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84)
284화트리아 국왕의 딸, 아니 첩자가 타히티 공국에서 보았다는 제국의 귀족은 전직 황실 관료 출신의 도나티 펠로라는 자였다.
그가 데려온 소수의 초강자들이 본디 공왕의 동생에 불과했던 레온 타히티에게 힘을 실어 주었고, 레온 타히티는 반정에 성공했다.
그리고 새로 등극한 타히티 공왕은 도나티 펠로의 조언에 따라 연합의 전통을 깨고, 혼란을 야기하는 정책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게 라몬 1세의 말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을 말입니까?”
[연합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다른 나라이거늘, 국경의 경비를 완화하고 나라 간 무역에 관한 세금을 단계별로 낮춰 결국 철폐하기로 했습니다.]7왕국 중 유일한, 아니 대륙 동부에서 유일하게 군도로 이루어진 동해의 해상 왕국 칼론과 내륙의 맥라인 혹은 제국으로 이어지는 중계 무역이 주 수입인 타히티 공국으로선 확실히 이득을 볼 수 있는 정책이었다.
정책도 훌륭하고.
[거기다 공국의 병사들을 맥라인에서 수입한 그 연사 석궁이라는 무기로 완전 무장을 시키고는 연일 군사훈련에 매진하며 주변 왕국에 불안감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국방력도 강화하고.
[게다가 네 왕국이 그간 연합에서 지속적으로 소외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연합의 의결권을 장악하고 있으니, 이대로 둔다면 앞으로도 연합이 그들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될 겁니다.]외교도 잘하고.
“거, 좋은 국왕인데……?”
[예?]“아, 아닙니다. 그런데 그래서 저희에게 원하시는 게 뭡니까?”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진심에 라몬 1세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로건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러자 고개를 갸웃하던 라몬 1세는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는 본론을 말했다.
[저는 이 모든 일이 제국의 음모에서 시작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여 이미 제국으로 인해 피해를 본 저희 왕국에선 맥라인과 긴밀한 연대를 맺기를 원합니다. 저희 트리아에서는 맥라인이 원하는 무엇이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호오? 무엇이든지요?”
뭐든 해 줄 테니 연대만 해 주십시오, 라는 꿀 같은 제안.
로건의 눈이 절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예. 가능한 조건이라면 뭐든지 들어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맥라인이 더 강국이니까요.]강국, 그 과한 아부 뒤에는 당연히 조건이 따라붙었다.
[다만 그 대가로 도나티 펠로를 제거하고, 레온 타히티를 공왕위에서 폐위시켜 주시기를 청합니다.]“하……?”
한 나라의 국왕에게 암살을 청한다?
라몬 1세의 어처구니없는 제안에 로건의 입이 벌어졌다.
* * *
“어찌 생각하나?”
생각해 보겠다.
그 말과 함께 라몬 1세와의 통신을 끝낸 후, 로건은 데미안에게 의견을 물었다.
제국의 위협을 생각하면 트리아의 제안은 더할 나위 없는 호재였다.
하지만 무턱대고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미심쩍은 점이 있었다.
그리고 데미안은 그 미심쩍은 점을 정확히 집어냈다.
“아마 트리아 국왕의 말은 사실이되, 사실이 아닐 겁니다.”
“뭐?”
“제국이 이미 신분이 노출된 적 있는 자를 첩자로 쓸 리 없습니다. 클레오의 경우를 생각하십시오. 저희는 아직도 놈이 제국의 첩자라는 물증을 찾지 못했습니다. 배후로 의심되는 2황자가 직접 가져다준 놈의 목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그렇지.”
“하지만 아마 그 도나티 펠로라는 자 때문에 타히티 공국이 변화하고, 그로 인해 소왕국 연합 자체가 변질됐다는 말은 사실일 겁니다. 정말로 제국에서 움직였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렇지. 문제는 제국에서 타이티 공국의 손을 들어 준 이유가 따로 있을 텐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말이야. 그리고 라몬 1세의 편견에 가득 찬 말을 지우고 보면, 타히티 공국의 새로운 왕은 충분히 자신들에게 이로운 정책을 펼치고 있어.”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확인된 타히티 공국의 약진은, 달리 말하면 연합 최약체의 약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최약체였던 공국의 약진은 다른 왕국에게는 기존 질서가 뒤집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두 견제를 할 것이라 이건가? 라몬 1세처럼?”
“예. 그들로선 수백 년의 역사가 가져다준 질서가 그대로 무너지는 걸로 보이겠죠. 그리고 그 생각 자체가 혼란을 불러오게 될 겁니다.”
