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66)
266화새해의 첫날.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소원을 비는 것은 대륙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올해의 맥라인 왕국, 특히나 수도 그랑과 왕성의 분위기는 다른 곳과 사뭇 달랐다.
각자의 저택에서 느긋하게 새해를 맞이했을 귀족들이 아직 동이 트기도 전인 새벽녘부터 왕성에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대단하군.”
“이게 다 얼마야…….”
“히야…….”
대륙 평균으로 봐도 대다수가 부유한 축에 속할 귀족들이 하나같이 혀를 내둘렀다.
원래도 아름다운 왕성 그랑피아였지만, 오늘은 그야말로 눈이 부시다는 표현이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정원에 배치된 순백의 조각상과 공예품들은 은은한 마법 조명 아래서 절묘한 각도로 빛을 반사하며 아름다움을 더했고, 본궁으로 이어지는 길 전체엔 보석이 가득 깔려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입이 쩍 벌어질 광경이었지만, 가장 압권인 건 본궁 앞 너른 공간에 마련된 결혼식장이었다.
“우와아아!”
순간 그 화려함에 너무 놀라 감탄사를 터트린 한 귀족이 화들짝 놀라 자신의 입을 막았지만, 그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른 귀족들 역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밤하늘의 은하수 위를 걷는 듯한 황홀한 기분으로 보석의 길을 지나오니, 눈앞에 순백의 빛이 가득한 공간이 펼쳐진 것이다.
“이게 뭐야…….”
“대체…….”
“허허…….”
수백의 귀족들이 모여 있는데도 들려오는 소리라곤 감탄사뿐이었다.
홀린 듯 결혼식장을 바라보던 귀족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진짜 구름인 겁니까?”
본궁의 입구 앞, 본래는 차가운 대리석으로 가득했어야 할 공간에 구름 같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
손으로 떼어 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몽글몽글한 안개 위로 발을 디디자, 정말 구름 위에 서 있는 것처럼 폭신한 감촉이 전해졌다. 하얗다 못해 빛이 나는 듯한 구름 바닥의 위, 원래는 밋밋한 기둥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각양각색의 꽃으로 장식된 벽이 세워져 있었다.
“하아, 향이 정말 좋습니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감탄은 빈말이 아니었다.
얼핏 두서없어 보이는 수백 종의 꽃들이 제각기 뿜어내는 향기가 합쳐지자 묘한 조화로움이 느껴졌다. 그 향기에 구름 바닥의 폭신함이 더해지니, 절로 기분이 들뜨는 듯한 생동감까지 전해졌다.
이른 새벽부터 깔끔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나오기 위해 밤을 새운 귀족들의 눈에 다시 총기가 어렸다.
그렇게 생기가 돈 눈으로 고개를 들어 전면을 바라보니, 본궁의 벽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신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새겨진 벽화가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신이시여…….”
그것을 본 귀족들이 연이어 성호를 그었다.
9대신의 경전 첫머리에 그려진 모습 그대로, 창조주의 빛을 좇아가 그 권능을 부여받은 신들의 승천 과정이 담긴 벽화는 바라보는 것만으로 경건함이 느껴졌다. 평상시에는 신전 근처에도 잘 가지 않던 이들까지 성호를 그리며 감탄했을 만큼 생생한 벽화였다.
그리고 그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한 벽화의 가장 위, 창조주의 빛을 형상화한 보석은 아직은 어두운 새벽하늘의 별빛만으로도 찬란한 빛을 뿜어내며 결혼식장을 비추고 있었다.
“저게 무슨 보석인지 아시는 분 있소?”
“저도 잘…….”
“대륙의 눈인가, 그거 같습니다만.”
“음?”
“그……, 죽은 왕이 제국에서 받은 선물 말입니다.”
“아…….”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2황자를 비롯한 제국의 사절단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식장이 모두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화려하다는 것엔 모두가 동의하는 바였다.
별궁의 외벽에 그려진 천사들의 모습이 뒤늦게서야 눈에 들어왔을 정도로 화려한 정경.
시야를 압도하는 순백의 빛과 기분 좋은 향기.
