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53)
253화
“……돈을 쓴다고 해도.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드웨인의 목소리가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외부에서 식량을 사 오는 것뿐이죠. 이 나라에 남은 식량은 이미 군자금이나 귀족들의 보석으로 바뀐 지 오래일 테니까요.”
굳은 표정으로 뱉어 낸 말에 로건이 움찔하고, 다른 이들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드웨인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을 이었다.
“다른 귀족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그나마 여유가 있는 영지를 쥐어짜서라도 식량난을 겪는 영지를 도와야 합니다.”
일견 일리 있는 의견이었지만, 현실성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모두가 고개를 내젓는 가운데 데미안이 대표로 반박하고 나섰다.
“귀족들은 나서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나선다 해도, 문제가 완전히 터지고 나서야 생색내듯 나서겠지요. 자기 영지에서 아사자가 나온 뒤에나 말입니다. 폐하께서는 그걸 원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만.”
그 말에 로건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미 늦어. 왕실에 대한 반감도 커질 테고, 일이 터진 후에 후환을 수습하려면 자원이 몇 배로 소모되겠지. 몇 년 내로 온 국민의 힘을 모아야 할 재앙이 시작된다. 그러니 현실적인 방안을 말해 보자고.”
귀족들의 협조는 염두에서 빼자는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법도상 왕실에서 귀족들의 지원을 강요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요청한다 한들 ‘내가 왜?’ 따위의 반응이 돌아올 게 분명했다.
‘물론 미사여구야 붙이겠지만, 그 말이 그 말이지.’
귀족들의 습성을 아는 자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말.
처음 얘기를 꺼낸 드웨인조차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또 맥라인 영지와 에스페란자의 여유분을 쥐어짜야 하는 겁니까, 폐하?”
“……에스페란자는 지난겨울에 추가로 지원해 드렸기 때문에 더 이상 여력이 없습니다.”
즉위식 이후, 아니 그 직전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표해 온 검공이 무거운 표정으로 좋지 않은 영지 상황을 전했다.
“맥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차마 영지민들 여론은 보고드리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타운 말고. 타렌에는 여유가 생겼잖아, 이제.”
“아! 그렇죠. 그 망할 마정수 농법인지 뭔지랑 댐 공사가 끝났으니까요. 근데 그러자마자 또 쥐어짜시려는 겁니까? 대체 맥라인이 봉도 아니고, 그 비싼 마정석을 탈탈 털어……. 헙!”
자각, 원망, 그리고 분노로 이어지던 드웨인의 표정이 갑자기 돌처럼 굳어졌다.
멋대로 내뱉던 말의 내용을 인식하고는 황급히 로건과 검공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검공은 쓴웃음을 지었고, 로건이 작은 한숨과 함께 부언했다.
“눈치 보지 않아도 돼. 스승님께도 이미 말했으니까.”
“크흠. 실례했습니다, 대공 각하. 아무튼, 폐하 말씀은 마정석을 팔아 외국에서 식량을 사 오시겠단 거죠? 그럼 가능하기야 하겠지만…….”
“하겠지만?”
로건의 반문에 드웨인은 울적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상업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한 가지는 예상할 수 있습니다.”
“뭘?”
“왕국 차원에서의 대량 구매가 이어지면, 상인들은 이때다 싶어서 단가를 올려 버릴 겁니다. 그렇게 되면 보급할 식량을 최소로 잡아도 예산이 부족해질 수 있습니다.”
“그와 관련해서는 일단 필립과 상의해 봐. 대량의 식량을 가능한 한 싸고 빠르게 국내에 들여올 방법. 찾아낼 수 있을 거야.”
“……말은 해 보겠습니다만, 필립이라고 그런 요구 사항을 전부 반영할 수 있을 리가…….”
“필립을 믿어 보자고.”
로건은 그 스스로도 터무니없어 보이는 조건을 말하며 연신 한숨을 쉬었다.
“그 밖에도 생각나는 방법이 있으면 전부 말해 봐.”
제국에 맞설 군대를 키우기 위해 자국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본말전도의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도리가 없었다. 강행하되, 어떻게든 그 부작용을 최소화할 방법을 짜내야 했다.
‘다시는 역병 같은 게 생기게 둘 수 없다.’
로건의 머리가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막막한 말씀이시네요.”