“확실히…… 그렇겠군. 그러니 그 변수를 제거하고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달라는 것이고. 그럴듯해. 트리아의 국왕이 바라는 게 그게 전부는 아닐 테지만.”
세상사가 복잡하기 그지없지만, 특히나 국가 간의 일에 ‘무조건’이란 말은 있을 수가 없다.
수백, 수천만의 삶을 움직이는 일에는 상시 변수가 발생하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있을 수가 없는 말을 조건으로 걸었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분명했다.
“……지킬 생각이 없다는 뜻이겠지. 이거, 라몬 1세가 나를 너무 우습게 본 것 같은데.”
“솔직히 폐하의 그 어설픈 환자 흉내는 무시당할 만했습니다.”
“뭐?”
“농담입니다.”
실없는 데미안의 농담에 로건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 인간이 농담도 할 줄 알았던가?
새삼 또 전생과의 차이가 느껴져 묘한 기분이 드는데, 헛기침을 한 데미안이 빠르게 말을 돌렸다.
“라몬 1세. 그 자는 자신들이 시도하다가 실패하면 엄청난 역풍을 맞게 될 테니 우리에게 짐을 떠넘긴 겁니다. 거기다 아마 성공하든 실패하든 자신들은 손해 볼 게 없으니 질러 보는 것 같습니다.”
“실패하면 자신들은 관계없다고 발뺌을 할 테고.”
“성공하면 저희를 연합의 적으로 몰아붙이면서 다시 주도권을 쥐려 할 겁니다.”
로건과 데미안의 의견이 완전히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적어도 저라면요.”
“그래. 확실히 그 영감도 뱀 같아 보였어.”
“‘도’요? 제가 뱀……?”
어, 너.
전생에는 독이 잔뜩 오른 독사 같았어.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로건은 황급히 말을 둘러댔다.
“크흠. 그자가 그만큼 교활, 아니 똑똑해 보인다는 거지.”
“……뭐, 좋은 뜻으로 알아듣겠습니다.”
“그래.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쨌거나 제국과 싸우려면 아군은 많을수록 좋은데 말이야.”
“도나티 펠로가 정말 제국과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공국 하나를 들어 엎는 일입니다. 어렵다기보다는 후폭풍이 걱정되는 일이지요. 하지만…….”
데미안이 묘하게 서늘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잘 엮기만 한다면 폐하의 뜻을 훨씬 쉽게 펼칠 만한 환경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호오?”
“트리아 왕의 부탁대로 도나티 펠로를 제거하고 레온 타히티를 실각시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국의 짓으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그리하면 트리아 왕국이 우리를 적으로 돌릴 것이라 말한 건 자네 아니었나?”
“그러니 먼저 트리아 국왕에게 담보를 받아 놔야지요.”
“음?”
“설마 통신만으로 우리가 행동에 옮길 것이라고는 저쪽도 기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준비한 것이 있겠지요. 하지만 그 이상의, 그들로서도 막대한 부담이 되는 조건을 내걸어야 합니다. 그게 뭐든 간에요.”
“그러다 놈이 발을 빼려 하면?”
“그럴 리 없을 겁니다. 좀 더 조사해 봐야 분명해지겠지만, 아마 국왕이 이리 직접 나서서 무리수를 두려 할 정도면 아마 그자가 말한 것보다 상태가 더 심각할 겁니다. 우리보다는 그쪽이 더 급하겠죠.”
“좋아. 일단 상황부터 제대로 파악해 봐.”
“예.”
데미안의 그 장담은 3일 만에 바로 증명되었다.
“트리아 왕국의 중계 무역에 대한 의존도가 생각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불과 3일 동안 조사한 자료라기에는 꽤 많은 양의 서류를 한쪽에 쌓아 둔 채, 데미안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 말은?”
“트리아에는 특산물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굳이 찾자면 그나마 소왕국 연합 중에서는 농산물이 풍부하다는 것 정도인데, 그런 것 치고는 왕실이나 귀족들의 사치가 심했습니다.”
“오호.”
“지리적 이점을 통해 왕국 간 무역에 큰 세금을 물리면서 부를 축적해 온 것이죠. 그리고 지금 그 주 수입원이 사라진 상태인 겁니다.”
“똥줄이 탈 만하군.”
“예. 아마도 웬만한 조건은 다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로건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트리아의 왕 라몬 1세와 비선 통화가 연결되었다.
[조건 말씀입니까?]“예.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 맥라인으로선 연합의 왕국에서 일을 벌이는 것은 부담이 상당합니다.”