부드러운 구름 바닥의 촉감까지.
“그야말로 천상에 올라온 듯한 느낌이야. 황홀하군.”
“과연…….”
“적절한 표현이야.”
분위기에 취한 누군가가 감탄하며 뱉어 낸 말은 이내 여기저기서 격한 동의를 얻어 냈다.
그 목소리에 맥라인 영지의 주요 인사들이 모인 곳에 서 있던 작달막한 드워프가 뿌듯한 미소를 짓는데, 귀족들은 어느새 이 멋진 작품의 배경을 추론하기 시작했다.
“대체 이걸 누가 다…….”
“제국의 도움 덕분이겠지.”
“과연. 제국의 능력은 대단하군. 대체 어떻게 만든 건지…….”
빠직.
“우씨, 어떤 놈들이! 다 나와 동족들 솜씨인…… 읍!?”
“하마르 공. 조용히 합시다. 이제 시작합니다.”
“우읍?!”
클레이튼의 손에 입을 틀어막힌 하마르가 눈을 부릅뜨며 전면을 바라보자, 이내 본궁의 문이 열리면서 새하얀 법복을 입은 사제가 등장했다.
“어? 대주교가 아니네?”
“여주교라…… 누구지?”
“아문다의 주교, 일리아 사제일세.”
웅성거리는 귀족들의 시선을 받으며, 일리아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이제 9대신의 축복 아래, 맥라인 왕실과 왕국의 경사가 될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식장에 자리한 모든 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왕국의 주인이시자,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의 수호자. 로건 맥라인 폐하께서 입장하시겠습니다.”
일리아 주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순백의 예복을 입은 로건이 결혼식장에 들어섰다.
“오오, 과연.”
“갑옷 외에 다른 옷을 입으신 건 처음 보는데?”
“초인답게 풍채가 늠름하시군.”
새하얀 비단에 금실로 불꽃이 수놓아진 화려한 예복은 로건의 탄탄한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해 주었다. 게다가 평소와는 달리 오러유저의 기세를 숨기지 않고 발산하고 있으니, 그가 걸음을 뗄 때마다 모든 좌중의 시선이 홀린 듯 그 뒤를 쫓았다.
‘기세를 온전히 뿜어내면서도 그저 자연스레 주목만 끈다. 중급에서도 극에 다다랐어.’
그것을 본 검공의 얼굴에 흐뭇함이 떠오르고, 제롬의 표정은 좀 더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을 때.
어느새 본궁의 제단 앞까지 다다른 로건이 일리아의 앞에 섰다.
그에 로건과 부드럽게 눈을 마주친 일리아가 바로 다음 순서를 읊었다.
“이제 이 이 왕국의 국모가 되실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플로이드 백작가의 공녀…… 흠, 흠. 공녀라는 말보다는 이게 더 어울리겠군요. 왕국 최초의 여기사이자 맥라인 여군의 상징, 에일렌 플로이드 경입니다.”
좌중이 일제히 술렁였다.
결혼식에서 신부를 소개하는데 ‘경’이라니?
그 생소한 신부 소개에 맥라인의 귀족들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데, 정작 로건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정말이지…….’
일리아 주교의 손에 들린 소개문에서, 한껏 강조 표시가 된 낯익은 필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우와아아!”
그도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함성이 터져 나왔다.
움찔한 로건이 뒤를 돌아보는데, 그 역시 순간적으로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새하얀 면사포였다. 황금빛 금실로 아름답게 수놓아진 면사포 아래, 탐스럽게 나부끼는 붉은 머리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잘 단련된 호리호리한 몸을 감싼 순백의 드레스는 선명한 붉은색과 기가 막히게 어우러지며 우아한 매력을 한층 더해 주었다. 이내 풍성한 치맛자락이 하얗게 빛나는 구름 바닥 위를 지나가자 마치 신화 속 여신이 구름을 타고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여명이 밝아 왔다.
찬란하게 떠오른 태양이 대륙의 눈을 거쳐, 결혼식장 전체에 다채로운 빛을 흩뿌렸다.
“오오오.”
“에일렌 경이 저렇게 아름다운 분이셨나…….”
