본적으로는 같은 거야. 융통성 있게 생각하라, 주교. 이것은 사람의 피가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내 백성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치료 수단을 시행한 것뿐이다!”
“……정말로 죄송합니다만 폐하. 이, 이 지옥 같은 광경을 좀 보십시오! 이게 정상적인 치료 과정으로 보이십니까?! 어떤 사제도 이 꼴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일리아가 온통 피투성이인 막사 구석구석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지만 로건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난 필요하다면 뭐든지 할 거다, 주교. 하지만 그대에게도 이 일을 시킬 생각은 없으니 그대는 밖에서 그대의 의무를 이행하라.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테니.”
일리아는 몇 번이고 무언가 다시 말을 꺼낼 듯하다 말더니, 이내 입술을 꽉 깨물고는 막사를 나섰다.
‘그래. 당장은 이 정도면 됐어.’
로건은 그것을 어쩔 수 없는 타협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당장 다음 날, 그 생각이 너무 낙관적인 기대였음을 깨달았다.
“파업?”
믿기지 않는 황당한 말에 무의식적으로 되물었지만, 당장 눈앞에 120명의 사제가 모여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백성들을 치료하기 시작해야 할 아침 시간에 말이다.
“그렇습니다, 폐하. 당장 그 악마적인 행위를 중단하지 않으시면 저희 사제들은 더 이상 백성들을 치료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작 잊혀 가는 오래된 교리 하나 때문에 눈앞에서 쓰러져 가는 백성들을 버리겠다는 건가?”
그 말에 일리아 주교의 얼굴에 잠시 갈등하는 기색이 어렸다.
하지만 그녀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 뒤에 있던 상급사제 파비안이 굳은 표정으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악마를 숭배하는 행위를 하는 백성은 신민이 아닙니다, 폐하. 모든 사제가 그 사실에 동의하였습니다.”
그 말에 로건의 붉은 눈동자가 사제들을 훑어보자, 그 눈을 슬쩍 피하는 자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저들 중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대세를 따를 수밖에 없던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한결같이 피로에 찌든 얼굴들.
사제들이 자의든 타의든 여태 애써 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깟 교리 하나 때문에 파업이라니.’
간신히 해결책을 찾은 듯했더니, 다른 문제가 생긴 것이다.
로건은 다시금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하아.
“……그대들의 뜻은 알겠다. 상의해 볼 테니, 그대들은 백성들을 돌보고 있으라!”
“그 참담한 행위를 더 이상 이어 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하시기 전까지 저희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
그야말로 한숨만 나오는 일.
로건은 빠르게 치료사들과 기사들을 소집했다.
“그런…….”
“눈앞에서 차도가 보이는 치료 방법인데 대체 왜…….”
“에이, 저런 꽉 막힌 종자들을 봤나!”
“하여간 사제들이란…….”
다른 이들, 특히 치료사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그중 밤새 말을 달려 라프탄으로 돌아온,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길버트가 먼저 로건 앞에 나섰다.
“폐하. 사슴 피의 치료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시작하기 전, 사제들이 이미 쓰러지기 직전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 알고 있다. 사슴 피로 환자들이 차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이 치료법이 과연 120명의 사제를 대신할 수 있겠느냐?”
“전국에서 사슴을 보내고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 계산으로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겠나?”
“예! 제 목숨을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길버트와 치료사들은 자신감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들은 이 상황 또한 그들이 인정받을 기회라고 여길 수도 있다. 로건이라고 그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사제들의 치료가 이미 한계에 봉착했던 것 또한 사실.
목숨을 걸겠다는 길버트와 치료사들의 각오를 로건은 한 번 더 믿어 보기로 했다.
“좋다. 사제들은 내가 설득해 보겠다. 그대들은 치료를 계속하라!”
그리고 길버트를 따로 불러 조건을 달았다.
“피를 그대로 마시는 행위가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하루라도 빨리 사슴피를 재료로 한 약을 완성하라. 그것이면 사제들도 뭐라 하지 못할 테니.”
“그래 봤자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 아닙니까.”
“원래 신전의 교리라는 것이 그러하다. 그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할 수 있는 명분을 주는 것, 그게 약을 개발해야 하는 이유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길버트는 그렇게 납득했지만, 정작 사제들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았다.
오히려.
“악마 숭배 행위를 당장 멈추십시오, 폐하!”
“신성모독을 멈춰 주십시오, 폐하!”
사제들은 아예 왕의 막사 앞에 모여 그리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런 사제들의 행위에 더불어, 사제들의 치료 중단에 불안감을 느낀 일부 환자들 역시 치료를 거부하며 로건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시, 싫습니다. 사제님들이 피를 마시면 지옥에 간다고 했습니다.”
“어, 어차피 죽을 거라면 죽어서 천국에 가고 싶습니다.”
벌게진 피부 위로 진물까지 흐르는 환자들이 사슴 피 복용을 거부한 것이다.
그렇게 치료를 거부하는 환자들의 수는 점점 커져만 가는 사제들의 목소리를 따라 계속 증가했다.
“길버트. 아직 멀었나?”
“죄송합니다, 폐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그게 그리 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대답에 눈을 질끈 감은 로건은 이내 모종의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살아 있는 생물의 피를 마시는 행위.
보통은 꺼리는 것이 당연했다.
“빠, 빨리 먹으라고! 내 얼굴 안 보여?! 나았잖아!”
그러나 이어지는 사내의 재촉에 모녀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사슴피를 마셨다.
“욱!”
도중에 구역감을 참지 못한 어린 딸이 한 번 게워내기는 했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 사슴피 한 사발씩을 전부 들이켰다.
“잠시 여기 머물러라. 반나절은 지켜보아야겠다. 편히 있도록.”
왕이 편히 있으란다고 어찌 그 앞에서 편히 있을 수 있을까.
사내와 가족들은 안절부절못한 채로 막사에 잡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불과 반나절 뒤.
가족들의 얼굴에서 홍조가 눈에 띄게 사라져 갔다.
그리고 로건은 그제야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좋아! 왕국 전체에 공고를 걸어라! 전국의 사슴을 모두 사로잡아 라프탄 영지로 보내라고!”
“예! 폐하!”
그들 눈으로 직접 성과를 확인한 기사들이 힘차게 복창하는 순간.
가장 기뻐하는 이들은 한껏 긴장한 표정으로 그 과정을 함께 지켜본 치료사들이었다.
“와하하하!”
“해냈다! 길버트 님이 해냈어!”
환호하는 치료사들을 보며 로건 역시 오랜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