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62)
262화- 본인에게는 내가 말하겠다.
그런 호언장담으로 아버지와 장인을 돌려보낸 로건은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켠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시간이라면 에일렌은 훈련장에 있을 터.
“여군 훈련장에 연락해라. 내가 직접 방문……, 아니, 아니다. 그냥 놔둬. 직접 가서 보겠다.”
“예!”
호기롭게 집무실을 나서려던 로건은 순간 그대로 멈춰 섰다.
뇌리를 스치는 가장 단순한 의문 때문이었다.
‘뭐……라고 말하지?’
전생의 리이나 사건 이후, 여성혐오증이 생겼던 그는 전생 내내 여자와 인연이 없었다. 물론 심정적 문제가 아니더라도 여유롭게 여자를 만나서 가정을 꾸릴 만한 평탄한 인생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러다 보니 현생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 에일렌을 대할 때도 스스로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에일렌과의 관계가 좋은 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마음이 넓기 때문이다. 적어도 로건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놓고 결혼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지.’
쓴웃음이 나왔다.
그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위안이 되는 사람이었기에 어느새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더 미안했고, 또 고마웠다.
그러니 이제는 그녀에게 남은 평생을 함께하잔 말을 확실히 전해야 하는데, 그 마음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말이 좀처럼 생각나지 않았다.
‘그동안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나와 결혼해 주……?’
으으, 아냐. 소름 돋아.
‘슬슬 결혼할 때가 되었으니 하자?’
……쓰레기 같다.
‘이 나라의 왕비가 되어 주겠……?’
한심해!
떠오른 생각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짜 어쩐다…….”
설마 거부하거나, 싫어하진 않겠지?
심장이 마치 생사대적을 만난 것처럼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일단 가 보자.”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던 로건은 결국 언제나처럼 일단 지르고 보자는 길을 택했다.
* * *
“폐하. 예고도 없이 어쩐 일로……?”
로건이 훈련장에 도착하자, 에일렌을 비롯한 여군 담당 교관들이 단체로 뛰어나왔다.
순간 당황했으나 이내 표정을 가다듬은 로건은 에일렌만을 남긴 채 모든 교관을 돌려보냈다.
돌아서는 이들이 고개를 숙이며 묘한 미소를 짓는 것이 감각에 고스란히 걸렸지만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종종 보던 모습이기도 했고, 오늘은 특히나 에일렌에게만 온 신경이 쏠렸다.
“무슨 일이세요?”
“아, 그게…….”
로건은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닥치면 무슨 생각이 나겠지, 라는 근거 없는 기대는 완벽하게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당황하는 표정이 재밌었는지 피식 웃은 에일렌이 로건의 팔을 살며시 잡았다.
“여기서 하기에는 곤란한 얘기라면 관저로 가시죠. 차는 항상 준비되어 있어요.”
“그, 그럼 훈련은……?!”
뭐라는 거야 이 X신아!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지금은 제가 없어도 잘 돌아가요.”
로건이 속으로 자학하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에일렌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잡아끌었다.
또르륵.
청아한 향기와 함께 찻잔에 따라지는 차.
언제나 마음을 안정시켜 주던 그 향기는 오늘만큼은 여느 때와 같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자꾸만 두근거리는 심장에 자꾸만 주변의 물건들에 눈이 갔다.
자신의 집무실에서 티타임을 가진 것이 처음도 아닌데 자꾸만 두리번거리는 로건이 이상했는지, 에일렌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하세요?”
“아, 아니 집무실이 참 단출하다 싶어서……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하고 반성 중이었습니다.”
책상과 의자, 그리고 간단한 책장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집무실이 오늘따라 유난히 썰렁해 보였다.
“예전에는 깔끔해서 좋다면서요?”
“아, 하하. 그, 그랬나?”
후르릅.
뜨끔한 마음에 얼굴을 황급히 찻잔으로 가린 로건이 차를 마시는데, 에일렌이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오늘 왜 이러실까? 뭐 특별한 말씀이라도 하실 생각이세요?”
쿨럭.
사레가 들려 뿜어낸 찻물에 얼굴이 더욱 뜨거워졌다.
“아, 크흠. 차가 좀 뜨겁군요. 아, 덥다.”
“차는 원래 뜨거워야 맛이라면서요?”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려는 시도도 실패로 돌아가자 집무실 안에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
“…….”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에일렌의 푸른 눈.
