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79)
279화 [한동안은 교단 내부의 문제 수습으로 정신이 없을 듯합니다. 폐하의 도움에 보답하는 것은 그 이후에나 가능할 것 같군요.]
통신구 속 일리아의 웃음기 어린 얼굴에 로건 역시 미소로 답했다.
“보답은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일리아 성녀님.”
진심이었다.
이미 넘치도록 받았으니까.
[과한 존칭은 어렵습니다, 폐하. 전처럼 편히 대해 주십시오.]“아닙니다. 추기경의 지위에 계신 분을 하대할 수는 없지요. 제가 제국의 황제도 아니고 말입니다.”
신전의 교황은 황제와, 추기경은 왕과 동급으로 대우한다.
오랜 옛날, 교황이 사실상 제국에 굴복하며 만들어진 교칙이었지만, 9대신의 신앙이 절대적인 대륙에서 그것은 곧 법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교황도 끌어내린 판에 제국도…….’
로건의 내심은 전혀 달랐다.
[송구스럽습니다. 모두 폐하 덕에 가능했던 일인데.]“제가 성녀의 자격을 어찌 만들겠습니까. 일리아 님의 능력이지요.”
[아닙니다. 그래도 폐하의 은혜를 잊을 수는 없지요. 교단은 이제 바뀔 것이고, 신전도 예전의 모습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하하.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뭐 어쩔 수 없군요.”
[네?]“저는 주는 것을 마다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더구나 교황 후보로 꼽히시는 분께서 할 보답이라면 기대까지 되는군요.”
[아……. 하하, 네.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조금 부담스럽군요. 연륜이 부족한 제가 교황이 되어서는 곤란하지요. 오스틴 추기경님이나 다른 추기경들도 있으니까요.]그 말에 로건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추기경이요? 그들은 전 교황 일파 아니었습니까?”
[그게, 교황의 수작에 당했다며 자신들도 피해자라 주장하고 있어서……. 물론 수만의 성도들이 그들의 추태를 보았으니 아무리 추기경 내부 선출의 규정이 있다 해도 그들 중 누군가가 교황이 되기는 힘들 것입니다. 성도들의 여론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그렇겠지요.”
[다만 그로 인해 차기 교황 선출까지 시간이 다소 길어지는 것은 불가피해졌습니다.]흐음.
차기 교황 선출에 혼선이 더해진다.
일리아는 몰라도, 로건으로선 전혀 나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번만 해도 느닷없는 신전의 시비에 얼마나 식겁했던가.
로건은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군요. 아 참, 교황이 가지고 있던 그 물건은 대체 뭐였습니까?”
[예? 알고 계신 거 아니었나요?]“제가 그걸 어찌 알겠습니까?”
[……저로서는 그걸 모르신다는 게 더 놀라운데요.]“예?”
이건 또 무슨?
[교황이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부터 그 특징까지 다 알고 계셨잖아요.]아.
“……그냥 알고 있던 정보로 추측한 것뿐입니다.”
[교황의 측근도 몰랐던 그 정보를 아신 것부터가 신기할 따름입니다만…….]“운이 좋았던 거죠. 성흔을 흉내 낼 수 있는 물건이라는 것도 성녀님 덕분에 알게 된 것을요.”
[……저와 교단이 폐하의 그 운 덕을 톡톡히 보았군요.]“하하,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물건은 무엇이었습니까? 성흔을 흉내 낼 정도면 절대 평범한 물건은 아닐 텐데요.”
로건의 집요한 물음에는 이유가 있었다.
스스로 신성력을 뿜어내는 물건은 9대신의 성물이라 할 수 있는 9개의 신기들뿐이다. 그것은 교단이 성립한 이래 수천 년간 변하지 않은 진리였다.
전생에선 교황이 암습을 받아 그 물건이 드러났고, 그로 인해 교황이 몰락했다는 것밖에 몰랐다. 그 당시에야 교황의 흥망 따위엔 관심이 없어 흘려들었지만, 이제는 국제 정세에도 신경 써야 했다.
한데 교단의 형세를 완전히 바꿔 버린 물건이 나타났으니, 관심이 안 갈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대다수가 성물이라 생각했습니다. 테너 레이니 추기경 같은 경우는, 새로이 10번째 성물을 발견한 공을 생각하여 전 교황을 용서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쳤었지요.]“처음에는? 그럼 역시 성물이 아니라는 거군요.”
[예. 저 역시 순수한 신성력과 다른 느낌을 받았고, 오러와 신성력까지 최고 수준으로 다루시는 분이 비슷한 의견을 내셨습니다. 그래서 성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었습니다.]“오러와 신성력을 다요? 아! 신의 방패…….”
