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52)
252화사제단이 사슴 피에 대한 효과를 인정하고 두 치료가 병행되니, 역병의 기세가 확연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슴 피와 레테의 풀을 주재료로 한 약입니다. 그냥 피를 마시는 것보다 확실히 나은 효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좋아! 아주 잘했어! 아주!”
길버트가 치료제 개발에 성공하면서 환자의 치료가 급속도로 빨라졌다. 나아가 사슴의 생피를 마시는 섬뜩한 광경이 사라지자 사제들 역시 마음의 부담을 덜고 치료에만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한겨울에 시작되었던 역병이 불과 3개월 만에, 농번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자취를 감추게 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수고 많았네, 일리아 주교.”
“아닙니다. 모두가 폐하의 영민한 조치 덕분입니다.”
“사제가 과한 아부도 할 줄 아는구만 그래.”
“과한 아부라니요. 주변을 보시지요, 폐하.”
일라이는 웃으며 뒤를 가리켰다.
그녀의 뒤로 보이는 너른 들판엔 역병이 끝났다는 확신과 함께 돌아가기로 한 로건 일행을 배웅하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역병에 시달린 라프탄 영지민들을 강제로 배웅에 동원할 정도로 로건이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즉, 이 광경은 오직 영지민들의 자의에 의한 것.
자연히 로건의 시선이 그들을 향하자마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여, 여기 보신다!”
“정말 감사합니다!!”
“국왕 폐하 만세!”
“맥라인 왕국 만세!”
일순간 천둥처럼 터져 나온 함성이 온 들판을 진동시키자 로건을 비롯한 일행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맺혔다.
얼추 봐도 만 명이 넘는 듯한 사람들의 진심 어린 감사는 파견된 기간 내내 투덜거리던 일부 사제들까지도 웃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다 주교와 사제들이 애써 준 덕분이지. 돌아가는 대로 아문다의 신전에 톡톡히 기부하겠네.”
병사 훈련 비용과 장비 매입, 그리고 마정수 농사와 댐 공사까지.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일들을 모두 끝낸 왕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그런데.
“신전에 기부하시기보다는 백성들에게 더 신경을 써 주셨으면 합니다, 폐하.”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그것 말고도…….”
“과중한 세금 때문에 백성들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폐하. 이제 곧 농번기인데 백성들이 가장 굶주리는 시기이기도 하죠. 이대로라면 어디에서 다시 역병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올 때와는 사람이 달라지기라도 한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뼈아픈 직언을 던지는 일리아의 모습에 로건이 헛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귀족들의 세금을 당겨써야만 했던 일은 거의 다 해치웠어.’
물론 그 돈은 사실상 이미 다 소모되었지만, 마정석 광산 덕분에 여력은 충분했다.
“……그래. 대책을 강구하겠네.”
“감사합니다, 폐하.”
“감사는. 당연히 왕이 해야 할 일인데.”
일리아는 대답 대신 그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로건은 자신도 모르게 불쑥 속마음을 뱉어 냈다.
“사실 나는 신전이나 사제들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네.”
“……예?”
그 뜬금없는 고백에 일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쯤 되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었고, 마냥 웃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일리아는 어색한 웃음으로 그 말에 답했다.
“아……. 과분한 말씀입니다, 폐하.”
“언젠가 왕실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부담 없이 말하게. 신전의 요청이면 몰라도 자네의 부탁이면 얼마든지 응할 테니.”
“사제가 세속의 지배자께 부탁드릴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저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폐하.”
마지막까지 마음에 쏙 드는 말만 하는 주교의 모습에 로건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일이야 모르는 거 아니겠나. 그저 좋은 인연이라 생각하고 염두에 뒀으면 좋겠네.”
“……알겠습니다, 폐하.”
모든 것이 좋게 마무리된 시기.
구호단의 분위기는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행은 백성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아쉬운 발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뒤로, 하염없이 환호성을 지르며 손을 흔드는 라프탄 영지민들이 있었다.
그 환호는 구호단의 모습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국왕 폐하 만세!”
* * * 쾅!
“개량한 역병이라는 게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나! 대체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신경질적으로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아래서 터져 나온 거친 고함이 화려한 방 안을 진동시켰다.
그 앞에 부복한 클레오는 덜덜 떨면서도 바닥에 머리를 찧을 수밖에 없었다.
쿵.