평상시에는 사랑스럽게만 보였던 그 눈이, 지금은 왠지 무겁게만 느껴져 자꾸 고개가 밑으로 내려갔다.
“저한테 할 말 있죠? 왜 그래요? 당신답지 않게.”
로건은 그 말을 들은 후에야 번쩍 정신이 들었다.
대체 내가 왜 이러는가.
어차피 해야 할 일이고, 설마 그녀가 거절할 리도 없는데.
그래. 설마…….
에이.
“아. 흠……. 그래요. 할 말이 있어서…….”
로건이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용기를 내려는데 에일렌이 불쑥 물었다.
“결혼이라도 하자구요?”
푸흡!
콜록. 콜록.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사레가 들렸다.
연신 기침을 토해 내는데 문득 부끄러움과 함께 분노가 솟구쳤다.
“대체 누가 먼저 말을……!”
“진짜예요!?”
화들짝 놀란 표정과 높은 목소리, 살짝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이 로건의 착각을 부쉈다.
“아……, 그. 그게…….”
“정말, 정말 그거……?”
각자 다른 이유로 멍한 표정이 된 커플이 서로를 바라보다.
마주친 시선에 화들짝 놀란 두 사람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왜 이렇게 자꾸 바보짓을 하게 되지.’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지로 내리누르려, 로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눈질로 옆을 살피자 목덜미까지 빨갛게 물든 에일렌의 모습이 보였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한 고민을 한 자신이 더 우습게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때까지와는 달리 말이 쉽게 나왔다.
“흠. 흠. 네. 맞아요. 에일렌, 나와 결혼해 줄래요?”
긴 미사여구는 없었다.
그저 솔직하고 담백하게 하는 말.
굳이 화려한 수식어가 없어도 진심이 담길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로건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에일렌을 바라보았다.
“…….”
그러나 불안하게도 에일렌은 답이 없었다.
에이. 설마.
아니, 아니겠지?
“……싫어요?”
“아, 아니, 아니에요! 싫은 건……!”
펄쩍 뛰며 손사래를 치는 모습이 더 불안했다.
싫은 건 아니다?
그럼 좋은 것도 아니라는 말?
“어……, 흠. 그, 그, 너무 갑작스러웠나? 그럼 생각할 시간을…….”
생각지 못한 상황에 눈썹에 경련이 일어나고 목소리도 흔들리는데.
“아니, 아니에요. 결혼할게요. 해야죠.”
에일렌이 갑자기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빠르게 대답했다.
기다리던 답이었지만 상상하던 것과는 너무 다른 분위기였기에 로건은 떨떠름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 그……. 왜……?”
그 소심한 반응이 또 문제였을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에일렌이 푸른 불꽃이 이글거리는 듯한 눈으로 로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빠르게 쏘아내듯 말을 붙였다.
“비록 반지도 뭣도 없고, 낭만도 없지만! 지금 거절하면 또 몇 년을 기다릴지 모르는데 해야죠.”
아!!!!
그 순간, 통렬한 깨달음이 로건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왜,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급한 마음에 바로 달려오느라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리 여자를 잘 모른다지만, 세간의 기초적인 상식조차 무시해 버린 것이다.
허탈한 마음에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헛웃음이 나왔다.
“웃어? 웃어요? 이렇게 삭막하게 청혼해 놓고?”
그러나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리는 모습도 사랑스럽기만 한 것을 보니, 하나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이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구나.
그러니 더욱 웃음이 나왔다.
“네. 그래도 좋아서요.”
“……바보같이.”
슬쩍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이내 에일렌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린 것을 본 로건이 더욱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기다리게 해서. 그리고 멋대가리 없이 청혼해서.”
“……알면 됐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그래도 받아들여 줘서.”
“치…….”
귓가에 느껴지는 삐죽이는 입술의 온기가.
가슴 가득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이.
로건의 가슴을 뿌듯하게 채웠다.
그는 그 마음을 온전히 담아, 진심으로 말했다.
“지금 못한 만큼, 앞으로 더 잘할게요.”
그 담담한 말이 통했을까.
피식 웃은 에일렌이 그와 똑바로 눈을 맞추며 말했다.
“나도 잘할게요. 왕비로서, 또 기사로서.”
“……에?”
기사?
상황에 어울리지 않은 단어의 등장에 로건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잊었어요? 내 꿈은 원래 기사예요. 왕비가 아니라.”
“아…….”
그 확고한 목소리에 로건이 순간 말을 잇지 못하는데, 에일렌이 살짝 정색하며 말을 더했다.
