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67)
267화
“와하하하!”
웃음이 가득한 왕궁의 피로연장.
주인공인 로건과 에일렌의 주변에는 당연히 사람이 북적거렸지만, 그런 그들 다음으로 북적이는 곳은 바로 제국의 2황자가 자리한 곳이었다.
“이렇게 뵙게 되어 무상의 영광입니다, 전하.”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이름 모를 귀족을 보며 바로스는 그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눈앞의 이 돼지나 앞서 인사를 나눈 다른 귀족들 따위에는 관심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귀찮군.’
이럴 때면 자신의 배다른 형처럼 쉽게 다가가기 힘든 칼날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종종 들었다.
물론 그 생각은 언제나처럼 잠깐뿐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버릇을 들여 쌓아 온 ‘선하고 착한’ 이미지가 아니었다면, 6번째 황자로 태어난 그가 2황자라는 지위에까지 오르지는 못했을 테니까.
“호의는 기억해 두겠소, 남작.”
“가, 감사합니다, 황자 전하.”
이름은커녕 성도 기억이 나지 않는 뚱뚱한 귀족이 그 한마디에 뛸 듯이 기뻐하며 물러났다.
제국의 황도라면 이름과 성을 기억하며 한마디 덧붙이는 것이 더 좋았겠지만, 굳이 이 왕국에서까지 그렇게 심적 노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저 습관처럼 보이는 미소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작은 왕국의 귀족들에게 제국의 황자라는 지위는 무소불위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런데 그 순간, 순번을 기다렸던 것처럼 자신의 앞자리가 비기가 무섭게 다가오던 다른 귀족의 뒤로 외눈의 기사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외눈과 마주친 2황자의 검은 눈이 미묘하게 빛났다.
“흠. 실례하겠소. 아무래도 일행이 내게 할 말이 있나 보군.”
“아…… 예. 알겠습니다, 전하.”
다가오던 귀족이 그의 말에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다가 뒤쪽에서 다가서는 제롬의 모습을 보고는 황급히 물러섰다.
사절단이 머무는 한 달간, 반거인 루터 카일과 폭풍검 위켄 칼리아를 대련에서 꺾은 제국의 젊은 초인에 관한 이야기는 왕국에서도 큰 이슈였으니까.
많은 이들이 국왕이나 검공과의 대련도 기대했지만, 검공은 격에 맞지 않는다며 제롬을 상대해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롬이 직접 왕에게 대련을 청할 수는 없었기에, 더 이상의 초인대전은 볼 수 없었다.
‘뭐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제국의 위세를 보이기에는 충분했으니까.
황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첫 번째 임무를 무사히 마친 제롬이 어느새 그의 앞에 다다랐다.
“무슨 일인가, 제롬.”
“그게…… 조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전하.”
그에 황자가 눈짓하자 그의 호위기사들이 주변의 사람들을 더욱 멀리 물렸다.
이내 주변이 조용해지자 제롬이 황자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뭐라 속삭였다.
그리고 그 순간 황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다 죽었다고?”
아주 작은 목소리에 실린 감정은 짙은 당황과 분노.
“수소문할 때까지는 괜찮았습니다만, 오늘 본격적으로 왕궁 깊숙이 들어가자마자 일이 벌어졌습니다.”
“국혼을 도울 일꾼이라는 핑계가 있었는데도?”
“길을 잘못 들었다는 변명이 전혀 통하지 않았답니다. 행사장을 벗어나는 순간 바로 처형을 해 버렸다고…….”
“이, 이 미친 것들이!!”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 고함에 주변의 시선이 모여들자, 황자가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하지만 나직이 이어지는 음성은 살기등등했다.
“맥라인 왕국에 공식적으로 따져라. 호의를 원수로 갚다니,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그게…… 이미 제가 이미 항의를 했습니다만.”
“했다고?”
황자의 시선이 상석에서 귀족들의 인사를 받고 있는 왕에게로 향하는데, 마치 그 순간을 노린 듯 로건이 그를 향해 잔을 들어 올렸다.
그 입가에 걸린 미묘한 미소를 확인한 황자가 살짝 눈썹을 찌푸리는 순간, 작은 한숨과 함께 제롬의 말이 이어졌다.
“이미 왕명이 내려왔다며 꿈쩍도 안 하더군요. 왕의 면전에 사람 목을 던진 무뢰한들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예외를 봐주냐면서…….”
“하……. 미친…….”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걸고넘어지면 외교적으로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을 만큼 너무나도 극단적인 수였으니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외교적 마찰 따위는 상관하지 않겠다?’
어처구니없는 왕의 도발에 2황자가 이를 갈았다.
