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55)
255화두두두두.
질주하는 군마들의 말발굽 소리에 들판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곧이어 전면의 깃발이 어지럽게 휘둘러지자, 3천에 가까운 기마병들이 일제히 방향을 틀며 쿼렐의 소나기를 쏟아 냈다.
파바바바박.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은 쿼렐의 비가 목표 지점에 탄착군을 만들어 낸 광경을 바라보며, 드웨인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말 3천 마리를 사들이느라 쓴 비용만 해도…….”
원망 어린 눈으로 옆을 바라봤지만, 그 원망을 받아 줄 당사자는 멀리 하늘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그에 드웨인은 허탈한 웃음과 함께 한마디를 보탰다.
“그나마 효용이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로건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떠오르는데, 훈련을 마치고 정렬한 석궁 기마를 보며 표정이 미미하게 밝아진 헤인켈과 카이솔론이 그를 향해 돌아서며 고개를 숙였다.
“보신 것처럼 왕실 석궁기마대가 완성되었음을 보고드립니다.”
그 말에 로건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래. 수고 많았다, 다들.”
로건이 흡족한 얼굴로 그들의 어깨를 두드리자 그 뒤쪽에서 조용하지만 규칙적인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귀족들이었다.
오전부터 이어진, 기사단과 병사들의 공개 훈련과 석궁기마대의 시연. 왕실 직속 군대가 보여 주는 위력이 그들에겐 그리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중 한 사람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
“폐하께서 신경 쓰신 군대답게 아주 용맹하기 그지없습니다. 든든하시겠습니다, 폐하.”
깐깐한 인상의 갈색 머리 장년인, 자크 후안은 정말 흐뭇해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로건 역시 훈훈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모두가 그대들이 걱정해 준 덕분이오.”
“하하. 저희가 한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모두 폐하의 은덕이지요.”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군.”
“아. 그런데 폐하, 제가 조금 걱정스러운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소문?”
로건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략 한 달 전부터 병사들의 배급이 줄어들고 있다고 하는 이상한 소문이…….”
“말도 안 되는 소리! 일국의 백작이라는 자가 그런 헛소문에 귀를 기울이는가!”
“아, 죄송합니다. 물론 헛소문이겠지요. 죄송합니다, 폐하.”
자크는 흔들리는 붉은 눈을 마주한 순간 바로 고개를 숙였지만, 숙인 고개 밑으로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식량 무상 대여라는 생각지도 못한 수를 보며 다방면으로 조사한 결과, 제국에서 여러 경로를 거쳐 대량의 식량이 들어온 것을 확인했다. 그게 이제는 끊겼다는 것과 그 후 몇 달간은 에스페란자와 맥라인 영지를 통해 식량을 수급했다는 것도.
‘그마저도 이미 지난달에 끝났다는 것까지 확인했다.’
즉, 어리석은 왕은 이 군대 하나로 자신의 본진까지 흔들리게 만든 것이다.
왕이 가만히 있었으면 오히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무리한 공개 훈련으로 그는 확신을 얻었다. 군대의 배급이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그가 직접 확인한 사실이었으니까.
‘이 공개 훈련은 우리를 압박하려는 허장성세다. 이 군대는 보급도 제대로 되지 않는, 보기에만 그럴듯한 허수아비 군대야.’
판은 다 짜였다.
자크는 주먹을 불끈 쥐며 야망의 불꽃을 달랬다.
그렇게 고개 숙인 그를, 로건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 이제 왕실의 기반이 잡혔으니 왕국의 기초도 다잡아야겠지. 모든 귀족들은 대전 회의를 준비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자크 후안을 비롯한 몇몇 귀족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가운데, 대동한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3일이 흐르고, ‘수확기 이후의 국정 운영 방향’이라는 주제로 오래간만에 전 귀족들을 소집하는 대전 회의가 열렸다.
* * *
“확실하겠지요?”
“오늘이 우리가 만들어 가는 역사의 시작이 될 겁니다.”
정확히는 내가 만들어 가는 역사 말이지.
웅성거리는 귀족들의 중심에서, 자크 후안이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귀족들에게 연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고 있을 때였다.
– 국왕 폐하 듭시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대전의 문이 열리고, 갑옷 차림의 로건이 저벅저벅 걸어들어왔다.
이제는 익숙해진 갑옷 차림의 국왕.
