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57)
257화 ‘노린 거였어. 애초에 다 준비한 거였다고.’
자크 후안의 덜덜 떨리는 손은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미끼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자의 분노가 섞인 떨림.
하지만 이제 와 깨달았다 한들, 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비, 비켜!!”
“배, 백작!”
“지금 어딜 가는 거요!?”
“나가서 병사들을 지휘해야지!!”
버럭 소리를 지르는 자크의 모습에 그를 말리려던 귀족들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내성을 뛰쳐나온 후 그의 행동은 앞의 말과는 전혀 달랐다.
“리케! 리케 어디 있나!”
“여기 있습니다, 각하!”
“호위기사들을 모아라! 탈출한다!”
“예, 예?”
“빨리!”
“아, 알겠습니다!”
자크 후안은 호위기사들을 불러 모은 뒤, 누구보다 빠르게 동문을 향해 달렸다.
‘일단 살고 봐야 해. 젠장, 내가 어쩌다가…….’
질끈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뇌리를 잠식하는 것은 오직 후회였다.
일평생 귀족으로서 살아오며, 크게 욕심을 부려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크게 욕심을 부렸다가는 단숨에 목줄을 물어뜯을 포식자들이 많았기에 몸을 사려 왔다.
그 덕분에 1, 2차 내전 때도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그 포식자들이 사라진 후에야 숙였던 고개를 들었더니 위협할 자가 없다는 생각에 간이 부었었다.
‘그 포식자들을 전부 잡아먹은 게 저 왕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어.’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실정의 연속은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이들을 정리하기 위한 수였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로서는 스스로가 왕의 계획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걸림돌이었기 때문에 뽑혀 버렸다는 상상은 할 수 없었으니까.
‘도망친다. 소왕국 연합…… 아니, 제국으로. 거기서 숨죽이고 사는 거야.’
다행히 축적해 놓은 재산이 조금 있었다.
당장 품속에 든 보석 몇 개만으로도 제국의 대도시에 그럴듯한 저택을 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다음 일은…….
‘일단 살고 생각하자.’
더는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두두두.
“빨리! 더 빨리!”
그렇게 조급한 마음을 억지로 다스리며 호위기사들과 함께 말을 달리는데.
“찾았다. 자크 후안 백작.”
불쑥 들려온 삭막한 목소리와 함께, 자크 후안은 갑자기 세상이 빙빙 도는 기분을 느꼈다.
의식이 사라지는 순간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은빛의 바람이었다.
쿵.
“반역도 수괴 자크 후안의 목을 대령했습니다, 폐하.”
“킁. 얍삽이가 언제 또…….”
오랜 라이벌의 불평 따위는 그저 무시해 버린 채 위켄은 고개를 똑바로 들어 젊은 국왕을 바라보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위켄 공.”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보이는 왕.
한때는 제 앞을 가로막은 혈기 넘치는 청년에 불과했으나, 어느새 자신을 가뿐히 능가하는 초인이 되어 버린 왕.
그저 영웅의 싹이라 생각했던 애송이가 어느새 이 나라의 지배자가 되어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내전을 평정한 젊은 영웅에서 반역자로. 다시 왕으로.
그리고 또 폭군으로.
심지어 지금은 세금을 낮춰 백성들을 편하게 해 주겠다며 전쟁을 벌인 참이었다.
벌이는 일 하나하나가 워낙 파격적이라 도무지 행보를 예측할 수 없는 젊은 왕에게 위켄이 물었다.
“그런데 폐하. 영지민들의 세금을 대폭 낮추시겠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지난 1년이 너무 과중한 것이었지요. 백성들의 부담이 컸을 것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세금을 쥐어짜 군대를 키운 것이 또 이 왕이다. 위켄은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어디를 향하는지 궁금했다.
“영주의 권한을 제한하고 그다음에는…….”
“어이어이, 말 뼈다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폐하께서 하라시면 그냥 하면 될 일을.”
“닥쳐라, 덩어리. 모든 사람이 너처럼 생각이 없는 게 아니야.”
루터의 간섭에 눈썹이 절로 씰룩거렸지만 위켄은 여전히 왕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사실 내전에서 패배했던 그때부터 이 나라에 머무는 것에 회의를 느끼던 그였다.
