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54)
254화
“국왕이 주도적으로 역병을 극복했소이다. 백성들 사이에서도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고 있다는데…….”
불편한 심기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마이크 테로다의 목소리에 자크 후안의 안색 역시 굳어졌다.
거기에 이반 클로드까지 불길한 예상을 더했다.
“라프탄 영지의 학살을 주장했던 우리 입장만 곤란해졌지요. 이러다 말이라도 새어 나가면…….”
그에 자크는 실로 오랜만에 감정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새어 나가면 뭐?! 뭐가 어떻단 말이오? 설마 촌 무지렁이들이 귀족들에게 반란이라도 일으킬 거란 뜻인가?”
백성들 따위, 일백의 기사 정도면 몇만 명이고 학살할 수 있다.
그 생각에 내뱉은 말이었지만, 한껏 높아진 자크의 목소리에 마이크와 이반 역시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자크 백작! 우리는 여론을 빌미로 왕을 압박하고자 했던 당신의 계획을 말하는 거지 않나! 한데 지금 그 태도는 뭐지? 설마 우리를 자네 부하쯤으로 여기고 있기라도 했나?!”
마이크 테로다의 날카로운 일갈에 아차 싶었던 자크가 그제야 표정을 관리했다.
“흠. 흠. 이거 실례했소이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평정을 잃었소. 다시 한번 사과하겠습니다.”
그 말에도 마이크와 이반의 표정은 완전히 펴지지 않았다.
‘이런 실수를…….’
감정 조절을 하지 못한 스스로를 탓하며 자크는 다시금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이내 빙그레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흠흠. 그리고 앞서 제 말은, 국왕이 백성들의 마음을 돌려 봤자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 귀족들의 뜻이라는 걸 강조한 것입니다.”
여전히 바뀌지 않은 표정들.
하지만 그에게는 이 사소한 균열쯤은 금세 봉합할 만한 아이디어가 있었다.
“그리고 제겐 우리의 힘을 확실히 강화할 방안이 있습니다. 이것은 두 분과 여러 귀족들의 협조가 필요한 일입니다만.”
그제서야 두 사람의 표정이 바뀌었다.
“……무슨 계획이오?”
“뜸 들이지 말고 얼른 말씀해 보시지요, 백작님.”
“간단합니다. 두 분도 이제 슬슬 백성들이 굶주릴 시기라는 것 정도는 알고 계실 겁니다.”
“흠. 그런데요?”
“이 시기에 천것들이 배고픈 거야 일상이지요. 하지만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입니까?”
백성들이 굶주리건 말건 관심 없다는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는 두 사람을 보며 자크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작년, 국왕의 강요로 우리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평년에 비해 과중한 세금을 거뒀지요. 그러니 올해의 백성들은 단순히 배고픈 정도로는 안 끝날 겁니다.”
또르륵.
자크는 한 병에 1,000골드가 넘는 와인으로 잔을 채우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이 와인 한 병이면 영지민 일가족이 1년은 생계를 이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귀족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니까.
다만.
“농번기 즈음에는 굶어 죽는 자들도 나오겠지요. 그렇게 농사를 지을 노동력이 죽어 나가면 우리 수입도 줄어들 테니, 나름대로 손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식량을 풀던가 해서요.”
꿈틀.
“그게 왜 우리의 힘을 강화하는 아이디어라는 겁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던 듯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마이크 테로다를 보며 자크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며 부드럽게 잔을 들어 올리고는 이 어리석은 두 귀족과 눈을 맞추었다.
“무지렁이들에게 식량을 풀면서, 수확기에 이자를 받는 겁니다. 한 5할 정도면 적당하겠지요.”
“아……!”
자신들의 창고를 더욱 불릴 계책에 두 귀족이 일순간 감탄했다.
하지만.
이내 아예 바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이반이 딴지를 걸어 왔다.
“그거야 그냥 세금만 쥐어짜도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굳이 뭘 이자까지.”
물론 이반 클로드가 백성을 위해서 그리 말한 건 아니었다.
그의 의도는 그야말로 단순했다.
한 번에 할 수 있는 일을 왜 굳이 중간 과정을 거치냐는 뜻이었다.
물론 자크가 준비한 말은 지금부터가 본론이었다.
“우리의 영지 말고 왕실 직할령과 에스페란자, 맥라인 영지의 주민들에게도 식량을 풀자는 이야기입니다. 이자를 받고 말입니다. 특히나 왕실직할령은 우리 세 영지와 상당히 가깝지 않습니까?”
그 말에 두 귀족이 헛숨을 삼켰다.
“우리가 ‘정당한’ 사유로 다른 영지의 주민들과 땅을 흡수하는 것은 왕도 막아서지 못할 겁니다.”
“오……!”
“과연…….”
두 얼간이의 탄성 속에서, 자크는 불편하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웃음 지었다.
‘지금쯤이면 끌어다 쓴 세금도 다 소모했을 것이다. 이제 왕실d은 더 이상 여력이 없어. 역병으로 여론이 조금 바뀌었다 한들,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이거지. 이제 곧 이 왕국은 내 뜻대로…….’