기립한 귀족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옥좌에 앉은 왕이 이전처럼 바로 본론을 꺼냈다.
“바로 회의를 시작하지. 먼저…….”
그리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크 후안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폐하. 소신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 무례한 행동에 로건의 곁에 선 검공의 검미가 꿈틀거렸지만, 자크 후안은 아랑곳없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왕을 바라보았다.
그에 피식 미소를 지은 로건이 그에게 발언을 허락했다.
“자크 후안 백작. 그래, 말해 보아라.”
“무례하게 나선 것을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하지만 새로운 국정의 기조에 관한 회의를 하기 전에, 과거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됩니다.”
“과거의 약속?”
로건이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능청스레 되물었다.
‘말을 돌리시겠다?’
자크는 왕의 표정과 말투에 담긴 여유를 당황으로 받아들이며 미소 지었다.
“예. 폐하께서 약속하신 왕실에 대한 세금 인하를 다시금 확실히 공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 세금 인하?”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로건.
그에 자크와 귀족들인 진한 미소를 지었지만 이어지는 말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그럴 생각 없는데?”
“아니, 그게 무슨……!”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던 탓일까.
일순간 대전에 소란이 일었다.
멈칫한 자크 후안의 얼굴에도 미미한 경련이 일어났다.
쉽게 수긍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런 뻔뻔함이라니?
자크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한 예감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다시 입을 열었다.
“군주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면 신하가 무엇을 믿고 따르겠습니까. 재고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아. 물론 세금을 낮추기는 해야지.”
그럼 그렇지.
자크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영주들에게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쥐어짜이느라 지난 1년간 왕국민들의 고생이 많았다.”
그 뜬금없는 말에 자크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지고, 대전도 조용해졌다.
‘누가 누굴?’
‘먼저 세금을 올린 게 누구인데?’
‘지금 뭐 하는…….’
그 싸늘해진 분위기 속에서 로건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여 이제부터는 영주의 권한을 제한하고, 백성들에게 거둘 수 있는 세금의 한도 또한 5할로 제한하겠다. 그러나 왕실이 귀족에게 걷는 세금은 현행 그대로 6할을 유지한다.”
그 폭탄과도 같은 발언에 대전은 삽시간에 시장통처럼 소란스러워졌다.
더 이상 세율의 높고 낮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폐하! 그건 봉건제의 근간을 무너트리는 말씀입니다!”
“영주의 권한을 폐하께서 간섭하실 수는 없습니다!”
“어처구니없는 말씀을……!”
웅성웅성.
그 소란의 대부분은 왕을 향한 당황과 혼란, 그리고 분노로 채워져 있었다.
그 파격적인 발언에 놀란 것은 검공이나 로버츠 플로이드 같은, 로건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꽤 충격적이었던 듯 검공이 입술을 달싹이다 마는데, 재상의 직위를 받은 로버츠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로건을 말렸다.
“폐하. 영주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은 나라의 근간을 무너트리는 행위입니다. 아무리 국왕이라도…….”
“국왕이라도?”
“……모든 귀족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입니다. 소신의 충정으로 드리는 말씀이오니 부디 재고를…….”
확실한 로건의 편이라 볼 수 있는 로버츠 플로이드마저 그렇게 나오자 용기를 얻은 대전의 귀족들이 더욱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재고하여 주십시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아무리 폐하시더라도 영주의 권한에 참견하실 수는 없습니다!”
한순간 대전의 모든 귀족이 하나가 된 듯한 느낌.
로건 역시 예상했던 광경이었지만, 막상 눈으로 접하자 허탈한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폐하의 뜻대로 하십시오.”
옆에 선 스승이 언제 당황했냐는 듯 굳건한 미소로 그를 지지했고.
“이제야 무슨 뜻이셨는지 짐작하겠습니다. 미리 말씀만 좀 해 주시지요.”
“말도 안 되는 세금은 죄악이죠. 그럼요, 암.”
데미안과 드웨인을 비롯한 가신들 역시 그의 곁에서 여전한 지지를 표했다는 정도였다.
에일렌과 빅토르를 위시한 호위기사들도 대전의 앞으로 모여들며 귀족들의 과열된 분위기를 경계했다.
그 모습을 보며 흡족해하던 로건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잔뜩 흥분한 귀족들 사이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만! 그만! 어전이외다! 조용히들 하시오!”