“죄, 죄송합니다, 전하. 그, 그런 약점이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쿵.
연신 머리를 찧어 대는 클레오를 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던 2황자 바로스 반 아레스는 이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로건 맥라인 그놈만 연관되면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어!”
쯧.
혀를 차며 작은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분노를 가라앉힌 2황자는 부복한 클레오를 무시한 채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레오스. 지금 점수 상황은?”
점수.
갑자기 튀어나온 그 이질적인 단어에 한옆에 서 있던 푸른 머리의 미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1황자 전하께서 서방에서 큰 건을 해냈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큰 건?”
“가이아 왕국 관련이라는 것밖에는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자세한 사실은 그쪽 ‘기록자’와 황제 폐하께서만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여전히 평점은 전하께서 우위에 있습니다.”
“그야 당연하지. 흐음…….”
그 보고가 마음에 들었는지 2황자의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떠올랐다.
“만약 이대로 맥라인에 다른 계책을 쓴다면 어떨까?”
“로건 국왕은 역병에 관한 건을 빼고는 실정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전략부 판단하에는 1년 안에 치명적인 후유증이 발생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더 건드리면…….”
“이미 무너질 것이 확실한 왕국에 균열을 더하는 것으로는 그리 큰 평점을 받지 못하실 겁니다. 전하의 기록관으로서, 맥라인 너머의 소왕국 연합을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으음…….”
2황자는 붉은 눈, 붉은 머리를 한 저 소국의 왕을 떠올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가슴에 찜찜함을 남긴 자.
그것이 단지 자신이 기획한 내전을 조기에 종결시켰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까닭 없이 마음에 걸리는 놈.
“마음에 안 들어…….”
“예?”
“……그놈이 계속 걸린단 말이지.”
“그러시면……?”
“우리가 통제 가능한 다른 역병은 없지?”
“전하. 역병은 위험합니다. 레스타붐도 황실 마탑이 아니었다면…….”
“그래. 그 사슴 피만도 못한 황실 마탑 말이지. 기대할 필요 없겠군.”
그 냉소 어린 대답에 레오스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전하……. 제가 말씀드린 대로 맥라인 왕국은 당분간…….”
“아아. 충분히 알아들었어. 그래도 딱 하나만 더 해 보자고.”
“예?”
“놈이 무리하게 군대를 양성하다가 자멸할 거라는 게 전략부의 예측이지?”
“……예.”
“나는 놈이 그렇게까지 멍청할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흐음.”
그렇게 잠시간 턱을 쓰다듬던 2황자가 무언가 불쑥 생각난 듯 말했다.
“만약 놈에게 다른 자금원이 있다면?”
“예? 그럴 리가요. 국가 재정을 아우르는 자금원이라는 게 그렇게 불쑥 튀어나올 수가…….”
“그러니까 가정을 하자고, 가정! 만약 있다면?”
“……군대를 유지할 자금이 있다고 가정하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렇다 해도 지난 실정의 여파는 클 겁니다. 나라의 근간인 백성들이 굶주리기 시작할 테고, 아사자도 대량으로 나올 것입니다. 어찌어찌 1년을 난다 해도, 악화된 여론은 백성이 국가에 부역하는 것을 거부하게 만들 테고요. 소국의 국왕이 보는 시야의 한계지요.”
“흐음. 한계라.”
“그 여파는 수십 년간 계속될 것입니다. 그자는 고작 군사 5만과 미래를 바꾸는 짓을 저지른 겁니다.”
“그럼 식량을 사려고 하겠네.”
“예?”
“놈이 전략부 생각처럼 바보가 아니면, 그리고 자금원이 있다면, 식량을 사들여서 최소한 백성들이 굶어 죽지 않게는 할 거 아닌가.”
그 말에 레오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애초에 세금을 그리 올리지 않았을 겁니다.”
“군대를 창설하는 일이야. 그것도 우리 제국군의 군단 평균의 1.5배에 달하는 병력을. 초기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겠지.”
“……아무래도 전하께서 로건 국왕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과대평가라?”
“예. 애초에 그만한 병력을 유지할만한 자금원이 있었다면 몇 년간 시간을 들여 창설했으면 되는 일입니다.”
피식.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놈이 우리 제국의 계획을 알고 있지 않은 이상에야 그리 서두를 이유가 없지. 하지만…….’