자크 후안의 희망은 다시금 크게 부풀어 올랐다.
* * *
“레테, 정말 미안하네만……. 자네 집에 식량이 좀 남으면 조금만 꿔 주게. 내 다음에 꼭, 꼭 갚음세!”
농부 게론은 오랜 망설임 끝에 어렵게 옆집을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오랜 친구이자 이웃인 레테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어허! 이 사람! 나라고 무슨 여유가 있겠어!?”
“그래도 자네 집이 우리보다 식구가 적지 않나! 우, 우리 집에는 당장 내일 먹을 식량도 없단 말일세!”
“우리도 이제 몇 주 버틸까 말까야. 수확기까지 몇 달이나 남았는데……, 미안하네!”
쾅.
게론과 비슷하게 초췌한 안색의 레테는 단호한 태도로 문을 닫았다.
그에 게론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내일 먹을 식량도 없다는 것은 조금의 과장도 없는 사실이었다.
그나마도 근 몇 주를 하루 한 끼씩, 미음으로 때워 왔기에 하늘이 노랗게 보일 지경이었다.
‘정말 영주를 찾아갈 수밖에 없는가.’
얼마 전 내려온 공고에는 식량 대출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배고픈 시기. 처음에는 몇몇 주민이 생각 없이 환호하기도 했지만, 그들도 5할이라는 이자의 무게를 금세 깨달았다. 그것이 당장의 배고픔을 벗어나는 대가로 미래의 지옥을 확정 짓는 일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당장 우리 가족이 굶어 죽어.’
일어서자. 영주한테 가자.
당장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더 큰 절망의 수렁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까.
한번 주저앉은 다리에는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였다.
“게, 게론!! 소식! 소식 들었나!?”
멀리서부터 소리를 지르며 뛰어오는 또 다른 이웃, 소렌의 모습에 게론의 두 눈이 커졌다.
어제부터 굶었다고 알고 있는 이웃이 갑자기 무척 활기찬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기운이 나서?’
자연히 그런 의문이 드는데.
“왕실에서 나온 사람이 식량을 나누어 주겠대!! 수확기에 동일한 양을 반납하는 조건으로!!”
“뭐!?”
게론은 순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쾅!
그런 그의 뒤로, 냉정하게 닫혔던 문이 벌컥 열리며 레테가 뛰어나왔다.
“여, 여보게. 그게 무슨 소린가!? 정말 무상으로 식량을 꿔 준다는 말이야!?”
그제야 이해가 간 게론이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 그게 어디야!?”
“뭐?”
“왕실에서 온 사람이 어딨냐고!!”
“서, 성안에…….”
소렌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게론은 언제 주저앉아 있었냐는 듯 성을 향해 질풍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 왕실에서 무상으로 식량을 대여해 준다. 조건은 없고, 수확기에 동일한 양을 반납하기만 하면 된다.
농번기가 시작되자마자 공표된 왕실의 포고문은 일순간에 왕국 전역을 휩쓸었다. 농사의 작황을 떠나, 당장 먹을 식량을 고민하던 다수의 농민들은 왕국 전역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사, 살았다! 살았어!”
“국왕 폐하 만세!”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물론 모두가 기뻐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이럴 거면 애초에 세금을 왜 올린 거야?”
“이 사람아. 세금을 올린 건 귀족들이지. 왕실이 아니라.”
“무슨 소리야. 왕실이 세금을 올리니 귀족들이 올린 거지.”
“뭐, 둘 다 똑같은 놈들이긴 한데. 그래도 무상으로 식량을 나눠 주는 놈들하고 이자를 절반이나 받아먹겠다는 놈들하고는 차이가 있잖아.”
“……그래. 그나마 왕실이 귀족들보다는 낫네.”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국왕과 왕실에 대한 여론이 이전에 비해 확연하게 좋아졌다는 것만큼은 모두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여론을 느낀 귀족들이 다시금 한 자리에 모여들었다.
쾅!
“왕실에겐 더 이상 여력이 없다면서! 자크 백작 당신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계책을 말할 때는 좋다고 동의하던 마이크 테로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자크의 표정이 굳어졌다.
거기에.
“왕실의 저력이 예상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렇다면 그 군대! 그 군대는요? 정말 우리를 겨냥하는 거 아니오?”
“에, 에이. 설마. 우리가 폐하께 뭐 잘못한 게 있나. 있다면 굳이 저…….”
모여든 귀족들 모두가 불신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도 없는 멍청한 작자들이 이제 와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지만, 쉽게 답변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크로서도 심히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대체 왕실의 어디에 이런 여력이 있었단 말인가.
아니 이런 여력이 있었으면 애초에…….
‘몇 년에 걸쳐 천천히 군대를 키워 나갔으면 될 일이야. 그렇게 무리수를 둘 이유가 전혀 없었단 말이지.’
제국의 침략에 관한 로건과 그 측근들의 생각을 모르는 이상 당연한 추론이었다.