[그래. 믿을 건 너밖에 없다, 필립. 이쪽은 이쪽대로 차선책을 찾아볼 테지만…….]회색 눈의 청년은 그 막무가내의 응원에 한숨만 내쉴 수밖에 없었다.
농번기까지는 길어야 한 달.
백성들이 가장 굶주리는 시기를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때로 잡는다고 해도 고작 3달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자본금이 빵빵하다는 건가.”
그것이 비록 현금이 아닌 마정석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조차도 실물이 자신의 손에 들어오려면 한 달 정도가 걸리겠지만, 그 정도는 지금의 맥라인 상단에게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껏 개척해 온 제국의 식량 시장은 고작 마정석 광산 하나의 한 달 생산량 정도로는 시세 변동도 일으키기 힘들 정도로 거대했고.
국영 상단으로 바뀐 덕에 상단의 신용이 최고등급으로 치솟은 만큼, 고작 한두 달 정도의 거래는 손쉽게 체결할 수 있을 테니까.
다만 다른 문제가 있었다.
“티 안 나게, 한 번에, 최대한 낮은 가격으로 100만이 넘는 인간이 6개월은 생존할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을 사서 왕국으로 보내야 한다. 그것도 한 달 안에.”
조건을 말로 내뱉고 보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생존할 수 있을 만큼의 식량. 즉, 죽지 않을 정도라는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그 단위가 너무 막막했다.
추정치 100만. 왕국 전체 인구의 1/20이 아닌가.
도대체 왕국에서 무슨 짓을 벌였길래 그 정도 인구가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계산이 나온 걸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왕국에 망조가 든 걸까.
“X발……, 이걸 어떻게…….”
필립이 막막한 마음에 고개를 뒤로 젖히자, 그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 주는 가죽의 감촉이 느껴졌다.
최상급 소가죽으로 만든 소파.
왕국에서는 앉아 보기는커녕 본 적도 없는 최고급 소파의 감촉이 한없이 가라앉았던 의욕을 다시 불태워 주었다.
자신이 지금 누리는 호사도 맥라인 영지, 아니 왕국이 뒤를 받쳐 주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해내야만 하는 것이다.
마음을 다잡은 필립은 우선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을 정리했다.
“제국 중부까지 거래 대상을 넓히는 건 무리다. 동부의 서쪽 끝, 에너힘에서 왕국까지만 해도 무려 한 달이야. 그러니 거래 대상은 동부로 한정한다. 그리고 보름 안에 모든 거래를 끝내야 해. 그것도 한 번에. 그러니 곡물 상인들끼리 정보를 교환하게 두면 안 된다. 분명 가격을 담합할 테니까. 그러려면……. 아우. X발…….”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더 막막해지는 느낌이었다.
‘아냐. 착각이야.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해야 한다.’
다시금 스스로를 다독인 필립은 빠르게 사무실을 벗어났다.
그리고 그는 그 막막한 일의 시작부터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을 만났다.
“뭐라구요?”
평소 거래를 터 왔던 상단에 들어서자마자 필립은 어이없는 소리를 들었다.
“그게…… 제국 동부의 곡물 유통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면서, 황실에서 석 달간 거래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그 탓에 나도 죽겠어요!”
“예!?”
루스펠하임에서 벌써 1년째 거래를 지속하며 신용을 쌓아 온 상인, 아툰의 넋두리는 가만히 들어 주기에는 내용이 너무 황당했다.
“황실에서 왜요?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겁니까?”
“나도 그걸 모르겠으니 환장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아룬은 황실에도 물건을 납품하는 거상.
그런 그도 이유를 모른다는 건 더 이상 물어볼 필요가 없다는 소리였다.
결국 필립은 루스펠하임의 다른 권력자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아룬 때부터 피부로 느껴지던 불길한 예감은 루스펠하임의 시장, 드미트리 라이언을 찾아간 순간 그 실체를 확실히 드러냈다.
“시장님께서는 공무에 바쁘셔서 한동안 접견이 어려우십니다.”
1년간 갖다 바친 뇌물이 얼마인지 장부를 보지 않으면 기억도 나지 않는 인간.
그래서 언제나 웃는 얼굴로 뛰쳐나오던 인간이 접견을 거부한 것이다.