2황자는 이상하게 그 찜찜한 예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마음이 좀 찜찜하단 말이지.”
제국의 유력한 황위 계승자가 하고자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찜찜…….’ 따위라도 신하들은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없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해 보자고. 하나만.”
2황자의 미묘한 미소에 레오스도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 그들의 옆에서, 대화가 다시 시작되고 또 끝날 때까지 피가 나도록 이마를 찧고 있던 클레오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 * *
“길버트. 자네는 역병의 발생 원인을 뭐라고 생각하나?”
“폐하. 전에 말씀드렸듯이 저희 치유사 길드에서는 균이…….”
“그 균이라는 걸 제외하면 말이야.”
로건에게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고 싱글벙글하던 길버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저 그게……, 저…….”
그 망설이는 표정을 본 로건이 피식 웃으며 대신 말했다.
“역시 굶주림과 위생 불량이라는 뜻인가?”
헛하고 놀란 표정을 짓는 길버트를 보며 로건은 작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세금이 과중하다는 것. 내가 벌인 일인 만큼 나도 잘 알고 있다. 그것으로 그대를 탓할 생각은 없으니 할 말 있으면 하도록 해.”
“예. 사실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예전에 페스티안이라는 역병도…….”
“굶주림에 지친 백성이 쥐를 잡아먹다가 생겼다고?”
“……어찌 그리 잘 아시는지요?”
길버트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며 로건은 다시금 결심했다.
과한 세금으로 굶주림을 생겨나고, 그것이 역병으로 이어졌다는 논리적 구조가 점차 확신처럼 여겨졌다.
‘죄책감은 미뤄 두자. 지금은…….’
그 대책을 생각할 때였다.
그러니.
“적어도 농번기마다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오는 일은 없도록 만들 생각이야.”
“……예?”
“만약 그렇게 했음에도 또 이번 같은 사태가 일어난다면, 다시금 신세를 질지도 모르겠네.”
“폐하께서 부르신다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그래. 그래 주면 고맙겠어.”
로건이 그렇게 결심을 확고히 다졌지만, 왕궁으로 돌아간 뒤 연 측근들과의 회의에서 그 생각은 처음부터 가로막혔다.
“온 나라 백성들을 굶지 않게……. 하하…….”
드웨인의 표정이 멍해지고, 그 눈에 불꽃이 피어오르는 듯하자 로건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그런 왕을 노려보며 드웨인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을 뱉어 냈다.
“폐하.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해.”
그 살벌한 기세에 눌린 로건이 어색한 목소리로 답하는 순간.
“미치셨습니까!!?”
집무실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무리! 무리에요! 절대 불가능합니다!”
발작하듯 펄쩍펄쩍 뛰는 드웨인을 그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온 백성들이 굶지 않는 나라. 말은 좋죠! 하지만 그건 제국도 못 합니다! 왕의 권력이 무슨 신이라도 되는 줄 아시는 겁니까!? 왕의 권력은 예산에서 나오는 겁니다, 예산!! 그만한 돈은 먹고 죽으려도 없어요!”
시끄럽게 이어지는 고함은 이미 신하의 예의를 한참 벗어난 것이었지만, 그 엄정한 검공조차도 고개를 돌려 외면할 뿐 드웨인을 탓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무리한 말이었으니까.
다행히 이런 반발을 이미 예상하고 있던 로건이 드웨인의 말을 살짝 고쳤다.
이 충직한 가신이 자신의 말을 너무 과장해서 받아들인 것이다.
“온 백성이 굶지 않게, 가 아니라, 굶어 죽는 사람만 나오지 않게 만들자는 말이야. 그 정도면 예산을 어찌어찌 쥐어짜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 말에 그때까지도 성을 내고 있던 드웨인의 움직임이 멎었다.
절대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마정석 광산 덕에 생겨난 여유를 생각하니 그런 말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계산을 해 버린 것이다.
‘차라리 내 머리가 나빴으면.’
끄으응.
드웨인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학했다.
“이럴 거면 세금 쥐어짜지 마셨어야지요! 군대는 왜 이리 급하게 만들어서! 천천히 만드시라니까. 아흐흐…….”
그렇게 그가 비참한 신음을 토해 내는데, 오랜 시간 가신의 반응을 봐 온 국왕이 밉살맞은 반문을 꺼내 들었다.
“……그건 가능하다는 얘기지?”
드웨인은 멍하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