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58)
258화
“……으라차차. 끄으응. 아이고 허리야.”
추수에 한창이던 농부 에릭이 굽혔던 허리를 펴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그 말과는 달리,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햇볕에 거멓게 그을린 피부 위로 구슬땀이 흘러내려도.
새벽부터 시작된 낫질에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 와도.
눈앞에 펼쳐진, 농부 인생 40년 만에 처음 본 빽빽한 노란 밀의 파도는 그 모든 고생을 보람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시야를 가득 메운 밀의 파도만큼 남았다는 사실조차도 행복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에릭! 혼자 쉬지 말고 같이 쉬자고! 지금은 얼른 일해! 설마 네 밭만 하고 쉬려는 건 아니지?”
“잠깐 허리 좀 편 거 가지고 구박은! 일한다! 해!”
옆에서 소리를 질러 대는 동료 레온도 그와 같은 기분인 듯 얼 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런 분위기는 새로 농지로 개간된 서부 황무지 전역에 퍼져 있었다. 아니, 서부 황무지를 넘어 왕실 직할령 전체에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풍년이다! 풍년이야!”
“와, 이 밀알 좀 봐. 평생 농사만 지었는데 이렇게 튼실한 밀알은 처음 보네.”
“쌀은 또 어떻고!”
“올해는 식량 걱정 없겠어!”
이 모든 게 작년에는 맥라인 영지에서만 실행되었던 마정수 농법의 결과였다.
올해 막 개간된 서부 황무지는 물론이고, 왕실 직할령 전체와 에스페란자 영지까지 전에 없던 대풍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 작년 한 해 폭증했던 세금도 3할까지 낮아졌으니, 수확기를 맞아 구슬땀을 흘리는 농부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기쁨이 가득했다.
왕국 전역의 작황은 평년과 다름없었는데 유독 맥라인 영지와 에스페란자 영지, 왕실 직할령에만 대풍년이 생긴 상황.
그 상황은 왕이 귀족들을 숙청하고 새로운 세금 정책을 강행한 시기와 맞물려 묘한 소문을 만들어 냈다.
국왕 폐하의 가호가 있는 땅에는 풍년이 깃든다.
조금이라도 배운바 있는 이들이라면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칠 내용이었지만, 백성들 사이에선 그 소문을 신봉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다.
“맥라인 영지는 작년에도 풍년이었데!”
“막 개간한 황무지가 이리 풍년이 드는 건 어떻고.”
“황무지를 옥토로 바꾼 것도 모자라 전에 없는 풍년까지……!”
논리와 근거가 어찌 되었든, 그들 눈에는 변화가 너무도 뚜렷히 보였다.
‘우리’ 국왕 폐하는 신이 가호하는 분이다.
그렇게 로건과 왕실에 대한 소문이 이전과는 180도 달라진 가운데, 이 바뀐 세상에서도 한숨을 쉬는 이들이 있었다.
* * *
“영주님.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역시 그런가.”
트레보 달탄 남작은 가신 레토의 보고에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부족한가?”
“거둬들인 4할의 세금 중 6할을 왕실에 바친 다음이라면, 작년 영지 예산의 삼분의 일도 되지 않을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수확량이 예상치 수준이라면 기사들 서른 명의 연봉만으로도 예산을 초과할 듯합니다.”
“으음…….”
남작의 얼굴이 절로 어두워졌다.
‘기사단도 유지 못 하는 영주라니. 정녕 국왕은 우리 귀족들을 다 죽일 생각이란 말인가.’
달탄 영지가 가난한 편이긴 했다.
6할의 세금을 걷고, 그중 3할을 왕실에 바칠 때도 간혹 적자가 나던 산골 영지. 수도에 저택을 마련할 여력도 없어서 그대로 골수 지방 귀족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게 달탄 영지였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세금 제도가 4할에서 6할로 강제되는 순간 재정 파탄을 맞이한 건 예견된 수순이었다.
“……폐하께 상소를 올려야겠다.”
어차피 말라 죽을 거라면 사정이라도 해 보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레토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영주님. 그러다가 큰일 나십니다. 안 그래도 반대파 귀족들을 싹 몰살해 버리신 폐하이신데요!”
파랗게 질린 레토의 얼굴은 남작이 지금 하려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대변하는 듯했다.
“나 혼자 하겠다는 건 아니야. 상황이 좋지 않은 영지가 우리뿐일 리는 없을 테니까.”
“……다른 귀족분들과 함께 상소를 올리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그 수밖에 없어.”
“하지만 영주님. 그랬다가는 자칫 자크 후안 백작 꼴이…….”
“레토!!”
“죄, 죄송합니다.”
납작 엎드린 레토를 내려다보는 남작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왕이 일격에 성벽을 날려 버렸다는 믿기지 않는 소문이 더해진 ‘숙청의 날’에 관한 이야기는 최근 귀족가에서는 금기시된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뒤늦게나마 자크 후안에게 합류를 고민했던 달탄가에서는 더욱.