“진심이에요. 왕비가 되었다고 훈련이건 실전이건 나 빼놓을 생각 말아요. 난 기사를 포기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러느니 차라리 왕비를 포기할 거예요.”
그 말에 로건의 눈빛이 흔들렸다.
말이야 반쯤 협박조였지만 이것 역시 그녀의 배려였다.
제국과의 전쟁을 불과 몇 년 앞두고, 그녀만 한 전력을 후방에 빼 두는 것도 말이 안 되었으니까.
초인의 경계에 선 강자로서, 또 이제는 완전한 전력의 일각이 된 여군을 통솔하는 상징으로서 그녀는 분명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 마음이 고맙고, 또 미안해서 로건은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요. 그럽시다.”
픽.
“뭐예요, 그 표정은? 설마 이제 와서 날 걱정하는 거?”
안긴 채로 자신의 볼을 살짝 잡아당기는 그녀의 모습이 새삼스레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니. 사랑스러워서.”
상기된 표정과 미소가 교차하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 * *
– 국혼을 준비하라.
맥라인 왕실에서 전해진 소식에 왕국 전역이 소란스러워졌다.
로건 국왕에게 약혼자가 있고, 그 약혼자가 기사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혼은 나라의 경사였으니까.
물론 최근의 선정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저 머나먼 딴 세상의 소식일 뿐이었다.
“폐하가 결혼하신다는데?”
“우와. 그럼 또 뭔 일 생기는 건가?”
“뭔 일?”
“……안 생겨?”
“왜 생겨?”
“……이를테면 국혼 기념 축제가 열린다던가.”
“실없는 소리는. 해도 수도에서나 하겠지.”
“아. 그런가?”
“그래. 그냥 일이나 해.”
“……어.”
하지만 수도의 왕실 사람들과 맥라인 영지의 반응은 남달랐다.
“우와아아! 우리 대공자님이 결혼하신대!”
“이 사람아! 이젠 대공자님이 아니라 폐하!”
“아무튼! 경사잖아!”
“그렇지! 아마 영주님도 크게 잔치를 여실걸!”
“잔치가 뭐야! 축제지 축제!”
“와하하하. 만세다! 만세!”
6~7년 전부터 로건이 만들어 놓은 정책으로 혜택을 받아 온 맥라인 영지민들은 마치 제 일처럼 기뻐했다.
“국혼을 준비하랍신다!”
“성대한 잔치를 준비하라!”
“모든 것이 완벽한 결혼식을 만들어야 한다! 모두 집중해!”
드웨인은 시간 단위로 호통을 쳐 가며 왕실의 관료들과 시종들을 다그쳤다.
‘단 하나의 결점도 있어서는 안 돼!’
눈을 부릅뜬 재정대신의 호통에 그 밑에 사람들만 죽어났다.
“돈은 얼마든지 써도 좋다! 최고! 최고급으로 모든 것을 맞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좀생이 재정 대신이 웬일로 돈에 조금도 연연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니, 흡사 국고를 거덜 내기라도 할 기세였다.
“주변 국가의 왕실에도 초대장을 보내라! 맥라인 왕실의 성세를 보여 주자고!”
자연스레 그 명을 따르는 이들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 생각보다 더 큰 잔치가 될 것 같다.
그 소식이 주변에 퍼지자마자 누구보다 빠르게 반응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거 전국의 상인들이 다 모일 것 같은데?”
“그럼 판을 좀 더 크게 벌이는 게 어때?”
“그래. 아예 이참에 그랑을 떠들썩하게 만들어 보자고!”
모름지기 한 국가의 사절이라면, 그 사신 한 명만 덩그러니 오는 경우는 없없다.
그 뒤를 따르는 상인들과 물자의 이동은 또 다른 형태의 무역이나 다름없는바. 왕국의 모든 상인들이 국혼을 계기로 모여들 타국의 사절단에 관심을 가지며 속속들이 수도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왕실의 재정 대신이 분위기를 주도하고 수도를 중심으로 한 거상들이 그 판을 더욱 키우니, 왕성에서 시작된 들뜨고 소란스러운 분위기는 이내 수도의 주민들에게도 옮겨졌다.
“축제가 열린대!”
“나라의 잔치다!”
“우와아아!”
그렇게 뜨겁게 달아오른 왕국의 분위기는 왕국의 서쪽, 아주 먼 곳에 있는 누군가에게도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