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71)
271화이자, 아니, 이놈들은 미쳤다.
감히 변방의 작은 왕국 따위가 신전의 행사를 대놓고 막아서?
“신의 뜻에 거역하고도 맥라인 왕국이 무사할 줄 아느냐!?”
에셀의 협박은 분노에 기반한 것이었지만, 아예 없는 사실은 아니었다.
그 아레스 제국조차 신전과의 공식적인 대립은 조심하는데 고작 이 왕국이?
하지만 그 협박을 듣고도 검공은 태연했다.
“신의 뜻이 아니라 신전의 뜻이겠지요. 저자들의 신성력 정도면 자기 팔을 붙이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을 텐데요.”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에셀은 고함을 치던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느새 전투도 중단되어 있었다.
감정이 없는 것 같던 이단심문관들은 자신들의 지휘부에 발생한 이변을 인식하고는 전투를 멈춘 채 한곳으로 모여들었고, 맥라인의 기사들은 굳이 그들을 막지 않았다.
“뭐, 아직 죽은 사람도 없으니 지금은 수습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정말 제정신인가? 나라가 망하는 꼴을 보게 해 줘야 정신을 차릴……!”
“안타깝게도 이 나라가 망하든 말든 추기경께서는 보지 못하실 것 같군요.”
언제 다가왔을까.
이십여 미터는 떨어져 있던 검공이 어느새 바로 옆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속삭인 순간, 에셀의 혀는 의지와 상관없이 멈춰 버렸다.
“아, 추기경쯤 되면 잘린 목도 다시 붙이실 수 있는 겁니까?”
귓가에 깔리는 낮은 목소리.
그 목소리에 실린 진득한 살기가 전신을 감싸자 에셀의 주름진 얼굴 위로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정말 목에 검을 겨눈 것은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비정상적인 모습이었다.
“추기경 예하!”
“각하!”
“어딜 감히!”
팔이 잘린 대행자들이 다시금 온몸에서 찬란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머, 멈춰라!”
갑작스러운 에셀의 고함에 폭풍 같던 기세들이 한순간에 봄바람처럼 사그라들었다.
“오, 오해가 있었던 듯하다. 무기를 거둬라!”
추기경이라는 거창한 지위가 무색하게, 에셀은 상급사제 이상의 신성력도, 기사급의 전투력도 갖추지 못했다. 오러유저가 대놓고 발휘한 기세를 견디기에는 정신도 몸도 따라 주지 못하는 것이다.
“추기경 예하! 협박에 굴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신의 뜻은 꺾이지 않는다!”
줄곧 무표정하던 이단심문관들이 한껏 달아오른 얼굴로 여기저기서 고함을 질러 댔다.
당장이라도 대행자들을 필두로 전투를 재개하려는 듯 하나둘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하자, 에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비, 빌어먹을.’
그라고 어찌 이 순간이 수치스럽지 않겠는가.
하지만 교리를 깊게 이해하고 신을 받아들임으로써 어린 나이에 상급사제에 올랐던 신전의 유망주는 이 자리에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수십 년의 세월에 걸쳐서 타락한, 이제는 신보다 자신이 소중한 소인배뿐이었다.
‘일단 내가 살고 봐야지.’
그리고 그 소인배는, 그를 이 자리에 있게 만든 연기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했다.
“……신심은 협박에 굴하지 않는다. 이 지역은 일리아 자매가 그 금기를 허락한 지역. 우리가 성급했다.”
“하오나 예하! 그 일리아 주교는 현재 종교심문으로 송환 중…….”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것이 신전의 공식 입장이다. 내가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
이단심문관들이 일제히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며, 맥라인의 기사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 미친 새끼들.
추기경이 던지는 말들은 누가 봐도 그저 살기 위한 발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모두가 그 헛소리를 납득한 듯 일제히 무기를 집어넣고 있으니.
‘광신자들과는 상종도 말라더니.’
이 상황을 만든 검공조차 황당함에 헛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추기경 예하.”
검공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이자 에셀은 눈을 기이하게 번득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흐……. 흐흐. 이 수치는 기억해 두겠소.”
그 말에도 빙긋 웃고 마는 것이 더욱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나라의 명운을 손에 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이단심문관의 수장을 무력으로 협박하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는.
‘미친놈들. 반드시 피눈물을 흘리게 해 주마.’
에셀은 그렇게 가슴에 원한을 새겼다.
그러나 그와 조사단의 수난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하하하. 저기 조사단에서 사슴피를 마시는 행위에 대해 이단 혐의가 없다고 판정을 내렸지요.”
