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73)
273화두 달 전, 신전의 일방적인 통보가 있은 지 며칠 되지 않던 날.
왕성에서는 잠깐 소란이 일었다.
“무슨 일인가?”
“폐, 폐하. 그게…….”
무려 국왕 직통 수정구로 연결이 된 영문 모를 좌표.
어떤 수단을 썼는지도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통신실 관리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다.
결국 로건이 직접 나선 뒤에야 통신구 속 인물은 얼굴을 드러냈고, 이내 밝혀진 그의 정체는 그야말로 모두의 예상 밖이었다.
[불과 음식의 신, 아니마 님의 종. 오스틴 프루이트요.]사제들이 흔히 하는 자기소개였지만, 그 이름의 무게가 달랐다.
세상에 단 9명밖에 없는 추기경 중 하나의 이름.
그에 로건은 조금 굳은 안색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신전의 통보를 받은 상황입니다. 공식 통보 외에 다른 할 말이 있으신 겁니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정말 의외였다.
[신전의 모든 이가 교황의 결정을 추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맥라인을 돕기 위해 독단적으로 연락을 드렸습니다.]물론 그런 말을 들었다 한들 바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씀이신지?”
[부패한 교단, 민중과 멀어진 사제들의 자리를 다시 원래대로 돌리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린 겁니다.]“죄송하지만, 쉽게 믿을 수가 없는 말이로군요.”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여 폐하께서 저에 대한 신뢰를 쌓으실 수 있도록, 정보 몇 가지를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정보요?”
[지금의 교황은 절대 하나의 목적만으로 신전을 움직이는 자가 아닙니다. 이단심문관의 파견. 그 안에 담긴 목적 중 몇 가지나 인식하고 있으십니까, 폐하?]“허……?”
그렇게 이어진 오스틴 추기경의 말은 매우 흥미로웠다.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단 얘기는 이미 수년 전부터 나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의 뜻을 헤아리기 위한 조심스러운 조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대다수 양식 있는 사제들의 의견이었습니다.]적당한 표현을 고르려는 듯 잠시 입을 다물었던 오스틴이 이내 신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신이 버린 땅이라니,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9대신의 절대성을 훼손하는 신성 모독이라고 보는 게 원래 교리로는 맞습니다.]“교황이 교리를 곡해했다? 그럴 이유가 있습니까?”
[교황은 신전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 합니다. 50여 년간 외부에 투사한 적 없던 무력을 과시하고, 대륙 동부에까지 확고한 영향력을 쌓아 올리려는 것이 진짜 목적입니다. 다소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일을 급히 진행한 것이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로건의 귀에 뒷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우리 왕국을 발판으로 삼아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파견된 이단심문관의 수장은 에셀 파브룬이라는 자로, 본래대로라면 추기경은커녕 사제의 지위도 아까운 속물……]“그에 대한 사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추기경 예하.”
말을 끊었지만, 그 시점부터 로건은 이 오스틴 추기경에게 무척이나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에셀 파브룬에 대해 말하며 잔뜩 흥분하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신뢰가 가기 시작한 것이다.
[흠, 흠. 그렇습니까. 아무튼, 그자는 어떤 핑계를 대서건 그들을 이단으로 몰고 가려 할 것입니다.]“원래 해야 했을 조사를 더욱 크게 벌임으로써 다른 목적까지 달성하겠다……. 뭐, 제가 당하는 입장이 아니라면 좋은 수긴 하군요.”
신전과의 전면전을 염두에 둬야 하나.
절로 떠오르는 암울한 생각에 로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신전의 무력 부대를 전부 모은다면, 거의 제국 전체 전력의 1/3에 달한다는 것이 대다수 지자들의 의견이었다. 그 말인즉 동부 8군단이나 서부 7군단, 혹은 황실 중앙군과도 단독으로 맞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신전과 전면전을 치르게 된다면, 설령 이긴다 해도 제국 전쟁을 대비할 여력은 없어지게 될 터였다.
즉.
나라가 망한다.
“흐으, 어쩐지 일이 이상하리만치 잘 풀린다 싶더라니. 그러면 그렇지.”