법적으로 구속되면서 검공에게 속박되었다고는 하지만, 검공이 자신을 매일 감시하는 것도 아닌 이상에야 작정하고 도망치고자 하면 못 할 것도 없었다. 검공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자신을 따라잡을 사람은 없었으…….
‘아, 이 왕도 빼고.’
실없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다.
그럼에도 그가 이 나라에 계속 머무는 것은 별다른 목표가 없기 때문이었다.
다른 나라에 가서 다시 권력을 누리면 뭘 하겠는가. 초인이라면 어디서든 고위 귀족이 될 수 있었고, 그것은 저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더 의욕이 들지 않았다.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렇기에 위켄은 다시금 그에게 의욕을 불어넣어 줄 목표를 원했다.
다행히 젊은 왕은 그의 심리를 대충은 파악한 것 같았다.
“위켄 공은 내가 이다음에 무엇을 할지 궁금한가 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빼빼 마른 자신의 체구 때문일까.
왕의 붉은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게 간절해 보여 속으로 실소가 나오는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백성을 지켜야지요.”
“……예?”
“내외부의 모든 위협으로부터, 내 가족, 내 사람, 내 나라를 지킬 것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그것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후안 백작령은 당신의 백성이 아니었느냐는 물음이 생략된 말을 로건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정말이지, 폐하는 알 수 없는 분이시군요.”
“……?”
위켄으로선 왕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이 더 어이가 없었다.
내전을 종식시킨 영웅이 반역자가 되고, 결국 왕이 되더니 말도 안 되는 세금을 걷으며 폭군으로 불렸다. 그러더니 이제는 또 세금을 낮추겠다고 전쟁을 일으켜 휘하 귀족을 때려잡고는, 그 목적이 나라의 수호라고 말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흔들림 없이 빛나는 붉은 눈동자를 보지 않았다면 미친 자의 행태라고나 생각했을 발자취였다.
하지만 위켄은 역사에 기록된 미친 자들의 일부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웅 혹은 위인.’
범인의 예측을 불허하기에 미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위대한 성과를 만들어 내는 자.
그런 자가 왕인 나라라면 집권하는 동안 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날까.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겠군.’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린 자신이 우스워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프흐흐…….”
내전의 패배 이후 사그라들었던 가슴속 불꽃이 다시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푸하하하하!”
“말라깽이. 너 갑자기 돌았……?”
생각 없는 악우의 목소리는 한 귀로 듣고 흘린 채, 위켄은 후련한 미소와 함께 자신의 애검 트란스픽시오(Transfixio)를 바닥에 꽂았다.
고대어로 관통이라 이름 붙여진 검은 지금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내성의 돌바닥을 뚫고 아주 깊숙이 박혀 들었다.
“신, 위켄 칼리아. 맥라인의 국왕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왕의 눈빛이 흔들리고.
“여기까지 와서 새삼 뭔 헛소리야?”
악우의 헛소리가 귀를 괴롭혔지만.
“받아들이겠습니다, 위켄 공.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곧 젊은 왕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오자 위켄은 환한 미소로 응답했다.
* * *
– 왕이 반역자를 토벌했다.
단 하루, 아니 몇 시간 만에 끝나 버린 전투에 왕국 전역이 들끓었다.
“아니, 딱 봐도 병력 차이가 엄청나던데 그 귀족들은 왜 봉기를…….”
“몰라. 무슨 생각이 있었겠지.”
“귀족들이 멍청한 게 하루 이틀 일인가. 욕심에 눈이 멀었던 거지.”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자칭 지성인들은 자크 후안을 비롯한 죽은 귀족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그러나 그 내막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자는 국왕의 무서운 계략에 치를 떨며 입을 다물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로건은 다시금 전 귀족을 소집하는 대전 회의를 개최했다.
무표정한 얼굴의 로건이 담담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왕실에서 영지 귀족들에게 걷는 세금은 기존대로 6할을 유지한다. 하지만 영주들이 백성들에게 걷는 세금은 최대 4할로 제한한다.”
자크 후안이 반대했을 때보다 오히려 1할이 더 떨어진 세금 제한령.
하지만 그 충격적인 선언에도 귀족들 대부분은 그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봉건제의 근간을 훼손한다며 들고 일어났던 귀족들 중 핵심 인물들이 죄다 후안성에서 목이 떨어진 직후였다.
목숨 귀한 줄 아는 이라면 반발을 할 수 있을 리가 없…….