하지만 소리를 지른 남작 역시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왕은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것을 용서치 않아. 상소를 올렸다가 정말로……. 아니, 아니야. 봉기한 것도 아니고 고작 상소 정도로 목을 치진 않을 거야.’
현재의 어려운 상황과 왕에 대한 공포.
그 두 가지가 남작의 마음속에서 어지럽게 충돌하며 갈등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그때.
쾅!
“영주님!!”
기사 한 명이 집무실의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들어와 소리를 질렀다.
“와, 왕실에서의 통신입니다!!”
아직 어떤 행동도 하기 전.
하지만 좀 전까지 하던 이야기가 있었던지라 남작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그 불안감은 남작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통신실에 들어갔을 때 더 심해졌다.
[그대가 트레보 달탄 남작인가? 처음 보는군.]통신구 속 붉은 머리, 붉은 눈의 청년.
남작 역시 그를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누구인지는 모를 수가 없었다.
“폐, 폐하. 어찌 직접…….”
[왜? 내가 못 할 일이라도 한 건가?]흡.
그 차가운 말에 헛숨을 삼킨 남작이 바로 납작 엎드렸다.
“아, 아닙니다, 폐하.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저 용안을 뵙게 되어 여, 영광일 뿐입니다.”
[그래? 다행이군.]그 태연한 어조에 남작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안도하는 것도 잠시뿐.
[그런데 그대가 자크 후안에게 협력하려 했다는 소문이 있던데?]“마, 말도 안 되는 소문입니다!”
그 날벼락 같은 말에 남작은 엎드린 자세 그대로 펄쩍 뛰어올랐다.
“결단코! 결단코 그런 적 없습니다, 폐하! 제 충성심을 믿어 주십시오!”
진실을 덮고자 하는 절실한 의지가 느껴지는 표정으로 남작이 외쳤다.
그 간절한 마음이 통했을까.
피식 웃은 로건은 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 소문일 뿐이겠지. 뭐, 내가 굳이 그런 소문 얘기나 하자고 남작에게 직접 통신을 한 것은 아니야.]“뭐,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충실히 수행하겠습니다!”
[그래? 흐음. 듣기 좋은 말이군. 하지만 이건 명령이 아니야. 그저 제안일 뿐이니 충분히 생각해 보고 답을 했으면 좋겠군.]제안?
왕이? 나한테?
……왜?
갑작스러운 말에 남작의 머릿속이 더욱 멍해지는데, 통신구 너머에서 그의 머리를 한층 혼란스럽게 만드는 말이 들려왔다.
[남작. 요새 영지를 꾸려 나가는 게 힘들지 않나?]예. 누구 덕분에 아주 힘듭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내뱉는 즉시 목이 떨어질 말뿐이라 남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의례적인 말을 뱉어 낼 수밖에 없었다.
“……소인의 부족함을 통감하고 있을 뿐입니다.”
[말을 돌리지 않아도 좋다. 파견한 감독관을 통해 재정적 어려움에 관한 이야기는 충분히 듣고 있으니.]이게 무슨 뜻일까?
설마 도와주기라도 할 셈인가?
[그래. 그대의 짐작이 맞다.]그, 글쎄요. 제가 무슨 짐작을 했을까요?
남작이 더욱 혼란스러워진 표정으로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왕의 입에서 예상치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대가 원한다면 왕실에서 영지 운영에 도움을 줄 의도가 있다.]“……예?”
[왕실에서 영지 운영에 도움을 주겠다고 말했다, 남작.]남작이 멍하니 반문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왕은 귀족들의 권익을 뺏고 억압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아니면 이조차 미래를 내다본 함정일까?
혼란에 혼란이 더해지자, 남작은 스스로도 멍청하게 느껴지는 반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왜요?”
어린애의 투정 같은 물음.
‘이런 바보 같은……!’
8살 때 귀족의 예법을 배운 이래 40년간 나온 적 없는 맹한 어조에 본인조차 놀라는데, 통신구 속 왕은 오히려 웃으며 답했다.
[왜긴, 왕국의 신하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왕으로서 손을 내미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나.]남작은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수십의 귀족을 참살하고 그 가문조차 몰락시킨 왕의 말이라기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조건이 무엇입니까?”
통신으로 왕을 대면한 이래 처음으로 영주다운 말이 아니었을까.
그 합리적인 반문에 왕은 그저 웃으며 말했다.
[조건이라니, 정말로 그냥 호의일 뿐일세.]“……조건 없이 도와주신다면 저야 감사할 따름입니다만…….”
저 왕이 정말로 그럴 리가 없다.
남작이 불안한 표정으로, 불길한 확신을 담아 통신구를 바라보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맥라인 영지와 왕실 직할령, 에스페란자 영지에 대풍년이 오게 한 비법을 알려 주겠네.]“저, 정말이십니까?”
남작으로서는 반색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세 영지만의 대풍년.