속이 부글부글 끓고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로건은 이내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다.
회귀한 이후, 뭐 하나 쉽게 넘어간 적이 없었다.
이런 일로 좌절하기에는 지금껏 이뤄 온 게 너무 많았다.
“그래서 추기경께서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으십니까?”
[예?]“교황의 목적을 알려 주신 것이 도움의 전부라면, 감사합니다만 그리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군요. 저로서는 추기경님의 짐작이 틀릴 경우도 대비해야 하니까요.”
[아, 물론 그러시겠지요. 다행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추기경의 확언에 로건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듣고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교황의 행사에는 또 하나의 작은 목적도 있습니다. 바로 일리아 주교죠.]“예?”
[일리아 주교. 금기를 범했다는 말로 송환된 그녀가 성흔을 받았다는 소문이 사제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습니다.]“성흔이라 하시면……?”
[신의 뜻이 이 땅에 임하신 증거지요. 신의 상징이 신체에 새겨지며 신성력이 폭증하게 되는 축복, 그것이 성흔입니다. 보통 사람의 눈에도 보이는 은은한 후광이 그 증표지요.]그에 로건은 라프탄 영지에서 일리아 주교가 보였던 변화를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신의 상징이 뭔지는 몰라도, 확실히 후광은…….’
[일리아 주교가 정말 성녀로 판정이 난다면, 자동으로 추기경의 지위를 얻게 됩니다. 아마 교황은 금기를 범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압박하다가 구해 준 뒤, 충성을 받아 낼 생각일 겁니다.]“예?”
[가뜩이나 타락한 신전과 무고한 사제에 대한 성토 때문에 역대 최악의 교황이라 욕을 먹고 있으니까요. 송환된 주교를 성녀로 거둔다면 여론을 무마할 수 있을 테지요.]“아……!”
[물론 성흔이 없다면 그대로 종교재판에 회부되겠지만 말입니다.]“……성흔은 몰라도 후광은 제가 확인했습니다.”
로건으로선 그게 그렇게까지 큰 의미인지 몰랐지만, 그 말을 들은 추기경의 얼굴은 단번에 확 밝아졌다.
[정말이십니까!? 으하하하하. 이거 불안감이 한결 가시는군요.]그 웃음은 로건의 의문을 한층 키울 뿐이었다.
“그런데 추기경 예하께서 말씀하신 도움과 일리아 주교가 무슨 상관입니까?”
[그녀가 정말 성녀로 밝혀지면, 저는 그녀를 중심으로 신전의 개혁을 시도할 생각입니다. 그간 교황과 그 패거리가 저지른 부정과 착취, 범죄의 기록들을 수집해 놓았지요. 그 자료를 바탕으로 성녀와 저를 비롯한 다수의 고위 사제들이 교황의 탄핵을 주장하면, 맥라인 왕국을 노린 교황의 무리수까지 문제가 될 겁니다.]로건에겐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 같은 제안이었다.
다만.
“……교황이 그리 쉽게 물러나겠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추기경들 대다수가 교황의 심복이라던데요.”
[완벽한 증거들이 있고, 성녀와 다수 고위 사제들의 지지도 있습니다. 양식이 있는 사제들은 전부 저희를 따르게 될 겁니다.]그 제안을 한 열정적인 추기경의 머릿속에 꽃밭이 펼쳐져 있는 것 같다는 게 문제였다.
‘그 양식 있는 사제들을 거의 못 봤는데 말이야.’
하지만 가능성은 보였다. 신전 내부의 정치적 충돌만으로도 왕국의 위기는 상당히 극복할 수 있을 듯했다.
거기에.
‘탄핵, 탄핵이라. 왜 이렇게 익숙하지? 전생에 비슷한 일이……, 아!’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환해지며, 전생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이 상황에 확실히 도움이 될 만한 정보.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테니 좀 더 수를 동원하면…….
“이거 잘하면, 저희도 외부에서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로건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예?]머릿속이 꽃밭인 동반자는 그 나름의 쓸모가 있기 마련이다. 적어도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포기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 현실의 어려움은 자신 같은 조력자가 치워 주면 될 일이었다.
