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70)
270화
“정렬하라!”
모두가 검은 법복에 강철 투구를 쓴 이단심문관들 앞에서, 유일하게 새하얀 법복을 입은 노사제가 소리를 질렀다.
왕성에 도착한 지 고작 하루.
좀 더 머물다 가라는 왕의 권유도 뿌리친 채, 에셀 파브룬은 바로 이단심문관들을 소집했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이제 막 동이 터 오는 새벽부터 왕성을 벗어나려 한 것이다.
‘왕이 무슨 수작을 부리기 전에 확고한 사실로 만든다.’
맥라인 현지 교구에서 보고된, 신을 모독했다는 참담한 증언들.
그 증언을 확인하고 기록하여, 교단에 보고하는 것이 이번 임무의 본질이었다. 거기에 더해 그 ‘버림받은 자들’의 신변 일부를 확보하는 것까지.
사안이 중한 만큼 무려 교황께서 직접 자신을 지목하여 특별히 지시한 것이었다.
– 신뢰성 넘치는 제보자가 있으니 확인만으로 족하다. 시간을 그리 오래 끌지 말도록. 만약 그대의 괴벽 때문에 일을 그르치게 될 경우…….
– 절대,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성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교황의 섬뜩한 눈동자를 떠올린 에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교구에 있는 파미엘 게른하임이나 다른 옛 동료 대주교들 중 가장 빠르게 추기경으로 추대된 것이 자신.
처음에는 자신의 정치가 제대로 통한 것이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자신의 이른 출세가, 약점이 있는 자들을 높은 자리에 앉혀 놓고 다음 대 교황까지 맘대로 주무르려는 교황의 계략이었음을 취임한 바로 다음 날 깨닫게 된 것이다.
– 이 자료가 민간에 알려지면 바로 파문할 수밖에 없소이다, 에셀 추기경.
교황의 바로 아래 지위로, 때로는 교황을 견제해야 하는 추기경이 교황의 개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에셀은 그 사실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지금 교단의 추기경 9명 중 거의 대다수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머릿속을 맴도는 교황의 목소리를 애써 떨쳐 내고는 다시금 정면을 바라보았다.
“최대한 빨리 임무를 마치고…….”
두두두두.
간단한 설교만 하고 출발할 생각이었는데 말을 시작하기가 무섭게 뒤쪽에서 지축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회오리바람을 휘감고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독수리의 문양의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기사단?”
히이이이잉!
에스페란자 가문의 문장이자 이제는 맥라인 왕실 2군단의 상징이 된 깃발 아래, 700여 명의 기사가 일제히 말을 멈췄다.
이내 무리의 가장 앞에 있던, 금발이 드문드문 섞인 백발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장년의 기사가 옅은 미소와 함께 말에서 내려 에셀에게 말을 걸었다.
“에셀 파브룬 추기경 되십니까?”
얼굴만 보아서는 50대 같았지만, 에셀은 그 얼굴에서 주름의 흔적을 읽었다.
정확히는 주름이 ‘있었던’ 흔적을.
정상적인 세월의 흔적이 모종의 힘에 의해 강제로 사라진 듯한 모습이었다. 눈앞의 기사가 마법사나 사제에게 미용 치료를 받은 것이 아니라면, 그런 경우는 대부분 한 가지를 의미했다.
생명의 힘 포스를 극한까지 단련한 기사가 한계를 뛰어넘으며 세월까지 거스른 결과물.
“……오러유저?”
순간 흘러나온 중얼거림에, 늙었으나 젊은 기사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펠릭스 에스페란자라 합니다. 왕국에 계시는 동안 조사단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아…… 그대가 그 유명한 검공이시구려. 하지만 호위라니? 우리는 그런 요청을 한 적이 없는데?”
“폐하의 배려이십니다. 귀한 분들이 낯선 땅에서 고생하실까 봐 무척 걱정하고 계시지요.”
퍽이나.
어제의 만남을 기억하는 에셀로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일 뿐이었다.
“설마 신전의 행사를 방해하실 생각이오?”
“그럴 리가요. 저희는 그저 조사를 도와드리려는 것입니다.”
“도움은 필요 없소.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터이니.”
“예, 그러십시오. 저희는 얌전히 호위만 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눈빛이 치열하게 부딪쳤다.
“따라오지 말라고 해도 따라올 생각이군.”
“이곳은 맥라인의 땅이니까요. 부디 폐하의 호의를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무표정한 얼굴의 에셀은 검공 뒤의 기사단을 살펴보다가 이내 무엇을 떠올렸는지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 뭐, 좋소. 하지만 엄한 수작을 부릴 경우, 신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검공은 보통의 그답지 않은 능글맞은 모습으로 에셀의 말을 받아쳤다.
하지만 웃고 있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그의 속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 부탁드립니다, 스승님. 이단심문관들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스텔라와 같은 아이들을 빌미 삼아…….
주군의 그 말을 듣는 순간, 검공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내 딸을…….’
‘아빠아!’ 하는 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한 듯했다.