“폐하. 왕국의 근간은 봉건제입니다. 영주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대체 이런 생각 없는 용자는 어디서 꾸역꾸역 나타나는가.
태연한 안색으로 대전을 둘러보던 로건이 헛웃음을 지었다.
용기는 넘쳐났으나 안타깝게도 눈이 좋지 않은 늙은 귀족, 페이런 에스더는 그 웃음을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였다.
“눈앞의 이득을 위해 근간을 뒤흔드는 정책을 감행하는 것은 결국 미래에 큰 우환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물론 페이런이 생각이 없어서 이리 나선 것은 아니었다.
이미 거하게 피를 본 직후의 국왕이다.
남들은 무서워하지만, 오히려 이런 때에 또다시 피를 보면 앞으로 대전에서 국왕에게 직언하는 귀족은 없어질 것이다.
저 심기 깊은 국왕이라면 분명 그것을 고려할 터.
페이런은 그런 계산을 하고 나선 것이었다.
거기다 나름대로 절실한 이유도 있었다.
‘5할이면 몰라도 4할이면 우리 가문은 기사단도 유지할 수 없다. 천천히 말라 죽느니. 어떻게든 버텨야 해.’
페이런은 노회한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살려 국왕을 설득하고자 각오를 다졌다.
그런 그를 보며 어느새 헛웃음마저도 거둔 로건이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반역도당이 남아 있었군.”
“……예!?”
섬뜩한 국왕의 말에 페이런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
“끌어내라.”
국왕은 담담한 어조로 무서운 명령을 내렸고, 그 즉시 대기 중이던 기사들이 다가와 페이런의 양팔을 잡아끌었다.
“폐, 폐하!? 저, 저는 그냥 의견을 말씀 드린 것뿐이옵니다! 아, 아니, 죄송합니다! 실언, 실언이었습니다!”
페이런은 황급히 자신이 뱉은 말을 주워 담으려 했다.
귀족으로 살아온 수십 년의 생애,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혓바닥을 움직였지만.
“시끄럽군. 조용히 만들어라.”
“폐……!?”
뻐어억.
돌아오는 것은 충직한 기사의 주먹질뿐이었다.
질질질.
“흐읍.”
“어찌 저런…….”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신음이 터져 나왔지만 대놓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자크 후안을 비롯한 강경파 귀족들이 모조리 쓸려 나간 직후였다.
남은 이들은 귀족파가 유리하다 판단될 때조차 쉽게 나서지 않았던 신중한 이들, 달리 말하면 겁쟁이들뿐이었으니 당연히 더 이상 로건의 결정에 반하는 귀족들은 없었다.
* * *
– 모든 영지민의 세금을 4할 이하로 낮춘다.
새롭게 바뀐 세금 정책은 순식간에 왕국 전역에 알려졌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백성들이었다. 하지만 영지에 파견된 왕실 감독관이 재차 공표를 하고, 영주가 그저 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 나서는 그들도 달라진 현실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왕국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
“국왕 폐하 만세!”
“맥라인 왕국 만세!”
악몽 같았던 작년을 제외하더라도 5~6할의 세금을 떼는 것이 일상이었던 영지민들이 대다수였다. 그런 만큼 작년까지 로건과 왕실을 욕하던 이들 모두가 이제는 그를 찬양하기에 바빴다.
거기다 이어지는 정책 역시 영지민들로선 기꺼울 뿐이었다.
– 모든 백성은 왕실의 비호 아래 있으니, 영주라 하여도 함부로 대가 없는 부역을 동원하거나 착취를 일삼는 일을 금한다.
– 정해진 세금 이외의 수단으로 백성들에게 재산을 갈취하는 귀족은 직위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한다.
세금 인하 정책에 따른 영주들의 편법 갈취를 봉쇄하기 위한 정책들일 뿐이었지만, 이 또한 백성들에게는 환호를 받기에 충분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지난해의 악몽 같은 기억도 미화되기에 이르렀다.
“못된 귀족들을 몰아내기 위해 무리를 하신 거래.”
“맞아, 맞아. 애초에 폭군을 몰아내고 왕이 되신 분이었는데 우리가 너무 성급했어.”
그야말로 살맛 나는 세상을 맞이한 맥라인 왕국 백성들의 얼굴에 하나둘 웃음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