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78)
278화
“정말 확실한 정보겠지요, 성녀님? 이미 공표를 하긴 했습니다만…….”
“제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추기경 예하. 아마 교황도 그것은 예상 못 했을 겁니다.”
일리아는 이미 교황에게 존대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 말투와 싸늘한 표정에 담긴 진심을 읽은 오스틴은 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성흔을 속일 수가 있다니, 무섭습니다. 이제는 정말 그자가 무섭군요.”
지하 감옥에 있을 때만 해도 교황을 향해 예를 갖추던 오스틴이 이제는 그 예의를 거뒀다. 그와 뜻을 함께하기로 한 동지로서, 그러한 변화는 분명 기꺼운 일이었음에도 일리아는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노사제의 표정에서 절절한 절망이 묻어 나오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성흔 위장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가 세상을 너무 쉽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잠깐 엇나갔을지언정, 노력하면 모든 것이 순리대로 풀릴 줄 알았는데…….”
일리아는 그런 추기경을 묵묵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성도의 백성들 대다수가 알 정도로 교리를 착실히 믿고 따르며, 평생 선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노사제.
그라고 욕망이 없었을까.
그라고 흔들리지 않았을까.
모든 것을 감내하며 70 평생을 신실하게 살아온 그 삶을 어느 누가 쉽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그 순수함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탄핵을 하면, 분별 있는 사제들은 모두 따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깊은 좌절감만큼 짙은 한숨이 이어졌다.
“모두가 같은 신의 종이거늘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요. 현실의 권력에 묶여 신의 뜻을 저버리는 일 아닙니까.”
하소연하듯 쏟아 내는 말은 처음 탄핵을 제기했을 때의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성도의 수련사제들이나 일반 사제들에게는 다수 지지를 받았지만, 정작 투표권을 가진 주교급 이상의 사제 중에선 그에게 호응한 이가 예상보다 훨씬 적었던 것이다.
“모두가 신전이 타락했다 말할 때도 희망을 얘기했던 제가 부끄럽습니다. 이미 썩을 대로 썩어 있었는데…….”
좌절한 노사제의 푸른 눈에 깊은 분노가 들끓었다.
평생을 올곧게 지켜 온 마음이 깊은 좌절 앞에서 변질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일리아는 그를 다독였다.
“지금은 또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연이은 흉한 소문에 주교들이 마음을 바꿨다고 연락해 오고 있습니다. 특히나 가짜 성흔의 문제만 확인된다면…….”
하지만 오스틴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겠지요, 성녀님. 더는 배려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저는 분명 부족하지만, 이 상황에서까지 현실을 부정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추기경 예하…….”
안타까운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오스틴은 더욱 격앙된 어조로 외쳤다.
“신을 모독해서가 아니겠지요. 그저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이 분한 겁니다. 신의 뜻보다 인세의 권력이 더 중요한 겁니다, 그들은……!”
터질 듯 달아오른 얼굴.
그 모습을 보며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었던 일리아가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예하! 진정하십시오. 그래도 일단은 그 가장 큰 부패의 근원을 잘라 낼 기회가 오지 않았습니까. 추기경께서 직접 만드신 기회입니다. 바꿀 수 있습니다. 바꿀 수 있어요! 우리가!”
그 말이 효과가 있었을까.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오스틴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잠시 숨을 골랐다.
“……하. 예, 그렇지요. 바꿔야 합니다. 바꿔야 해요. 이대로는 안 됩니다. 신들께서 진노하실 겁니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러고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예?”
“그 ‘버림받은 자’들이 어쩌면 그 징조일 수도 있지요.”
“……예?”
당혹스럽게 튄 주제에 일리아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신들께 세상이 완전히 버림받기 전에, 신전부터 깨끗이 만들어야 합니다.”
오스틴이 이를 꽉 깨물며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신전을 깨끗하게. 그래. 지금은…….’
말하는 논지가 찜찜하기는 했지만, 그 방향성은 그녀 역시 바라는바.
“예. 반드시.”
일리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늙은 추기경의 기를 살려 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탄핵 심판일의 아침이 밝아 왔다.
* * * 성국의 수장인 교황의 취임식 같은 큰 축제 때에나 개방되던 콜로세움이, 오늘은 그다지 좋지 않은 주제로 그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 화제성은 당연히 역대 최고였다. 신전의 수천 년 역사에도 기록된 적이 몇 번 없는 교황의 탄핵이라는 사건을 두고, 콜로세움엔 그 어느 때 보다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어떻게 될까?”
“난들 알겠어?”
“그래도 그 소문이 진실이면…….”
“에이, 설마.”