결국 자크의 생각은 그의 상식 안에서, 그만의 결론으로 이어졌다.
“갑자기 그만한 돈을 마련했다? 어디서? 분명 정상적인 경로는 아닐 텐데?”
이미 여러 정보 길드에 의뢰를 맡겨 놓은 상황.
하지만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기에 몇 주째 입에서 떠나지 않는 중얼거림이었다.
그런데 마치 그 중얼거림을 들은 것처럼 수하 하나가 요란스레 뛰쳐 들어왔다.
“배, 백작 각하! 의뢰 결과가 도착했습니다!”
받아 든 종이에는 자크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오를 만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심지어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정보 길드 3곳에서 동일한 정보를 가져왔다.
제국이 왜 뜬금없이 왕국을 도왔을까?
깊게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지만, 사람은 본디 똑같은 광경 속에서도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마련이었다.
‘그래. 그란디아의 별. 황제가 로건 국왕을 격찬했던 것은 유명하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자크는 벌떡 일어나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자자, 귀족 여러분. 흥분하지 말고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왕실에 더 이상 여력이 없다는 건 분명합니다. 한계까지 쥐어짜서 꼼수를 부린 겁니다. 이제 수확기가 되면 왕실은 이 무모한 식량 뿌리기의 대가를 훨씬 크게 치르게 될 겁니다.”
그 말을 하는 자크의 얼굴에는 어느새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제국에서 식량을 빌렸다면, 왕실이 흔들리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맥라인 영지와 에스페란자 영지까지 파탄이 날 수도 있는, 아니 분명 그렇게 될 악수(惡手).
‘고맙소이다, 어리석은 국왕 폐하.’
자연스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올해 수확기에 모든 것이 결정 난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왕국의 실세가 된 자신의 미래가 또렷이 보이고 있었다.
* * * [데미안 그 친구, 이제 정말 일을 제대로 하는군요. 뭐, 황실의 도움이란 건 사실이긴 하지요. 그들이 의도했던 방향과는 반대지만. 푸하하하.]
피식.
“그래. 수고했다, 필립.”
로건은 새삼 필립을 제일 먼저 스카웃 한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번에 필립은 단순히 식량 구입 문제를 해결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백성에게 푸는 정책에서도 확실한 존재감을 보였다.
무상 지급이 아닌 무상 대여.
일방적인 지원은 필요하지 않은 이들도 전부 받아 갈 테니 필요 비용이 몇 배로 오르리라는 것이 필립의 의견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보다 효율적으로 분배되는 식량으로 사실임을 증명했고, 여론도 생각했던 것보다 호의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큰일을 해낸 필립은 웃다가 말고 바로 안색을 굳혔다.
[이번 건으로 확실히 알았습니다. 주군, 아니 폐하께서 말씀하신 제국의 침략이 그저 노파심이 아니었음을.]심각한 빛이 어린 가신의 회색 눈동자를 보며 로건 역시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앞으로도 너의 역할이 중요하다, 필립. 그런데, 이 건으로 앞으로의 제국 활동에 문제가 생기진 않겠느냐?”
[이번에 벌인 수작을 보면 언제고 벌어질 일이었습니다. 다만 대놓고 훼방을 놓진 않는 걸 보니, 저도 모른 체하고 장사를 이어 갈 생각입니다. 왕국에 식량 보낸 건 다 다른 이름들이니까요.]“그래. 수고가 많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는 겁니까? 어차피 폐하께서 보듬어야 할 자국의 귀족들인데요.]“해야 할 일이다. 나라의 체질 자체를 바꿀 거니까.”
로건의 단호한 답변에 필립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측근들 모두가 제국의 침략을 대비해 전쟁을 준비한다는 로건의 사상에 동의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그 과정에 이르는 길이었다. 특히나 귀족들과 관련된 일에 관해서는, 로건은 그 누구와도 생각을 공유하지 않았다.
하여 측근들은 그저 로건이 말을 안 듣는 귀족들 몇몇을 본보기로 징치하려는 게 아닐까, 정도로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로건의 내심은 조금 달랐다.
‘체질을 바꾸는 일은 고작 한둘을 징치하는 걸로 될 게 아니지.’
스스로가 그리 똑똑하지 못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옆 나라에서 성공시킨 일이었다.
그렇기에 굳이 의논도 하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혹시나 새어 나갈 경우, ‘귀족’인 측근들의 반발이 있을 가능성도 컸다.
그러니.
“올해 안에 왕국의 모든 것을 정리한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그렇게 많은 이들의 생각이 엇갈린 가운데.
어느덧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제국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들어온 대량의 식량 확인. 로건 국왕을 어여삐 본 황제의 손길. 이번 제국 황실의 지원은 수확기 직전까지만 이어질 것이며, 수확기 이후 왕실에서 직접 이자까지 쳐서 반납하기로 함. 왕실의 재정은 바닥으로 추정됨. 양성 중인 군대의 배급 식량도 줄어들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