‘혹여나 이 말이 거짓이라도 내가 손해 볼 일은 없다.’
로건은 살벌한 웃음을 지으며 오스틴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난 현재, 로건은 오스틴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단 조사단은 완전히 제 통제하에 있습니다. 이제 그쪽에서 약속하신 것을 보여 주실 때입니다.”
[……모든 것은 일리아 주교의 성흔에 대한 소문이 사실일 경우에만 성립합니다, 폐하.]로건이 빙긋 웃으며 말을 꺼냈지만, 오스틴 추기경은 왜인지 약한 모습을 보였다. 막상 시기가 다가오자 마음이 불안해진 듯했다.
로건은 더욱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를 다독였다.
“제 눈으로 본 사실입니다. 걱정 붙들어 매시지요, 추기경 예하.”
“아, 그러시면 곤란합니다. 미리 사람을 시켜 말을 전해 놨으니, 종교심문 직전에나 접촉해 주세요. 추기경이 이단을 직접 맞이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 아닙니까.”
[그, 그렇군요. 하하. 제가 긴장했나 봅니다. 그 당연한 사실을…….]그 지위나 나이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순진한 이 노사제가 새삼 걱정스러웠지만.
‘뭐,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지.’
오스틴 일파가 벌이고자 하는 일이 흐지부지 끝나 버리지 않도록, 로건은 교황의 탄핵이라는 위험한 불씨를 거대한 산불로 키울 수단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빅토르가 일리아에게 직접 확인했다.
자신이 본 후광이 정말 성흔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일이 어떻게 틀어지건 간에 일리아 주교는 중앙신전의 중심부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물론, 교황의 편이냐 아니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소란을 최대한 크게 만들면.’
신전은 더 이상 맥라인에 신경 쓸 여력 따윈 없을 것이다.
“거사를 일으킬 날짜가 정해지면 제게 다시 통신을 주십시오. 저희도 그에 맞추어 돕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한데…… 맥라인에서 어찌 저희를 도우신다는 건지……?]“때가 되면 알게 되실 겁니다.”
[아하하하. 든든하군요. 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날짜가 정해지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글쎄요. 과연 그걸 좋아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로건의 웃음을 어찌 받아들였는지, 오스틴은 한결 상기된 얼굴로 통신을 끊었다.
이내 불이 꺼진 통신구를 보며, 로건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다른 변수는 없어야 할 텐데.”
한고비를 넘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또다시 고난이 닥쳐 온다.
미래를 바꾼 대가라고 하기에는 매번 영혼이 쥐어짜이는 듯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내가 부족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손에 흐름이 바뀌어 버린 미래에서는 전생에선 없었던 일들이 자꾸만 튀어나왔다. 역병은 그렇다 치고, 스텔라 같은 아이들이 신전의 침공 핑계가 될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다.
‘여기서 신전에 발목을 잡힐 수는 없어.’
진짜 고비가 몇 년 남지 않았다.
최소한의 손해로 이 변수를 끝내고, 최대한의 전력을 만들어 내야 했다. 적어도 제국의 동부 8군단은 확실히 막아 낼 수 있도록.
희망이 손에 잡힐 듯 보였었는데 이제 와서 이런 변수에 무너질 수는 없었다.
‘어떤 사건이건 극복해 왔다. 지금이라고 다를 것은 없어!’
회귀한 직후부터 가문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많은 사건 끝에 그 지켜야 할 대상이 나라로까지 커졌을 뿐,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다른 길은 없다.
로건은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지며 통신실을 나섰다.
“같은 좌표로 통신이 오면 그 즉시 내게 알리도록. 그리고 데미안 나달에게 즉시 입궁하라 일러라.”
“예, 폐하.”
오스틴 추기경의 준비가 끝나는 순간, 이쪽에서도 크게 한방을 터트릴 것이다.
머릿속에 이상만 가득한 추기경의 계획도 현실화할 수 있을 정도의 한방을.
“이제는 때만 기다리면 된다.”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