신의 방패, 하먼 킬러브루의 이름은 로건 역시 모를 수가 없었다.
[예. 저와 그분의 공통된 의견은 신이 내린 성물이 아니라 만들어진 가짜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황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그 사실은 더 확실해졌고요.]“교황이 출처를 그리 쉽게 말하던가요?”
자신의 인생이 걸린 문제인데?
그 합리적인 의문에 일리아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이내 입을 열었다.
[교단의 그…… 기술자들이 하루 만에 실토를 받아 냈습니다. 그런데 그 증언이 너무 터무니없는 터라…….]아. 없는 이단도 만들어 낸다는 교단의 고문 기술자들.
그래. 그들이라면 그럴 수 있지.
로건이 소문으로만 들었던 이들의 존재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짓는데, 일리아의 떨떠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도성자(魔道聖子)라는 듣도 보도 못한 이명의 소유자가 남긴 유물이라고……]찌이잉.
“윽!”
그 순간, 로건은 갑자기 밀려드는 극심한 통증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폐하?]마도성자(魔道聖子). 그 생소한 단어를 듣자마자 날카로운 이명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지는데, 문득 낯선 기억 하나가 그의 뇌리를 스쳤다.
– 부탁하네. 고대어에 해박한 사람이 지금은 자네밖에 없어.
– 여차하면 책은 태우더라도, 내용은 머릿속에 담아 재능 있는 이에게 전해야 해. 혹시 그조차 안 될 경우에는…….
그가 기억하던 전생의 마지막 순간에, 생소하지만 익숙한 기억이 덧칠해졌다.
– 최악의 경우 비전은 버려도 돼. 하지만 이 유물은 절대 바로스 황제의 손에 들어가서는 안 되네! 절대!
– 고대의 초월자, 마도성자 지브릭 카셀의 유물……. 이게 그 미친놈의 손에 들어가면 세상이 뒤집…….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지금보다 한참은 늙은 듯한 루이스 하이온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 성물은 어디에 있느냐?!
– 감히 제국의 보물을!
황급히 도망치던 늙은 자신이 품 안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물건도 떠올랐다.
– 그 성물만 있으면 의식이 완성된다. 얌전히 내놓아라!
– 지랄……. 크흐흐, 차라리 뒈지고 말지.
– 이 미친놈이……! 막아!
– 같이 죽자!
– 꽈아아아앙!
전생에 자신이 맞이했던 최후가 조금 더 명료하게 기억난 것이다. 영혼 깊은 곳, 뿌옇게 끼어 있던 안개가 상당수 걷힌 느낌이었다.
이내 고통도 점차 사라지며 머리가 한결 맑아진 듯했지만, 로건은 웃을 수 없었다.
[폐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어디 편찮…….]“마도 성자. 지브릭…… 카셀?”
[예?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아, 아닙니다. 아직은 확실하지 않아서……. 그보다 일리아 님, 혹시 그 물건이 작은 검이었습니까?”
[예? 아뇨. 팔찌였습니다.]“팔찌……. 아……!”
전생의 마지막 순간 보았던 거대한 마법진.
그 안에 산처럼 쌓여 있던 시체들과 그 시체의 제단 위에서 기이하게 빛나던 2개의 물건.
그중 하나가 팔찌였다.
“구형 고리 모양으로 새하얀 빛을 뿜어내는 팔찌……입니까?”
[예? 예. 역시 알고 계셨군요!]“……아. 예……, 뭐 그런 걸로 칩시다.”
고통이 사라져 머리가 개운해진 것도 잠시, 기억이 되살아난 반동인지 다시 급격한 피로가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누워서 쉬고 싶었지만, 아직 확인해야 할 게 남아 있었다.
“혹시 교황이 그 물건을 어디서 구했는지 말하던가요?”
[젊은 시절 아세리안의 암시장에서 우연히 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거짓은 아닌 듯한데…….]“하…….”
로건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새어 나왔다.
교단의 고문 기술자들이 토해 내게 만든 정보라면 진실일 확률이 높다. 거기다 구한 곳이 아세리안의 암시장이라면 출처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혹시나 했던 가능성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지브릭 카셀의 무덤은 이번 생에도 제국이 찾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어쩌면 그때의 그 의식이 자신을 과거로 돌려보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 수많은 인명을 제물로 갈아 넣은, 기억도 안 나는 복잡한 마법진에 관심을 가질 여유는 없었다.