“아무튼 오늘 성녀와 추기경이든 아니면 교황 성하든, 어느 한쪽은 완전히…….”
와글와글.
사제들은 물론 성도의 주민들 역시 엄청나게 몰려든 결과, 거대한 콜로세움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계단식 좌석 30개 층이 모조리 채워졌음에도 사람들이 넘쳐난 탓에, 미처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은 좌석 난간이나 출구에 위태위태하게 매달려 있기도 했다.
“미, 밀지 마!”
“나도 힘들다고!”
“좀! 뒤로 좀 가 봐!”
“악! 누구야! 내 뒤통수 깐 놈이!?”
“거기 조용!”
“질서를 지키시오!”
배치된 성기사들이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이미 사고가 나도 여러 번 났을 만큼 과한 인파였다.
특히나 탄핵 심판의 선거권을 가진 주교들과 추기경들이 자리한 재판정에 가까운 자리는 시끄러운 것을 넘어 거의 난투가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세상을 속인 사기꾼의 목을 매달아라!”
“교황 성하를 모함하는 잡것들을 잡아 죽여라!”
“광신도 놈들은 꺼져라!”
“뭐, 이 이단 새끼들이!?”
성기사들이 유난히 많이 배치된 자리에서 과격한 폭언들이 난무하기 시작한 순간.
– 심판 대상자! 율리오 움베르토 1세! 입장!
콜로세움을 떨어 울리는 고함과 함께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그와 동시에.
– 우와아아!
– 사기꾼을 처단해라!
– 교황 성하 만세!
대충 세어도 3만 명은 넘을 듯한 인구가 만들어 낸 소음이 콜로세움을 넘어 성도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모두 정숙하라! 성도의 운명을 가르는 심판을 시작하는 날이다!
다시 강렬한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나서야 콜로세움의 소란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목소리에 담긴 은은한 기세가 군중의 광기를 찍어누른 것이다.
재판정과 다소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은 대다수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지만, 앞쪽에 자리한 이들은 소란을 잠재운 당사자를 보며 눈을 빛냈다.
옅은 금발 머리에 갈색 눈을 가진, 다소 평범한 외양의 중년인이 재판정 위에서 기세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평범한 외모의 중년인은 성도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인이기도 했다.
신의 방패, 하먼 킬러브루.
성도의 경비와 공식적인 무력을 담당하는 성전기사단의 단장이자, 대륙 전체에 흩어져 있는 신전 소속 50만 병력의 통솔권자.
주교급 신성력을 갖춘 것도 모자라 오러까지 통달했다는 초인 중의 초인이 바로 그였다.
적어도 성도의 주민들은 그가 제국의 대륙제일검 트리스 혼스비를 넘어서는 대륙의 최강자라 생각하고 있었다.
– 저 사람이면 이런 위세도 충분히 가능하지.
그를 알아본 모든 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콜로세움의 안쪽, 철창이 열리며 초췌한 안색의 교황이 걸어 들어왔다.
아직은 죄수의 신분이 아니기에 족쇄와 수갑을 차지는 않았지만, 늘 입던 화려한 법복 대신 수련사제나 입을 법한 남루한 흰색 사제복을 거친 교황의 모습은 꽤 초췌했다.
“어쩌면 좋아. 우리 성하께서 저런…….”
“아이고, 이 무도한 놈들아. 차라리 나를 죽여라!”
“교황 성하!”
그 모습에 소수의 광신도들이 눈물을 글썽였지만, 대부분은 그저 흥미로운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성도 주민들의 신전에 대한 충성심이 대륙의 다른 곳보다 높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지방의 인식처럼 모두가 광신도인 것은 아니었다.
오늘 이곳에 모인 대다수에게 지금 교황의 모습은 그저 진귀한 구경거리에 불과했다.
그것도 일생에 다시 오지 않을 구경거리.
그리고 그들의 호기심은 이내 넘치도록 충족되었다.
“교황 율리오 움베르토 1세의 탄핵 심판을 시작한다!”
교황의 오른팔로 불리던 테너 레이니의 표정은 분명 좋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이 몸담은 파벌의 수장이 이런 처지에 놓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이어진 말에서 바로 드러났다.
“본래대로라면 오스틴 추기경이 제출한 범죄 사실에 대한 소명과 그 증거의 타당성을 먼저 따져야 함이 옳겠으나 그 이후 더욱 중대한 고발이 이어졌다. 그리고 본 추기경을 비롯한 심판진은 그것이 오늘의 심판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 판단한 터. 그것에 관한 사실 확인부터 하겠다.”
그 말에 콜로세움에 모인 모든 이가 숨을 죽인 채 집중하기 시작했다.
