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80)
280화
“2황자, 바로스 반 아세르가 알현을 청합니다!”
– 들라 하라.
중후한 목소리와 함께 집무실의 문이 열리자, 바로스는 깊게 숨을 들이켠 후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그 안에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은 거인이 그 기묘한 눈빛을 번뜩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굽혀지는 무릎과 숙어지는 고개.
이것이 오랜 습관으로 인한 버릇인지, 아니면 부황이 가진 저 강렬한 카리스마 때문인지는 아직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니면 저 자리가 주는 힘일 지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이 고행의 끝에서 그가 저 자리에 어울리는 격을 쌓았을 때.
혹은 부황에게 인정받는 순간에는 말이다.
“무슨 일이더냐?”
“일국의 국왕을 암살함으로써 생길 파장은?”
말 속에 담긴 무서운 주제와는 어울리지 않는 담담한 어조였다.
그 말에 2황자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생 왕조이니만큼 아직은 그 정당성에 흠집을 내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구 왕조의 망령이 저지른 짓이라 무마할 생각입니다.”
그 말에 황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중은 멍청하지만 무식하지 않다.”
대화의 맥락과 어울리지 않는 듯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바로스가 움찔했고, 곧바로 황제의 담담한 어조가 이어졌다.
“내가 너에게 이 말을 해 준 적이 있을 것이다. 그 뜻을 아직도 모르는가 보구나.”
한심하다.
직전보다 더 무심해진 음성. 그 뒤에 숨겨진 말이 귓가에 또렷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황제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순간, 다음 말을 예측한 바로스가 다급히 외쳤다.
“압니다! 여론을 호도하긴 쉬우나, 그 수단은 진실에 근거해야 한다. 300년 전 제국의 석학, 아리우스의 말입니다.”
“호오?”
그에 부황의 손가락이 다시 내려앉는 것을 보며, 바로스는 내심 안도하고는 바로 말을 이었다.
“군중의 심리는 흐름에 휩쓸리기 쉬우나, 그 흐름을 만들기 위해서는 명확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거짓으로 만들어 낸 흐름은, 그것이 밝혀지는 순간 그 몇 배의 역풍을 각오해야 하니까요.”
“그것을 알면서도 그리 말한 것이냐?”
“로건 맥라인이 암살당하면, 그것을 사주할 여력이 있는 곳은 우리 제국뿐이다. 그리 생각하는 자들은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 짐작하면서도 대중은 믿고 싶지 않아 할 것입니다.”
“믿고 싶지 않아 한다?”
“예. 폐하의 치세하에, 제국은 이미 20년간 평화 정책을 지향해 왔으니까요.”
“음?”
제지하지 않는 부황을 보며 더욱 안심한 바로스는 힘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구 왕조의 복수를 꿈꾸는 이들의 짓거리냐, 제국의 암습이냐. 말이 되지 않는 두 가지 추측이 충돌하면 사람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스스로에게 독이 될지라도요.”
제국이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불길한 미래보다 구 왕조의 망령을 믿을 것이다, 라는 말.
그에 황제가 처음으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재미있구나, 바로스. 하지만 그리된다 해도 결국 대중들의 생각일 뿐, 각국 수뇌부의 의심을 완전히 떨칠 수는 없을 것이다.”
“의심은 하더라도 그것이 국가들의 연합 같은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대계 전에 딱 한 번, 귀신의 활동을 허락해 주십시오.”
“로건 맥라인. 그 아이를 제거하는 것이 귀신들의 존재가 밝혀지는 것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예, 그렇습니다.”
톡. 톡. 톡.
황제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두드린 시간은 잠시에 불과했지만, 바로스에겐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이윽고 황제가 입을 열었다.
“좋다. 귀신들의 작전을 허용한다.”
다행히도 부황은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물론.
“하지만 계승전의 규칙을 어긴 대가로 너의 점수를 10% 차감하겠다. 그래도 시행하겠느냐?”
온전히 이득만 얻은 것은 아니었다.
부황은 이런 조건을 달아도 일을 진행하고 싶냐는 듯 기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놈은 반드시 제거해야 해.’
그놈이 모든 것을 망칠 것이다. 최근 그의 머릿속에서 줄곧 맴도는 막연하고 불길한 예감이었다.
근거 없는 예감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그가 멸시하는 방식이었지만, 왜인지 지금은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예. 감당하겠습니다.”
그 대답이 의외였을까.
잠시 멈칫하던 황제는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릭이 일부 시종들에게서 이상함을 느낀 것은 그저 우연이었다.
하나같이 음울하거나 말이 없던, 즉 친구도 없던 시종들이 서로 수신호를 주고받는 것을 포착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속으로 피식 웃고 모른 척 넘어갔다.