고난 그 자체였던 전생만큼은 아니더라도, 현생 역시 힘들긴 마찬가지. 모든 것이 또 망쳐진다면 모를까, 다시금 험난한 삶을 반복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금 로건이 전생을 떠올리며 기대하는 건 따로 있었다.
‘그 검, 내가 성검이라 이름 붙였던 그 검을 찾을 수 있다면.’
평기사 수준에 불과했던 자신이 제국특수감찰부의 추적을 한 달 넘게 뿌리치고, 오히려 요지에 잠입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검.
그 검이 있다면 제국과의 싸움도 한결 쉬워질 듯했는데, 아무래도 당장은 그 기대를 버려야 할 것 같았다.
[저희도 그 사실을 가장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위장된 성력이라도 일반 사제급도 되지 않을 자에게 대주교 이상의 성력을 부여해 준 팔찌라니요. 비슷한 물건이 더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이어진 일리아의 말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마도성자의 유물. 만약에 다시 나타난다면 누구보다 먼저…….’
그 생각에 몰두한 채 다시금 떠오른 전생의 기억을 정리할 뿐이었다.
“그 팔찌, 소중히 관리하셔야 합니다, 일리아 님.”
[물론입니다, 폐하. 신기는 아니라 하나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인 만큼, 교단의 보물로 엄중히 다룰 예정입니다.]“예. 그러면 다행입니다.”
‘그 팔찌가 제국에 넘어가는 건 확실히 단속할 수 있겠지.’
어찌 되었건, 운명을 바꾸기 위한 준비는 아직까진 잘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비록 우연히 얻어걸린 행운일지라도.
* * *
“하. 교황이 정말 탄핵을 당했다고?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제국의 황도, 아세리안.
그 가장 중심부인 황궁 안, 2황자의 별궁 안에서 짜증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시비와 호위기사 등 듣고 있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이며 움직임을 멈추는데, 푸른 머리의 미남자 하나가 손짓하며 주변의 모든 이들을 내보냈다.
이내 방 안의 모든 이가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세상의 눈을 속이고, 성자급 신성력을 발휘하게 해 주는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신성력을 부여해 주는 아티팩트가 있다고? 그게 말이 돼? 차라리 신기가 하나 더 생겼다고 하지?”
2황자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지만, 레오스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교단에서 발표한 내용은 그렇습니다. 뭐, 진위 여부를 떠나 전하께서 불편해하시는 이유가 그런 아티팩트의 존재 때문은 아니지 않습니까? 여전히 맥라인 왕국이 멀쩡한 게 마음에 안 드시는 거겠지요.”
“……그래. 로건 맥라인, 그 운도 좋은 놈은 이번에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어. 그게 너무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이지. 벌써 몇 번째야?”
가슴에 무언가 얹힌 듯한 느낌.
그 불쾌한 느낌에 2황자의 표정은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그자에게 너무 집착하시는 게 아닐까요? 운이 좋다고 한들, 얼마나 가겠습니까. 일단 소왕국 연합에서의 일부터 확실히 마무리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아니야. 느낌이 너무 안 좋아. 이단 조사관 놈들이 몰살당한 거, 확실히 우리랑 관계없는 거겠지? 형님 쪽이라던가?”
“조사 결과, 우리 제국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맥라인 역시 그런 짓을 벌일 만한 전력 이동은 없었습니다. 대규모 병력은 물론이거니와 국왕이나 검공 등의 초인들 역시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음을 확인했습니다.”
“아니, 아니야. 분명히 그놈들 짓이야. 그렇게 특정하고 나서 증거를 조작하면, 교단이 다시 놈들을 공격하게 만들 수 있을까?”
그 말에 레오스의 안색이 처음으로 바뀌었다.
“전하. 전하께서는 원래 그렇게 직감에 의존해서 일을 벌이시는 분이 아니시지 않으셨습니까? 왜 유독 그자에겐 이리 민감하게 나오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그만 신경 꺼라. 하던 일이나 마저 하자.
그런 뜻에서 한 충언이었지만, 2황자 바로스 폰 아레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야. 요즘 들어서 거슬리는 느낌이 더 강해졌어.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다는 감이 강하게 온단 말이지. 알고 있겠지? 우리 황실에 흐르는 예언자의 피를.”
‘계획이 계속 어긋나서 생긴 집착일 뿐입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건국 황제의 예지 능력은 그의 후손들 중 그 누구에게도 이어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레오스는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진심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기록관인 그라고 해도 거기까지 선을 넘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그가 아무 말도 못 하는 순간.
“아무래도 폐하를 찾아뵈어야겠다.”
“예?”
“좀 무리수를 둬서라도 놈을 없애야겠어.”
2황자가 검은 눈동자를 살벌하게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