마치 국왕의 호위기사가 하는 말 같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은 자크 후안, 지금 귀족들의 대표라고 볼 수 있는 이였다.
로건의 묘한 눈빛이 그를 향하고, 다른 이들의 시선 역시 그에게로 쏠렸다.
그 모든 시선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옅은 미소를 띤 자크 후안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폐하. 영주의 권한은 예부터 왕도 건드릴 수 없는 고유의 것입니다. 좀전의 말씀을 물리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없다. 백성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하는 조치이니 뜻이 있는 귀족이라면 따라 주리라 믿는다.”
말하는 자도, 듣는 자도 절대 믿지 않을 소리.
그 말에 자크 후안은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저는 이 나라의 귀족 대표로서, 폐하의 ‘제안’을 정중히 거부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다시 거두시고 본래의 약속을 지키실 때까지 왕실에 세금을 납부하지 않겠습니다.”
담담한 어조로 뱉어 낸 충격적인 선언에 그를 지켜보던 대다수의 시선이 흔들렸다.
이곳에 모인 귀족들이 직접적으로 그를 대표로 뽑은 적은 없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그 발언을 문제로 삼을 귀족도 없었다.
지금 당장은 그 발언에 대한 국왕의 반응이 더 중요했으니까.
어느새 다시 모두의 시선을 받게 된 로건은 자크 후안이 던진 폭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
“그 말은 왕실에 대한 도전이다, 백작.”
“먼저 선을 넘으신 것은 폐하이십니다. 올바른 군주의 도리를 지켜 주십시오!”
자크 후안 역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내 뜻은 변하지 않는다. 거부하는 귀족은 왕명으로 다스릴 것이다.”
누가 봐도 억지임이 분명한데도 물러서지 않고 선언하듯 선을 그어 버린 로건의 말에 대전 귀족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직전까지와는 다르게 대전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는 이 나라 모든 귀족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폐하의 제안을 공식적으로 거부하는 바입니다.”
자크 후안은 그 말을 끝으로 그대로 돌아섰다.
한껏 집중된 시선을 즐기듯 여유로운 태도로 대전을 나서려는 그 의 뒤로 따라붙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저, 저 역시 자크 백작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가, 각하. 따르겠습니다!”
“모두가 같은 뜻입니다!”
이반 클로드, 마이크 테로다 백작이 자크 후안을 따라 대전을 나서자 수십 명의 중소 귀족 역시 우르르 그 뒤를 따랐다.
대놓고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집단행동.
남아 있는 이들은 딱딱하게 굳은 안색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백작 각하. 정말 이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만약 왕이 무력행사라도 한다면…….”
분위기에 휩쓸려 몰려나오긴 했지만, 불안감은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이 일을 주동한 이를 바라봤지만, 자크는 미소를 지으며 단언했다.
“그럴 수 없다.”
“예?”
“보급도 못 하는 군대는 군대가 아니지. 지금 왕실의 상황으로는 왕실의 군대도, 맥라인이나 에스페란자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다.”
정보 길드 세 군데의 교차 검증을 마치고, 자신의 눈으로 확인까지 했다.
“모두 영지로 돌아가 군대를 모아라. 우리가 힘을 합쳐 봉기하는 기색이라도 보여 주면 왕은 바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크 후안의 말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고, 주변의 귀족들은 그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내 시대가 온다.’
자크 후안은 가슴 속 야망이 눈앞에 실현되는 듯한 착각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그 시점.
대전의 안쪽에서 측근들의 묘한 눈빛을 받고 있던 로건은 살벌한 미소를 띠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 전력은?”
그 말에 곁에 있던 헤인켈이 자신감 어린 미소를 지었다.
“맥라인과 에스페란자, 왕실군까지 합치면 단순 숫자상으로도 왕국 총 전력의 50%에 육박합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새삼 확인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자신감이 솟구쳐 올랐다.
“좋아. 그 정도면 완벽해.”
“굳이 귀족들 전체를 상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폐하.”
로건의 몸에서 솟구치는 살벌한 기세가 걱정되었는지 검공이 살짝 말을 보탰다.
로건은 그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한 말씀입니다, 스승님.”
그러고는 이내 좌중을 둘러보며 선언했다.
“군대를 준비해. 최우선으로 쳐내야 할 것들이 판별되는 대로 모든 것을 정리한다.”
“예.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