“아 정말입니까?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기사들은 라프탄 성으로 가는 내내, 들르는 마을마다 주민들을 만나 그리 떠들고 다녔다.
작정하고 여론을 조작하는 것이다.
아마도 저 짧은 대화들은 곧 발 없는 말을 타고 왕국 전역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그냥 판단을 미룬 것뿐인데?’
이단심문관들로서는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들의 수장이 침묵하고 있었기에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한편 그들의 수장은 품속을 더듬으며 내심 이를 갈고 있었다.
‘너희들이 웃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 한 가지 생각만을 떠올리며 에셀은 기사들의 행태를 애써 외면했다.
히이이잉!
“이단심문관이 방문했다는 소식을 알려라.”
라프탄의 성문에서 당당히 그 말을 외칠 때만 해도.
“아이고, 추기경 예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주가 날 듯이 뛰쳐나와 고개를 숙일 때만 해도.
에셀은 곧 이 수모를 갚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는 오연한 얼굴로 영주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고, 귀빈용 처소로 안내되자마자 문을 쾅 닫아 버리고는 품속에서 새하얀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그가 믿고 있던 구원자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상사라고 볼 수 있는 교황은 그의 절절한 상소를 듣더니 오히려 표정을 굳혔다.
[조사단에 대한 왕국 내의 반응이 좋지 않다……. 그 당연한 말을 하려고 나를 불러낸 건가, 에셀.]“그, 그 정도가 아닙니다! 무력을 동원해서 이단심판을 막아서기까지 했습니다, 성하!”
[오, 그래서? 사제들 중 누가 죽었나?]“그런 것은 아니지만…… 크게 다친 이들이 다수 있습……!”
에셀은 잘린 팔을 다시 붙였음에도 오러의 잔재를 떨쳐 내지 못해 비틀거리던 대행자들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호소했다.
[죽은 자도 없다. 하……. 에셀 추기경, 그대는 자꾸 나를 실망시키는군.]자신이 들은 말이 진정 교황이란 자의 입에서 나온 것인가.
일순 멍해진 에셀이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자, 교황이 눈을 번뜩이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에셀. 자네 설마 이단에 대한 물증을 확보하는 게 임무의 전부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예? 제, 제가 전달받은 명령은 그게 전부…….”
[하……. 한심한 노릇이군. 십여 년간 기름기로 배를 채우게 놔둔 게 문제였나. 독사가 독이 다 빠져 버렸어.]날 선 타박과 함께 더욱 차가워지는 교황의 눈빛을 본 에셀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성하. 하, 하교하여 주십시오. 우둔한 저를 깨우쳐 주십시오!”
쿵. 쿵.
에셀이 연신 바닥에 머리를 찧어 댔지만, 교황의 목소리는 여전히 서늘했다.
[자네의 임무는 내가, 신전이 맥라인 왕국에 확실하게 관여할 수 있을 명분을 가져오는 거다.]“……예? 그 말씀은…….”
[이단의 증거를 찾아도 되지만, 그게 정 힘들다면 파견된 사제 중 일부가 ‘크게’ 잘못되는 것도 좋은 명분이 되겠지.]싸늘하다 못해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은 목소리를 끝으로 통신이 끊겼고, 에셀은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모든 사제는 흩어져서 이단의 증거를 찾아라! 절대 타협하지 마라! ‘목숨’을 걸고서라도!”
에셀의 고함에 이단심문관들이 라프탄 영지 전체로 흩어졌다.
그런 그들의 뒤로, 수많은 기사들이 따라붙었다.
세상만사가 그렇듯이.
기준이란 건 그것을 적용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곤 했다. 그리고 상대가 그 기준을 자세히 모른다면, 그 자체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저것은 무엇이냐?”
“그, 그게 마을 조상들의 영령을 기리는 뜻에서…….”
“우상 숭배라. 이단이군.”
이단심문관이 단언하며 철퇴를 꺼내 들자, 말을 받아 주던 마을 주민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 순간.
챙!
“거기까지. 더 움직이시면 안위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사제님.”
“이단 앞에 타협은 없다!”
사슴 피 사건은 벌써 잊은 듯, 이단심문관 루퍼는 건틀릿으로 검을 쳐 내며 철퇴를 휘둘렀다.
‘신의 이름으로.’
그는 이단을 척결하기 위해서라면 순교도 각오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쾅!
뻐어억.
“쉬라고, 정신 나간 광신도 놈아.”
눈가에 경멸을 감추지 못한 기사들은 신심으로 불타오르는 이단심문관을 손쉽게 기절시켰다.