“교황 이전에 성자로 추대받은 율리오 움베르토 사제. 그대는 성흔을 보이고 다시 한번 신의 은총을 증명하라!”
테너의 말이 끝나자 교황이 초췌하고 서글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본능적으로 움찔한 순간, 교황의 고개는 그를 비롯한 추기경들이 모여 있는 자리를 지나 콜로세움에 모인 수만의 관객들에게로 향했다.
그 얼굴을 볼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자들은 교황의 얼굴에 떠오른 비통함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표정을 볼 수 없는 자들도 이어진 그의 목소리가 깊은 슬픔을 담고 있음은 느낄 수 있었다.
“나에 관한 터무니없는 소문이 화제가 되고 있다는 것은 안다. 칠십에 가까운 생애 대부분을 교단에 바친 내 삶이! 참으로 서글프고 애석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주먹을 불끈 쥔 교황의 노쇠한 음성이 이상하리만치 콜로세움의 곳곳으로 파고들었다.
이내 그 목소리의 여운이 사라진 순간.
“나는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성도의 앞에서, 내 생애와 이름을 걸고 결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왔음을 밝히겠다!”
교황은 그렇게 외치며 입고 있던 남루한 법복을 훌렁 벗어 던졌다.
그 안에 있던 초라한 속옷마저도.
그리고 그 반향은 아주 컸다.
단순히 교황의 알몸 퍼포먼스가 놀랍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하!”
“어찌 그렇게까지!”
“아이고! 이 이단 놈들 때문에 우리 성하가!”
일부 광신도들의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장내를 시끄럽게 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다른 사실에 주목했다.
교황의 오른 손목엔 황금빛 원, 즉 금과 상업의 신 아게론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성흔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은은히 퍼지고 있는 후광의 존재가 모두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지, 진짜다!”
“소문이 거짓이었어!”
“성자의 증거!”
“그럼 그렇지. 어떻게 교황이…….”
웅성거림이 번지기 시작하는 순간, 교황파 추기경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향했다.
그들과 다소 동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오스틴 추기경과 일리아에게로.
“이 대가를 어찌 치를 거요, 오스틴 추기경!”
“아무리 성녀라고는 하나 역시 연륜이 모자라. 교황 성하를 모독한 대가를 어찌 치를 것이오!”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 보시오!”
테너 레이니를 비롯한 교황파 추기경들은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로 두 사람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쏘았다.
그 비난의 목소리는 이내 콜로세움에 모인 수만의 사람들에게로 번져 나갔다.
“성녀가 거짓말을 했다고?”
“오스틴 추기경님이?”
“에이, 설마!”
“그래도 성흔이 진짜라잖아.”
웅성웅성.
“역시 저 연놈이 개수작을!”
“저놈들을 탄핵해라!”
“성녀는 무슨 성녀! 저년이야말로 가짜겠지!”
“끌어내라!!”
광신도들의 폭언과 함께 콜로세움이 점차 시장통처럼 변했다.
그리고 그 소란의 중심에서, 후광을 그대로 내비치고 있는 교황이 손을 들어 올렸다.
“비록 이런 부끄러운 꼴을 겪고 있으나 나는 오스틴 추기경과 성녀를 탓하고 싶지 않다! 그들 역시 그저 참람한 소문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라 믿을 뿐! 그러니 그들을 비난하려거든, 교단을 올바르게 이끌지 못한 나를 비난하라!”
교황이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자 재판정의 가장 높은 곳에 있던 테너 레이니 추기경이 황급히 달려와 교황이 벗어 던진 법복으로 그를 감쌌다.
그러고는 그의 앞에 마주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성하의 자비는 모두가 보았습니다. 이제 그만하십시오. 이 테너, 오늘만큼 성하를 따른 것이 감격스러운 날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들으란 듯이 크게 소리치는 목소리.
이내 교황의 왼팔, 샘 프리먼 역시 그 앞에 엎드리자 식겁한 다른 추기경들도 일제히 달려 나와 그들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했다.
“다시금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교단은 성하의 지도력이 필요합니다!”
“율리오 움베르토 1세 만세!”
이곳이 과연 교황의 탄핵 심판장인지, 아니면 칭송의 장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는 진풍경이었다.
광신의 열기가 활활 타오르는 구석에서 노사제가 무너지듯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직 진짜 죄에 대한 심문은 시작도 하지 않았거늘. 고작 이런 수작에…….”
그 절망 어린 목소리를 들은 일리아가 굳은 표정으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성전기사단장님께 추기경의 권한으로 요청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 말에 오스틴을 비롯한 추기경들의 시선이 일제히 일리아에게로 쏠렸다.