문제라면 이것을 외교적으로 따져 왕국에 대가를 받아 낸다고 한들, 결국 제 손해가 더 크다는 것이었다.
황위 계승전에서 분명한 감점 요인일 테니까.
‘설마 그것까지 알고 있지는…….’
황자는 억지로 표정을 관리했다. 여유로운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저 소국의 왕에게 더 이상 약점을 보이기 싫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여유 있는 표정 위로, 그나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희생된 것은 그냥 정보요원들일뿐, ‘귀신’들은 무사히 빠져나갔습니다. 게다가 이미 적당한 대상을 찾아 ‘얼굴’을 얻었다고 합니다. 암살행은 지금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아니, 지금은 그냥 정보 수집에만 집중하라고 해. 아직은 오러유저들 근처에 접근도 하지 말라고 하고.”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간 취합한 정보 중에 꽤 쓸 만한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음?”
“역병을 처리할 때 사제들과 마찰이 있었다는데, 그게 단순한 마찰이 아니었답니다. 왕실에서도 쉬쉬하고 있던 모양입니다만.”
“좀 더 자세히.”
“예. 그게…….”
로건이 벌였던 일의 여파.
그 세세한 과정이 고스란히 황자의 귀에 들어갔다.
제롬의 말이 이어질수록 2황자의 입가에 미소가 진해졌다.
“재미있군. 신전의 금기를 어겼다라…….”
“충분히 분란의 소지가 될 것 같습니다만.”
“아니, 그것만으로는 약하지. 주교가 납득을 했다는데. 하지만 이용할 만한 수가 더 있긴 하겠군.”
“예?”
“재작년에 놈이 제국에 왔을 때 들어온 보고가 있었지. 신전에서 이 왕국을 주목하고 있다더군. 그런데 절대 좋은 분위기가 아니라 했어. 이거,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었는데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군.”
1년 전 스치듯 들은 보고를 한순간에 떠올린 기억력이라니, 황자를 보는 제롬의 외눈에 새삼 감탄이 어렸다.
그런 제롬을 보며 미묘한 미소를 지은 황자가 술이 반쯤 찰랑대는 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코끝을 자극하는 와인의 향을 즐기며, 이제는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린 왕의 뒤통수를 향해 잔을 들어 올렸다.
“아무래도 중앙 신전에 한 번 들려야겠어. 저 왕에게 멋진 선물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예?”
“그러니 제롬. 자네 이름을 좀 빌려주게.”
“예?”
“내 이름에 제국 신성의 이름까지 더해진다면, 교황을 만나는 시간이 조금은 단축되겠지.”
그 말에 제롬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교황이라는 이름의 무게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이름을 쓰겠다는 말 때문이었다.
“……전하. 저는 황위 계승전에 간섭할 생각이 여전히 없습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한쪽 눈을 앗아 간 원수의 경지가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호위를 자처한 것일 뿐, 2황자의 파벌이 되겠다는 생각은 아직 없었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그 제안을 받았음에도 말이다.
“설마 내가 이곳에서 벌인 작전을 모두 진두지휘해 놓고 빠지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제롬 디카이드.”
“그거야 전하의 지시를 따른 것뿐입니다.”
“흐음. 설마 아직도 내가 주군으로 섬기기엔 많이 부족해 보여서 그러는 것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굳이 왕궁에서의 일이 아니더라도,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보여 준 통솔력과 카리스마, 그리고 부하를 다독이는 포용력은 이미 일국의 군주로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다만, 제 스승님의 입장이…….”
“트리스 경이, 본인이 중립을 지킨다고 해서 제자에게까지 그것을 강요할 인물은 아니라고 보는데?”
“…….”
난처한 기색의 제롬을 보며 바로스는 쐐기를 박았다.
“나는 내 사람을 아끼지. 그대가 원하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지원할 것이네.”
2황자의 어조엔 진심이 어려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저 로건을 떠보기 위해 목이 잘린 클레오는 이미 흔적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말이 제롬을 흔들었다.
그 역시 왕국으로 올 때와는 마음가짐이 달라진 상태였으니까.
“……제가 저 왕의 목을 원한다 해도 말입니까?”
제롬이 자신의 오른쪽 눈을 가린 안대를 쓰다듬으며 스산하게 물었다.
마음을 넓게 가지라는 스승의 가르침에도 패배의 분노를 완전히 떨칠 수 없었다.
‘난 그저 대범한 척, 잊은 척 한 것 뿐이었어.’
한달 전, 저 로건 맥라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보낸 짧은 시간은 스승의 가르침을 잊고 그 분노를 곱씹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의 분노를 읽어 낸 황자는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언젠가는 반드시 내가 그 자리를 마련해 주겠네. 설령 폐하께서 반대하신다 해도 말이야.”