‘이거 냄새가 나는데.’
그것도 아주 더러운 악취가 풍겼다.
– 언젠가 제국은 우리 왕국을 침략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지금은 왕이 된 주군의 말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필립은 이것이 맥라인을 노린 황실의 수작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받았다.
‘차라리 우리 상단의 거래를 금할 것이지. 아, 그럼 사람 몇 번 타고 거래할까 봐?’
아니면 황실에서 맥라인을 노린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뭐, 지금도 눈 가리고 아웅 같았지만 대놓고 언급하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크니까.
‘그래서 아예 식량 거래를 멈춘다……? 대책 한번 거창하네. 허 참.’
이런 조치를 취한 이유도 얼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절로 한탄이 나오는데, 순간 필립의 머릿속에 영감이 떠올랐다.
‘오호라. 잠깐만, 이렇게 되면…….’
필립의 회색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빛나고, 이내 그의 입가에 히죽 웃음이 번졌다.
“……이거 가능성이 생겼는데?”
안 그래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달성이 힘들어 보이던 임무.
하지만 황실에서의 거래 금지라는 터무니없는 변수가 시장의 흐름을 아예 뒤틀어 버렸다.
그리고 필립은 그 틈에서 오히려 한 가지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었다. 불가능한 임무가 방해자 때문에 가능해지는 기적의 가능성을.
흔히들 나라에서 이뤄지는 상업의 흐름을 인체에서의 피의 흐름과 비유하곤 한다.
이는 상업이 막히면 나라라는 거대한 생물은 피가 흐르지 않아 고사하게 된다는 비유이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거래가 이루어지고 물자가 이동하는 것이 상업의 본질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런 물자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닌 시장 밖의 변수로 멈춰 버린다면?
물론 제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은 잠깐 혈행이 멈추는 것으로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된 핏방울, 즉 상인이라면 그대로 고사해 버릴 수 있는 치명적인 변수이기도 했다.
“거래 금지는 무슨! 석 달 동안 물건을 처분하지 못한다면 다음 달 매수 대금도 못 준다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내가 파산한다고!”
곡물 상인 콴은 오랫동안 거래해 온 거래처, 페룸 상단의 주인인 페룸을 보며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난들 어쩌겠소? 황실에서 금지한 것인데. 이 나라에서 장사하려면 나라 법을 따라야지.”
“그럼 우리 계약은!?”
“따지려면 황실에 가서 따지쇼. 나한테 무슨 방도가 있겠소. 안됐지만 돌아가쇼.”
쾅!
매정한 거절과 함께 닫혀 버린 문.
털썩.
콴은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아이고, 아이고. 난 어찌 살라고……!”
통곡에 가까운 외침이 계속됐지만 페룸은 다시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렇게 콴의 목이 쉬어 터질 즈음.
그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도움이 필요하신 것 같은데…….”
“뭐, 뭐요? 당신은 누구……?”
“곡물 상인 콴, 맞소?”
“맞습니다만……?”
미심쩍은 기색이 역력한 콴의 모습에 접근한 사내가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애말 상단에서 나왔습니다.”
“……못 들어 본 이름인데?”
콴이 사내의 회색 눈동자를 보며 몸을 추슬렀다.
“아, 그러실 겁니다. 저희는 이 나라 상단이 아니라서요. 그저 한 번 장사하고 뜨면 그만입니다. 저희와는 거래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그 말에 콴의 눈동자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황실의 명령?
모든 거래를 금한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당장 내가 죽겠는데! 다 털고 이 나라 뜬다, X발.’
빠드득.
“얼마까지 융통할 수 있소? 양에 따라, 원 시세의 80%까지 쳐 드리겠소.”
보통 상인의 입에서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 자체 할인을 꺼내 든 콴.
그 말을 들은 필립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 상인은 이득이 된다면 악마와도 손잡을 수 있는 놈들이다.
상업을 천대하는 국가에서 상인을 멸시할 때 인용하는 말.
그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진리였다.
‘높으신 분들은 비천한 상인의 마음을 모르는가 보지만…….’
자신은 황실 덕분에 숨통을 트게 되었으니까.
그날 이후, 제국 동부 7개의 대도시에서 각기 다른 경로로 맥라인 왕국에 곡물을 운송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물건을 사들인 곳은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진 상단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