“아직도 감히!”
“성녀라는 신분이 모든 잘못을 감싸 줄 줄 아는가!”
“그대는 말을 조심하라!”
교황파 추기경들이 일제히 비난의 목소리를 쏟아 냈고.
“맞아! 닥쳐라!”
“이제 와서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가짜 성녀를 끌어내라!”
콜로세움 곳곳에서도 비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나 역시 내 직위를 걸고 요청하겠소, 하먼 단장. 성녀의 요청을 들어주시오.”
오스틴 추기경이 그대로 일리아의 주장을 지지하자 소란이 잠시 잦아들었다.
“오스틴 추기경께서 저렇게까지 말씀하신다는 건…….”
“그래도 저분은…….”
일리아는 성도의 주민들이 얼굴도 모르는 성녀였지만 오스틴의 경우는 달랐다.
신이 내린 성흔보다, 오스틴이라는 노사제가 살아온 삶에 대한 존경심이 당장이라도 폭동이 일어날 듯했던 분위기를 잠시 잠재운 것이다.
그러자 자연히 한 방향으로 시선이 쏠렸다.
하지만 하먼 킬러브루는 수만의 시선 속에서도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신전 내부의 행사에 성전기사단은 관여할 수 없소.”
오스틴 추기경 이상으로 올곧고 고지식하다고 알려진 그다운 대답이었다.
하지만 일리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교황은 저 성흔이 있는 오른팔에 투명한 팔찌를 장착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흔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이니, 단장님의 검으로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해 주실 것을 요청드립니다. 신전의 고위직이자, 이 상황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중립적인 입장의 단장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말엔 하먼의 눈동자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탄식하는 교황의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아아. 성녀에게 저런 불신을 심어 줬으니, 정말로 내 죄가 크구나.”
그 자조 섞인 한탄에 추기경들이 일제히 교황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디서 그런 참람한 소리를!”
“교황 성하께 얼마나 더 수치를 줄 셈인가!”
“그것은 우리가 허락할 수 없다!”
얼핏 광기까지 보이는 표정.
그 과한 반응에 하먼의 미간이 조금 좁혀졌다.
“단장님. 바라옵건대…….”
그리고 일리아의 말이 이어지려던 찰나.
번쩍.
하먼의 몸에서 시작된 상서로운 빛살이, 수십 미터의 거리를 격하고 추기경의 사이를 교묘하게 비집고 들어가 교황의 오른팔을 때렸다.
교황도, 그 앞을 가로막은 추기경들도, 하물며 요청한 당사자인 일리아도 예상치 못한 하먼의 한 수.
이 자리에 다른 오러유저가 있었다면 그 교묘하고 뛰어난 오러 컨트롤에 기겁했겠지만, 콜로세움에 모인 모든 이는 그런 하먼의 재주보다는 그 결과에 더욱 집중했다.
타아아앙!
사람의 팔이 아닌, 단단한 무언가와 부딪친 듯한 소리.
이내 교황의 안색이 확 변함과 동시에 그의 오른팔에 새겨져 있던 황금빛 원이 사라졌다.
성흔이 사라진 자리엔 성스러운 기운을 뿜어내며 새하얗게 빛나는 팔찌가 걸려 있었다.
사라진 성흔.
신성력을 풍기는 팔찌.
그 충격적인 광경이 드러난 순간, 콜로세움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교황이 집권 기간 내내 저지른 죄에 교단과 사제들, 성도들을 속인 사기 혐의까지 더해 다시 재판을 진행할 것을 요구합니다.”
일리아의 낭랑한 목소리가 침묵을 깨트렸다.
“저, 정말 사기라고?”
“교황이 우리를 속였다고!?”
“말도 안 돼!”
“그럼 저 팔찌는 뭐야!?”
광신도들이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멍하니 주저앉았다.
“끌어내라! 저 사기꾼놈을 끌어내!”
“저 사기꾼을 없애라!”
“맞아! 죽여!”
대신 평범하던 신앙인들이 광신도가 되어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 소란 속에서 일리아는 문득 로건의 말을 떠올렸다.
– 교황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성자의 자격 증명을 통과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티팩트, 혹은 성물은 아마도 위장 능력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 하지만 그 물건도 외부의 타격에는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아마도.
끝에 붙은 ‘아마도’라는 말이 불안하기는 했지만, 결국엔 모든 것이 들어맞았다.
‘대체 로건 폐하는 그걸 어찌 아셨을까.’
그날.
교황 율리오 움베르토 1세가 탄핵당하고, 신전의 모든 공식적인 대외 업무는 마비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