그 말에 제롬의 외눈이 번득였다.
“그 말씀, 믿겠습니다.”
“좋아. 차기 제국제일검의 이름은 내 옆에서 더욱 커질 것이야.”
바로스는 제롬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이곳으로 온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생각보다 쉽게 달성되었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교황을 만난다. 내 뜻대로만 된다면…….’
이 새롭게 떠오르는 왕국에 피할 수 없는 혼란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되면 대륙 동부는 완전히 그의 뜻대로 요리될 터.
‘우리 제국은 숟가락만 들면 되겠지.’
나아가 황위 계승전의 결과 또한 더욱 확고해질 것이다.
‘로건 맥라인. 이번에는 결코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 로건 맥라인 만세!
– 맥라인 왕국 만세!
왕국의 밝은 미래를 염원하는 환호성이 가득한 자리에서, 2황자 역시 왕을 향해 함께 잔을 들었다.
실로 오랜만에 짓는 진짜 미소와 더불어.
* * * 어느덧 2개월이 지났다.
째잭.
새소리와 함께 완연한 봄이 왔음이 느껴지는 따스한 햇살이 얼굴에 쏟아지자, 나른함에 취해 있던 로건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떴다.
잠을 대신하던 명상도 이제는 옛말이었다.
아무리 수련이 중요하다 한들 평생을 함께해야 할 반려를 신혼부터 독수공방하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으음…….”
격렬했던 지난밤을 말해 주듯, 그의 반려는 최상급 포스유저라는 경지가 무색하게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지럽게 흩어진 붉은 머리와 이불 밖으로 드러난 고운 어깨선을 보며 로건이 미소 짓는데, 옆이 허전해진 것을 느꼈는지 잠시 뒤척이던 에일렌이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떴다.
“일어났어요?”
쪽.
이마에 내려앉은 가벼운 입맞춤에 붉어진 얼굴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난 바로 나가 봐야 해요. 저녁 때 봅시다.”
“예, 폐하. 저도 바로 나가야죠.”
“피곤하지 않아요? 조금 쉬어도…….”
“괜찮아요. 우리가 열심히 할수록, 안심하고 우리 아이를 낳을 날이 더 빨리 찾아오겠죠.”
그 말에 로건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혼인이 끝난 뒤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미안해요. 내가…….”
“아니, 아니에요. 제국의 침공이 사실이라면, 제가 지금 임신을 해서야 곤란하기만 할 뿐이니까요.”
에일렌은 어느새 옷을 챙겨입고 머리까지 묶고 있었다.
침대에선 언제 일어났던 건가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참 다행이죠? 생체 리듬까지 조절할 수 있는 뛰어난 기사가 아내라서?”
조금은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으며 농담을 건네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또 고마웠다.
그 고마움을 담아 로건이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요. 오늘도 힘내 봅시다.”
“군단제를 공표하는 날이 오늘이었던가요?”
“네. 아쉽겠지만 여군은 아직 중앙 군단에만 배치할 수밖에 없어요. 절대적 숫자와 기반 시설 문제도 있으니.”
“몇 번 들어서 이미 알고 있습니다, 폐하. 걱정 말고 일 보시지요.”
그 씩씩한 반응에 로건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어렸다.
로건은 가슴을 가득 채우는 뿌듯함과 함께 침실 밖으로 나섰다.
“폐하!”
“폐하를 뵙습니다.”
침소를 나서자마자 마주친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적당히 받아 주며 발길을 서두르자, 침궁 밖에서 기다리던 빅토르를 비롯한 호위기사들이 바로 따라붙었다.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충!”
“그래. 가자.”
그렇게 본궁으로 들어서자 대전 밖에서 로건을 기다리고 있던 드웨인이 그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폐하. 귀족들은 모두 모여 있습니다.”
“좋아. 들어가지.”
“예.”
드웨인이 손짓하자, 대전의 입구를 지키던 기사가 그 안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국왕 폐하 듭시오!”
그그그긍.
거대한 대전의 문이 열리고, 이제는 익숙해진 푹신한 붉은 양탄자의 좌우로 귀족들이 일제히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저벅저벅.
상석을 향해 일정한 걸음걸이로 걷는 로건의 옆에서, 연달아 숙어지는 고개들.
왕국 내에 더 이상의 분란은 없으리라는 확신이 드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옥좌에 앉자마자, 로건은 여느 때와 같이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오늘부터 왕국의 모든 병과 제도를 일괄 개편한다.”
“예?”
“그게 무슨…….”
“역시…….”
웅성거리는 대전.
예측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소수와 당황하는 다수가 보였다.
제게로 집중되는 귀족들의 시선을 하나하나 마주하며, 로건은 다시 한번 새로운 왕국의 변화를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