라프탄 영지에 도착한 이후 4군단의 기사들까지 합류하며, 전력의 차이가 더욱 심해진 상황이었다.
“절대 죽이지 마라!”
“기절만 시켜!”
어느새 라프탄 영지 곳곳에서는 기절한 이단심문관들을 하나둘 내성으로 운반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제들의 열정이 과하더군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손을 쓸 수밖에 없었답니다.”
어처구니없는 검공의 변명에 에셀이 구겨진 얼굴로 되물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 그대의 뜻인지, 아니면 왕의 뜻인지 알고 싶소이다.”
검공과 기사단의 태도는 이미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것이었다.
야산에서의 일이야 그렇다 쳐도 다수의 양민들이 보는 와중에도 신전과 적대하다니, 대체 무슨 속셈인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왕국민을 보호하는 것뿐입니다.”
모호한 미소로 답하는 검공의 태도는 에셀의 속을 뒤집기에 충분했다.
‘빌어먹을, 이제 어쩐다.’
에셀의 고민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갔다.
* * * 이단심문관이 왕국에 들어왔다는 소문은 천천히 퍼져 나갔다.
9대신의 신앙은 대륙의 정서를 지배하는 기본 사상이었고, 그것을 위반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심각한 사안이었기에 호사가들도 말을 아낀 것이다.
하지만 조사단이 라프탄 영지로 향하고, 검공과 2군단의 정예들이 그 뒤를 따르는 광경이 보이자 소문은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다만, 왕실에서 우려했던 것처럼 그리 격한 반응은 없었다.
“큰일 나는 거 아냐?”
“에이, 우리 폐하가 어떤 분이신데.”
“이단심문이랑 폐하가 무슨 상관인데?”
“무슨 상관이긴! 역병도 이겨 내고, 임하신 곳에 풍년도 들고. 신께 선택받은 영웅이 우리 폐하시잖아.”
“아…… 듣고 보니 그렇네.”
“우리 폐하가 이단이라고 한다면, 그 이단이라고 하는 놈들이 이단이겠지.”
“하긴 신전의 사제놈들, 살은 뒤룩뒤룩 쪄서 돈만 밝히고……. 역겨운 놈들이지.”
그간 로건이 벌인 일들의 결과와 어려운 민심을 외면해 왔던 신전의 타락이 빚어 낸 예상외의 여론이었다.
거기다.
이단심문관들이 라프탄 영지에 ‘혐의 없음’ 판정을 내렸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단심문관들의 흉악한 행태와는 전혀 다른 판결이 곧 소문의 물살에 합류했고, 그것은 곧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반향을 낳았다.
우리 폐하께선 그 무서운 이단심문관들도 인정한 신이 내린 영웅이다!
“하…… 이거 재밌네. 일이 이렇게 되나.”
로건은 지나치게 긍정적인 여론에 헛웃음을 지었다.
물론 마냥 웃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나라의 운명을 건 도박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당장 여론이 좋다고 해서 낙관적으로만 생각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중했다.
그 마음을 아는 드웨인 역시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검공께서 잘해 주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생각보다는 잘 참고 계시네.”
“예? 참고 계신다고요?”
“그래. 스승님이 그렇게까지 화를 내시는 것은 처음 봤으니까.”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겠죠?”
“분별이 있으신 분이야. 계획에 문제가 될 만한 소지는 만들지 않으실 거야.”
로건의 단언에도 드웨인은 불안감을 지우지 못했다.
“그런데 폐하. 정말 그 계획대로 진행할 생각이십니까?”
“왜 그래 이제 와서? 다 동의한 일이었잖아.”
“그게, 전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위험한 일 같아서 말입니다. 하나라도 잘못됐다가는 왕국이 박살 날 수도 있습니다.”
“조사단의 뜻대로 하게 내버려 둬도 엉망이 되는 건 마찬가지야. 어느 쪽이건 나락으로 이어진다면, 도박이라도 해 봐야지.”
로건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드웨인의 염려를 일축했다.
스텔라 같은 아이들의 일이 그렇게 심각한 건지, 아니면 신전이 다른 속셈이 있는 건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중요한 시기야. 이 시기에 신전이 나라를 흔들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잘못되면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망할 수도 있다구요…….”
“어쨌거나 결국 망하는 건 마찬가지야.”
“아으…….”
드웨인은 답답한지 머리를 쥐어뜯었지만, 로건의 마음은 굳건했다.
‘신전이 예상치 못한 태클을 걸어 온다면, 우리는 신전이 상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대응한다.’
모든 것은 결국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로건의 붉은 눈동자에 불꽃이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