“허…….”
모두의 감탄 속에 사뿐사뿐 다가온 에일렌.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로건은 일리아의 눈짓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에일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일렌이 조심스레 손을 붙잡자, 자신과는 다른 의미로 바짝 경직된 게 느껴졌다.
그것이 그의 긴장감을 녹였다.
그렇게 긴장이 풀리고 나니, 그녀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 그대로 굳어 있다는 게 보였다.
‘자기소개는 그리 당차게 적어 놓고는.’
피식 미소를 지은 로건은 맞잡은 손을 더욱 꼭 쥐며 경직된 반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 주려 노력했다.
이내 움찔하는 작은 떨림이 전해졌다.
그조차도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새삼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일리아 주교의 축사가 시작되었다.
“새해의 시작을 이렇게 경사스러운 일로 맞이하게 되어 무한한 기쁨을 느낍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축사가 이어지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로건은 가만히 그의 반려를 바라보았다.
온통 빛으로 물든 식장에서 가장 찬란한 빛을 발하는 사람.
이 사람이 이제 자신의 곁에서 평생을 함께할 것이라 생각하니, 두근거리는 가슴속에서 온갖 상념이 솟구쳤다.
전략적 이유로 연을 맺었으나,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 사람.
그녀와 함께해 온 순간들이 연이어 뇌리에 떠올랐다. 문득 그중 너무 긴 시간을 다른 일에만 몰두해 왔음을 깨닫고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복잡한 눈으로 에일렌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새 일리아의 축사가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새롭게 떠오른 이 태양처럼, 두 분이 이 나라의 부모가 되어 이 왕국의 모든 백성을 보듬어 가시길 바라면서 이만 축사를 마치겠습니다.”
“우와아아!”
어찌 시간이 지났는지 감각도 흐려진 자신과는 다르게, 하객들은 지루한 시간을 간신히 견뎌 냈다는 듯 하품을 하며 박수를 보냈다.
로건은 멍한 정신으로 그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웃다가, 그 사이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2황자와 눈이 마주쳤다.
본격적인 재앙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것이 절로 상기되는 놈의 모습. 그 모습을 본 순간, 들뜬 마음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제국을 극복하지 못하면 이 모든 게 허상이 될 뿐이다.’
현실에 취하지 마라.
그런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무너진 가문의 모습과 끌려가는 동생의 모습이 환상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이를 부드득 가는데.
“폐, 폐하?”
문득 들려온 당황스러운 목소리에 로건의 고개가 다시금 옆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턱짓으로 에일렌을 가리키는 일리아와, 붉게 물든 얼굴로 고개를 숙인 에일렌의 모습이 보였다.
잠깐 딴생각을 하는 사이 무슨 일, 아니 무슨 말이 있었던 걸까?
“에?”
뭘 어쩌라고?
순간적으로 당황하는데.
“폐하께서 사랑의 맹세를 해 주시면 됩니다.”
“아…….”
사랑의 맹세.
그 말에 로건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온갖 절차가 다 있는 제국과는 달리 간단하게 치러지는 그란디아, 아니 맥라인의 예식에서 그 끝을 알리는 의례.
서약의 입맞춤을 나눌 순간이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반려의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에일렌의 모습이 환상처럼 보았던 전생의 광경과 어우러지며, 다시금 각오를 다지게 했다.
눈앞의 이 사랑스러운 반려 또한 전생에는 내전에서 스러진 운명.
이미 자신은 제 가문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운명을 바꿔 왔다.
그것이 비록 운이 많이 따른 결과라고 해도.
과거의 성과가 미래의 희망을 담보하지 못한다고 해도.
‘반드시 극복한다.’
로건은 한쪽 눈에 비친 미래의 적을 치워 버리고, 새롭게 개척해 나갈 운명을 향해 키스했다.
“이것으로 9대신의 주관 아래, 이 혼인이 성립하였음을 선언합니다.”
선언을 끝으로, 일리아가 신성력의 축복을 내렸다.
이미 찬란하기 그지없던 식장에 상서로운 빛이 더해지자 여기저기서 요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
맥라인 왕조의 첫 국혼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