[그야 그렇겠지요.]“무엇이든 들어주겠다 하셨으니, 예상하신 것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먼저 말씀해 보시지요.”
네 패를 먼저 까 봐라.
로건의 말에 라몬 1세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몇 번의 헛기침을 한 라몬 1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생각지도 못한 조건을 꺼내 들었다.
[일단 제게 올해 16살이 되는 어여쁜 딸이 있습니다. 동맹의 증거로서 그 아이를 폐하의 첩으로 보낼까 합니다.]……이 인간 대체 딸이 몇 명이야.
‘아니 그 전에…….’
로건은 얼굴에 경련이 일 것 같은 느낌을 애써 참아 냈다.
“아니, 그건 됐고. 다른 조건을 말해 보시오. 나는 지금의 왕비만으로도 충분하니.”
[예? 그리 젊은 영웅께서 어찌 여자를 마다……, 크흠. 이거 실례했습니다.]그 말이 정말 의외였던 듯, 라몬의 얼굴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며 로건은 확신했다.
‘이자, 자기 딸들을 도구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과 달리 속내는 전혀 다른 자일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신할 수 있었다.
거기다 이어지는 말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지금 저희 왕국의 사정이 그리 좋지 못하여 먼저 많은 대가를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하니 서면으로 다른 약속을 드리면 어떻겠습니까?]“다른 약속이라니요?”
[연합이 정상으로 돌아온 뒤, 저희 왕국이 맥라인에 ‘매년’ 꾸준히 보답하겠다는 문서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호……. 조공을 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연합을 정상으로 돌릴 수만 있다면 무엇을 못 하겠습니까.]사실상 속국이 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
하지만 로건은 슬쩍 고개를 저었다.
“흐음. 솔깃한 말씀이기는 합니다만…….”
개인 간의 마법 계약서도 상급 이상의 기사라면 강제로 무시할 수 있다. 하물며 특별한 공증인이나 효력도 담보되지 않은 국가 간의 조약은 왕의 말 한마디면 그냥 종잇조각이 될 수도 있는 것.
줄 돈 없다, 그냥 배 째라, 는 식으로 나온다면 꽤 고달픈 상황이 될 것이다.
만약 예상대로 라몬 1세가 맥라인을 이용할 생각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효력 없는 서류에 말뿐이라, 게다가 자기 딸을……. 흐, 이자는 정말 실제로 손해 볼 생각은 조금도 없군. 날 너무 우습게 보고 있어.’
그러니 조금 강하게 나갈 필요성을 느꼈다.
“……저는 그런 서류보다 실물을 담보로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실물이라니요? 말씀드렸듯 지금 저희 왕국에는 여유가 없습니다. 아, 혹시 제 딸 하나로는 부족하다는 말씀이셨습니까? 그러면 셋으로…….]이 미친 인간이…….
로건은 절로 몸서리가 쳐지려는 것을 꾹 참은 채, 딸로 장사를 하려는 왕의 말을 단호히 끊었다.
“트리아 왕국의 국보를 잠시 제게 맡겨 주셨으면 합니다.”
[예?!!]그것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라몬 1세의 눈이 순간 두 배는 커졌다.
고대 그란디아 왕국의 압제를 벗어나 자신의 왕국을 건설했던 일곱 영웅.
그들의 리더였던 창왕, 트리아 카셀은 무려 6클래스의 아티팩트라 알려진 섬광창 ‘이그니스’를 유품으로 남겼다.
그 후 창왕의 이름은 트리아 왕실의 성이 되었고, 그 유품은 트리아 왕국의 국보가 되었다.
[이그니스는 세상에 몇 남지도 않은 6클래스 아티팩트이자 저희 왕국의 국보입니다. 그걸 어찌…….]라몬 1세는 왕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인장, 즉 옥쇄에 대한 것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만큼 국보의 가치가 크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치가 있지.’
로건은 상대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면서도 담담히 말을 이었다.
“잠시 맡아 두겠다는 것뿐입니다. 아무래도 저희가 해야 할 일이 일이니만큼, 그 정도 담보는 있어야 확실한 약속으로 믿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 그런.]“아니면 그저 말 몇 마디와 의미 없는 서류 쪼가리로 저희 왕국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셨습니까, 설마?”
로건이 내보인 서늘한 미소에 통신구 속 트리아 국왕은 잠시 아무 말도 내어놓지 못했다.
짧지만 길게 느껴지는 침묵의 시간이 지난 후 라몬 1세는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외적으로는 비밀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푹 숙인 얼굴로 한 무언의 항복이었다.
로건은 미소가 만연한 얼굴로 그 항복 선언을 받아들였다.
“물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