스텔라의 미소로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는 게 그의 가장 큰 행복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 조사단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딸을 악마로 내몰려는 불한당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네놈들이 뭘 하려고 하건,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채 출발을 명하는 에셀의 뒷모습을 보며 검공은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 * * 이단심문관과 2군단의 정예 기사들의 어색한 동행은 무려 3일이나 이어졌다. 라프탄 영지로 향하는 내내, 정말 농담 한마디 나누지 않은 것이다.
그야말로 소 닭 보듯 서로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관계.
그 관계에 변화가 생긴 것은 그들이 침묵의 질주 끝에 라프탄 영지에 도착했을 때였다.
역병 사태 이후, 라프탄 영지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그 시작은 기존의 영주였던 에릭 라프탄이 실각되고, 그 사촌이었던 테논 라프탄이 새 영주로 임명된 것이었다.
새 영주는 자신의 사촌이 저지른 학살의 흔적을 무마하기 위해 온정을 베풀었다. 왕실의 세금 제한 정책을 뛰어넘어 오히려 2할까지 낮춘 세금은 역병이 물러간 후에도 그 후유증에 신음하던 영지민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바뀐 게 있다면, 자경단 훈련이 상당히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었다.
“그쪽으로 도망간다! 잡아!”
“이미 한 방 맞았어! 포위만 잘하라고!”
“조금만! 조금만 더!”
화살에 맞은 다리로 쩔룩거리며 도망치는 사슴을 쫓는 사람들.
포위망에 갇혔다는 것을 깨달은 사슴이 주춤한 순간, 그들의 손에 들린 연사 석궁이 연이어 쏘아졌다.
파바박.
끼잉!
애처로운 단말마와 함께 사슴이 쓰러졌다.
크고 순한 눈망울에 어린 원망의 빛은 금세 꺼졌고, 쓰러진 사슴을 향해 다가온 사내들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잡았다!”
“나이스!”
“자자! 신선할 때 마시자고!”
마시자.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있었다면 의아해했을 말이었지만, 모여든 사내들 중 누구도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아니, 반박은커녕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품속에서 바가지나 놋그릇을 꺼내 들었다.
“자, 어여들 오라고!”
이내 석궁을 쏜 사내 중 하나가 단검으로 쓰러진 사슴의 동맥을 끊자, 사내들은 일제히 그릇을 내밀어 쏟아지는 핏물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으. 이 비린내는 도통 적응이 안 돼.”
“건강에 좋으니까 그냥 참고 마셔.”
“그래. 역병도 이기게 만든 보약인데.”
입가에 핏자국이 흥건한 채로 웃는 사내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기괴했다.
피를 마시는 게 왜 금기로 취급되는지 단번에 이해되는 광경이었지만, 당사자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연신 피를 마실 뿐이었다.
그것은 이제 라프탄에서는 일상이 되어 버린 광경이었다. 70년 전 사멸된 그란트 영지의 문화가 라프탄에서 부활한 것이다.
역병을 겪고 난 뒤에 생긴, 생을 향한 갈망이 만들어 낸 문화. 그 배경을 안다면 아무리 혐오스럽다 한들 무작정 비난만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세상에는 전후 사정을 헤아리기보다는 자신의 절대적 기준에 의해서만 선과 악을 판단하는 이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사슴 피를 마시던 사내들은 하필 그런 종자들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이고 독선적인 이들과 마주치고 말았다. 심지어 자신의 기준에 따라 다른 이의 피를 보는 것도 서슴지 않는 이들을.
“산 것의 피를 마시는 자. 금기를 어긴 죄로 처형하겠다.”
처음 그 목소리가 들린 순간 사내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한 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그야말로 사람 같지 않은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누구?”
그리고 그들이 미처 상황을 깨닫기도 전에, 검은 법복을 입은 무리는 제각기 품 안에서 철퇴와 메이스 등을 꺼내 들고 소리도 없이 그들을 향해 쇄도했다.
“이런!”
챙!
콰앙!
“진정들 좀 하시고!”
카가각.
다행이라면 차가운 살기를 내뿜는 이단심문관들 앞을 막아서는 기사들의 존재였다.
“히에엑!”
“제논! 피, 피해!”
갑자기 눈앞에서 펼쳐진 기사들과 수상한 무리의 격전.
기겁을 한 사내들의 뒤쪽에서 에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대놓고 신전을 적대하겠다는 거요, 검공!”
“무슨 말씀을, 저희는 그저 왕국민의 안전을 지키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노회한 인간들의 목소리가 부딪쳤다.
“저들은 금기를 어긴 자들이다!”
“그저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것뿐입니다. 추기경 예하께선 사슴피가 역병을 낫게 했다는 것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웃기지 마라! 계속 우리를 막는다면 맥라인이 신전을 적대하는 것으로 알겠다! 사제들은 저 역겨운 자들을 처벌하라!”
“기사들은 왕국민을 보호하라!”
“예!”
검은 법복을 입은 전투 사제들이 말없이 움직였고, 기사들이 그 앞을 충직한 대답과 함께 막아 섰다.
“막는 자는 모두 교적이다! 박살 내라!”
에셀의 자신감 어린 명령과 함께 이단심문관들과 기사들의 전투가 벌어졌다.