‘짜식들. 귀엽네.’
그것은 맥라인 영지 시절, 로건이 한창 패악을 부릴 때 릭이 다른 하인들과 하녀들을 위해 수신호를 만들었던 추억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그저 붙임성 없는 것들끼리 나름대로 적응할 방법을 찾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존이라고 해유.”
“켄. 잘 부탁…….”
더 친해지라고 별궁의 근무 순번을 바꿔 줬더니, 분명히 수신호를 주고받았던 놈들이 서로 처음 보는 것처럼 인사를 나누는 게 아닌가.
그것이 살짝 마음에 걸렸다.
‘무슨 비밀 친구 같은 건가? 다 큰 사내놈들끼리? 어흐.’
웃기기도 하고, 묘한 상상이 들기도 해서 혼자 속으로 키득거리고 말았었는데, 문득 우연히 들었던 다른 시종들의 대화가 떠올랐다.
– 남자끼리? 에헤이, 암만 외로워도.
– 진짜라니까요? 그런 놈들이 있대요.
– 저도 들었슈. 저어기 왕국 연합에 가면, 10년씩 복무하는 애들 중엔 흔하대유.
”
‘설마 그놈들이?’
릭 역시 동성끼리 마음을 주고받는다는 얘기를 풍문으로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였기에 곧 뇌리에서 지워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시종들의 대화를 떠올린 순간, 전후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 그래서 서로 모르는 척했구나.’
그들이 이상하게 굴었던 이유가 대번에 이해되었다.
릭으로서는 굳이 상관하고 싶지 않은 영역이었지만, 문제는 이곳은 다른 곳도 아니고 왕궁이란 점이었다.
‘왕궁의 시종들끼리 그런…….’
당사자들의 취향을 존중해 주기에는 체면과 품위를 지켜야 하는 곳이었다.
혹여나 정말 사실이고, 그게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내궁 전체가 발칵 뒤집힐 일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 왕실 시종장인 자신에게 돌아올 게 분명했다.
‘절대 안 돼!’
그래서 릭은 이 시답지 않은 일을 굳이 왕에게 고하기로 했다. 적어도 자신의 책임만은 피하고 싶었으니까.
“시종들 중에 이상한 놈들이 있다?”
“예, 폐하. 조금 이상한 관계로 보이는 놈들이 있는데……. 저, 절대 제 책임은 아니구요! 저도 최근에나 알게 된지라…….”
“그럼 네가 알아서 쫓아내면 될 일 아냐? 괜히 시종장 직위를 준 게 아닌데.”
“그, 그게 증거를 아직 못 잡아서 말이죠.”
“음?”
“그게, 말씀드리기가 참 애매한 일인데……. 거참.”
땀을 뻘뻘 흘리는 릭을 보며 로건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 오랜 친구가 실로 오랜만에 하는 이 부탁이 그저 기꺼웠다. 왕이 된 이후 너무 소홀했던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마침 그를 위해 나서 줄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래. 내가 직접 가 보지.”
교단의 일이 제대로 해결된 만큼 마음의 여유도 생겼던 터라, 더욱 선심을 썼다.
“예? 폐, 폐하께서요? 아, 아니. 그런 망측스러운…….”
“망측?”
“아, 아니 그게. 저…….”
녀석이 당황스러워하는 꼴을 보니 더 흥미가 돌았다.
‘가끔 특이한 일을 해 보는 것도 기분 전환에 좋지.’
맥라인 영지에서 겉돌던 시절도 떠오르는 게, 전혀 다른 지위와 장소에서 오랜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느낌도 났다.
그래서 로건은 곧장 행동으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자. 말이 나온 김에 안내해라. 당장 가 보자.”
“아, 아니. 폐하께서 굳이 직접 가실 필요는……!”
필사적으로 손사래를 치는 릭의 뒷덜미를 잡고 강제로 잡아끈 결과.
“폐, 폐하께서 직접 시종들의 상태 점검을 오셨다! 모두 차렷!”
시종들이 거하는 내궁에 갑작스레 날벼락이 떨어졌다.
“이, 이게 웬일이야?”
“왜. 왜 폐하께서……?”
“에그머니나!”
우당탕탕.
부산히 움직이며 정렬하는 시종들을 보며 릭이 울상을 지었다.
“거참. 평소에 시종장이 어찌하길래 이렇게 개판일까.”
그런 릭을 놀려 주기 위해 일부러 엄격한 표정을 짓던 로건은 녀석이 말한 두 놈의 앞에 서는 순간, 정말로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을 힐끔대며 땀을 뻘뻘 흘리는 두 놈.