그저 우연이라고만 볼 수는 없었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신의 가호라고들 말하지만, 왕에게 특별한 비법이 있다고 추론하는 것이 훨씬 이성적이었다. 심지어 맥라인 영지는 작년에도 비슷한 수준의 풍작이었다는 것을 자료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 역시 논리적인 측면에서의 가능성일 뿐, 그것을 진실이라 믿는 이는 없었다.
정말 그런 방법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비법이라기보다는 인류의 역사를 바꿀 만한 대변혁이라 하는 것이 옳을 테니까.
그러니 남작의 안색이 다시 미심쩍게 바뀌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 그런 비법이 존재한다는 말씀입니까? 도통 믿을 수가…….”
흠칫.
제 입으로 꺼내 놓고도 놀랄 말이었다.
무려 저 학살왕의 말을 노골적으로 의심했다는 사실에 남작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통신구 속 왕은 오히려 빙긋 웃었다.
[내가 설마 없는 말을 할까.]“죄, 죄송합니다, 폐하. 비법을 알려 주신다면 필생의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안도한 남작이 여전한 공포와 조금의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비법을 알려 줘도 영지 운영이 당장 수월해지진 않겠지. 재정 상태가 어렵지 않나?]그 재정을 어렵게 만든 장본인이 할 말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이미 완전한 권력을 쥔 왕에게 과분한 호의를 약속받은 상황이었기에 남작은 솔직히 수긍했다.
“예. 내년의 풍작이 보장된다 해도, 당장 1년을 버티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 그래서 그 문제도 해결할 겸, 내가 남작에게 부탁할 것이 있네.]“예?”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말의 연속이었다.
왕이 자신에게 명령도 아닌 부탁을 할 일이 뭐가 있을까.
남작의 얼굴에 다시금 혼란이 깃들었다.
[기사단을 전부 왕실로 보내 주겠나? 그들의 급여를 비롯한 재정적 부담은 모두 왕실에서 질 테니.]이어진 왕의 말에 남작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역시. 순순히 퍼 줄 리가 없지.’
기사야말로 영주가 가진 힘의 근간. 더하여 귀족 가문이 평민 위에 존재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기사의 존재였다.
다른 모든 것을 잃어도 기사단은 내줄 수 없다는 것이 트레보 남작, 아니 모든 귀족들의 생각일 것이다.
다만 그런 말을 꺼낸 것이 천년 그란디아 왕국의 역사에도 없던 무력과 권력을 한 손에 쥔 왕이라, 남작은 조심스레 돌려 물었다.
“혹시 제가 기사단을 파견하지 않으면, 말씀하신 비법도 알려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조심스레 꺼낸 질문.
그런데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아니. 백성이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은 왕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 내 부탁과는 별개로 풍년의 비법은 알려 줄 걸세.]왕이 너무 순순하게 나오자 남작으로선 뒷말을 잇기가 더욱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스스로가 비겁하게 여겨지더라도 가문을 위해 기사단은 지켜야 했다.
남작은 눈을 질끈 감으며 더욱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사단을 보내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 스스로 최대한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더라도 왕이 강요한다면 어쩔 수 없었다.
‘설령 왕이 지원을 취소하겠다 하더라도 기사단은 지켜야 해.’
남작은 무슨 편법을 써서건 최대한 버텨 보리라 그리 다짐했다.
그렇게 고함이나 냉대를 각오하고 있는데,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남작. 그대는 모르겠지만, 왕국엔 아직 내외의 위협이 산재해 있네. 나는 왕국의 힘을 한군데로 모아 그 모든 위기를 버텨 내고자 하네.]최근에 왕이 직접 일으킨 전쟁이 아니라면 줄곧 평화로운 왕국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긴장이 풀린 남작이 왕에게 반문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 나라가 이제 그란디아가 아닌 맥라인 왕국이기 때문이지.]그제야 남작은 약간이나마 왕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기존의 왕조를 뒤집어엎고 일어난 신생 왕국.
주변 나라에서 이리저리 시비를 걸 수 있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그 뒤에 이어진 말은 남작의 마음을 더욱 흔들었다.
[나는 그 위기의 기간을 3년으로 보고 있네. 그러니 기사단을 보내는 것도 3년의 파견이면 충분하네. 자네의 기사단은 철혈검을 배우고 더욱 강해져서 돌아갈 수 있을 걸세.]흡수가 아닌 파견.
거기다 왕실, 아니 그 이전에 맥라인 기사단의 명성을 드높인 그 검술을 기사단에 전수해 주겠다니.
[내 부탁을 들어주겠나?]더구나 강압적으로 명령할 수도 있는, 절대적 왕권을 지닌 왕이 한낱 시골 영주인 자신에게 저리 정중하게 말을 꺼내니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남작은 순간 자신과 가문만 생각했던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리 생각하고 나니 어느덧 결심도 섰다.
“폐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고맙네.]그날 오후, 달탄 영지의 기사 30명은 바로 왕실을 향해 말을 달렸다.
비슷한 시기, 똑같이 왕의 통신을 받은 영지의 기사단들이 일제히 왕실로 모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