“모든 것은 신의 뜻으로.”
어지간해서는 보통 사람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신성력이 유형화된 빛으로 이단심문관들의 몸을 감쌌다.
그와 동시에, 순식간에 몇 배는 빨라진 움직임으로 단숨에 돌진한 이단심문관들이 기사들을 향해 철퇴와 메이스를 휘둘렀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공격에 어느새 둘씩 짝을 지은 기사들은 저마다 건틀릿이나 허리띠, 혹은 검에서 푸른 빛을 뿜어내며 그들의 앞을 철벽처럼 막아 섰다.
꽈아아앙!
충돌과 함께 동시에 물러서는 전투 사제들.
그들의 안색이 살짝 굳어진 것과 달리, 기사들은 상기된 안색으로 연신 투기를 뿜어냈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이단심문관의 무력을 직접 겪으니 오히려 성취감이 들었던 것이다.
반면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에셀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기사들의 수준도 수준이지만, 무엇보다 저 푸르게 빛나는 무구들이 신경 쓰였다.
‘설마 저게 다 아티팩트?’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에 에셀은 검공을 노려보았다.
“정말 해보겠다는 거요?!”
“저희는 기사의 의무를 다할 뿐입니다.”
검공의 태연한 대꾸에 에셀이 주먹을 꽉 쥐었다.
최소 상급기사에 준하는 전투력을 갖춘 이단심문관들이, 기사 둘의 합공을 조금도 뚫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들 이상의 강자, 50명밖에 없는 수석심문관들 역시 완전히 고전하고 있었다.
“신성력으로 이 정도 힘이라니, 신기하군요.”
“신의 뜻은 위대하시다!”
꽈아아앙!
“위대하기만 할 뿐 강하지는 않나 보네요.”
대놓고 빈정거리고 있는 검공의 부관, 루이스는 새하얀 빛살 같은 신성력을 포스블레이드처럼 휘두르는 수석심문관의 공격을 손쉽게 막아 냈다. 기존 에스페란자 출신의 수석기사들 역시 둘씩 짝을 지어 그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포스블레이드만큼 살상력은 높지 않고 범용성만 큰 홀리웨폰은 오랜 전쟁과 훈련으로 단련되고, 아티팩트로 강화되기까지 한 상급기사들의 방벽을 뚫지 못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에셀은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오랜 세월 산전수전을 겪어 온 인물. 비록 조사단의 장으로 파견된 것이 그의 무력이나 인품이 아닌 정치력을 감안한 것이기는 해도, 하나의 기사단이 이리 강력한 무력을 갖추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런 작은 왕국의 기사단이 대체 어떻게?’
에스페란자 기사단이 아닌, 맥라인 왕국 2군단의 정예들.
그 차이를 에셀은 알 수가 없었다. 맥라인 왕국의 변화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후회하게 될 거요, 검공.”
“그럴 리가요.”
뿌드득.
“부탁하네, 형제들. 진정한 신의 뜻을 보여 주시게.”
끄덕.
여태 에셀의 뒤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던 사제 다섯 명이 일제히 앞으로 나섰다. 이내 그들에게서 상서로운 빛이 뿜어져 나와 주변으로 퍼졌다.
“신의 뜻으로!!”
한 사람인 듯 외치는 그들의 고함과 함께, 줄곧 고전하던 이단심문관들이 일시에 기사들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다섯 사제 또한 전신을 새하얗게 백열시키며 쏜살같이 전장을 향해 튀어 나갔다.
에셀은 그 순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이단심문관들 중에서도 주교급에 달하는 신성력을 갖춘 ‘대행자’들의 힘은 최상급기사 이상이었다.
그들의 세인트 오러는 그 자체만으로 최상급기사의 포스블레이드도 갈라 버리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처럼 다른 전투 사제들의 전투력을 증폭시켜 주기까지 했다. 단체 전투에서는 초인 못지않은 위력을 발휘하는 전술병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수법입니다.”
푸확!
조소 어린 목소리와 함께 ‘팔들’이 솟구치자, 장내를 매우던 새하얀 빛살들이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으윽.”
비명은커녕 기합도 잘 내지 않던 이단심문관들, 그 대표라 할 수 있는 대행자들이 미처 삼키지 못한 신음과 함께 물러서고 있었다.
거의 동시에 잘려 나간 팔들. 그 상처에서부터 스며드는 이질적인 오러가 그들의 신성력까지 흐트러뜨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모습은 당사자들보다 지켜보던 이에게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이럴 수가!”
오러유저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행자들은 그런 오러유저를 상대할 수 있게 키워진 이들. 고작 초인 한 명에게 이렇게 쉽게 무너져서는 안 되는 전력이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눈앞의 오러유저가, 알려진 정보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
– 조사단에게 굳이 잘 보일 필요 없습니다. 이미 작정을 하고 온 자들이니 최대한 방해해 주시고, 그다음에…….
제자이자 군주의 말을 떠올린 검공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어쩌시렵니까, 추기경 예하. 정말 여기서 끝장을 보시겠습니까?”
이 미친 새끼들이!?
에셀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