그 긴장한 표정과 태도는 다른 시종들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아주 분명한 차이가 느껴졌다.
‘포스? 그것도 이렇게나 치밀하게 숨겼다고……?’
이제는 오러유저 상급의 벽을 두드리고 있는 자신의 초월감각은 이미 이전과는 또 다른 영역에 다다라 있었다. 한데 웬만한 감지 마법도 월등히 초월했다 자부하는 그의 감각에도 바로 근처에 와서야 느껴지는 은밀함이라니.
순간 소름이 돋은 로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뻐어어억.
“컥!”
“억!”
꽝!
예상치 못한 듯, 은은한 황금빛이 어린 로건의 손에 그대로 가격당한 두 놈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튕겨 나가 벽에 부딪혔다.
그 순간, 로건의 눈빛이 다시 한번 변했다.
일격에 제압하려 했는데 놈들이 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틀며 튕겨 나갔던 것이다.
‘생각보다 더 강한 놈들이다.’
로건의 붉은 눈에 살기가 떠올랐다.
“폐, 폐하! 아무리 그래도 그게 죽을죄는……!”
릭의 실없는 소리에 반응해 줄 틈은 없었다.
튕겨 나간 놈들이 일시에 서로 반대편으로 튀어 나가려 하는 것이 로건의 감각에 걸린 것이다.
더 이상은 숨길 생각도 없는 것인지 놈들의 근육과 포스가 움직이는 결이 또렷이 느껴지는 순간.
로건의 허리춤에서 황금빛 오러가 빛살처럼 쏘아졌다.
스각.
쩌억.
놈들은 그 짧은 순간 이미 반대 방향으로 족히 십여 미터는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허공을 유영하는 뱀처럼 휘어지는 오러는 그 간격을 격하고 한 놈의 다리 한 짝과 다른 한 놈의 하반신을 잘라 냈다.
“이놈들을 묶어라! 첩자다! 놈들이 어찌 잠입했는지, 목적은 무엇인지 샅샅이 알아내!”
“예!”
근처에서 대기하던 왕궁기사들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그런데 그 순간.
우우웅.
“이런!?”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두 놈의 몸뚱이를 본 로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비켜!”
길게 설명할 틈도 없이 기사들과 시종들 앞으로 나선 로건.
그의 몸에서 튀어나온 황금빛 오러가 놈들의 몸을 칭칭 휘감는 순간.
꽈아아아아앙!
강렬한 폭발음이 오러를 뚫고 새어 나오며 사방으로 거센 바람이 불어닥쳤다.
“으아악!”
“이, 이게 무슨!?”
“엄마야!”
릭을 비롯한 시종들이 기겁하여 엎드리고.
창백한 안색의 기사들이 그들의 왕을 바라보는데.
두 놈의 자폭을 성공적으로 막아 낸 로건의 입가에서 가늘게 피가 흘러내렸다.
“이게 무슨……?”
오러유저의 바로 앞에서도 포스를 감출 줄 아는 은밀함.
사로잡히는 순간 서슴없이 자폭하는 광기.
거기에 그 폭발력은 오러를 뚫고 영향을 줄 정도라니, 로건으로서도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멍한 것도 잠시.
‘이놈들 설마……?’
전생의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로건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귓전을 울리는 나른한, 하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에 상념이 깨어지고, 바로스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제국의 미래를 위해 청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청?”
“귀신들의 칼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음? 호오. 왜지?”
아무런 감정도 없이 나른하게만 느껴지던 목소리에 작은 호기심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에 바로스는 망설임 없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맥라인의 국왕, 로건 맥라인을 제거하고자 합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황제 폐하.”
그 청에 대한 답은 짤막하게 돌아왔다.
“……한심하구나, 바로스.”
작은 호기심은 어느새 무거운 압박감으로 변해 바로스의 머리를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윽!’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 황위 계승전의 주제는 국외의 혼란 확대. 하지만 군단을 비롯한 제국의 무력 사용은 허락되지 않았다.
귀신 또한 정보 수집 차원에서만 허용되었던 터.
바로스는 심령을 장악하는 기세에 눌려 입도 벌리지 못하게 되기 전에 황급히 소리를 질렀다.
“로건 맥라인! 그자는 장차 제국의 대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그 전에 확실히 정리를 해 두는 것이 낫다는 판단입니다.”
“변수를 배제하는 것 또한 너의 능력일 터. 너는 지금 스스로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이냐?”
애써 짜낸 기개는 무심한 답문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소자의 무능을 인정하오나, 제국을 위해서라도 그자의 제거는 확실히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황족답지 않게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말에, 그를 옥죄던 위압감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그러나 황제는 재차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