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85)
285화
“……그렇게 되었소이다.”
[섬광창 이그니스라, 꽤 큰 걸 거셨습니다.]통신구 속 상대의 말에 라몬 1세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6클래스의 아티팩트, 특히나 무구는 소유자가 단발적으로나마 초인의 무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전술 병기다. 더구나 이그니스에 담긴 마법은 기사들의 거창 돌격시에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한다.
세상에 알려진 몇 안 되는 6클래스의 아티팩트 중에서도 그 공격력이 증명된, 말 그대로 국보급 병기.
만약 일이 틀어진다면 트리아로서는 너무 많은 것을 잃게 된다.
라몬 1세는 그 걱정스러운 마음을 담아 통신구 속 상대에게 다시 한번 당부했다.
“그런 만큼 꼭 약속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거의 애걸하는 모습이었다.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설마, 제국의 역량을 의심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이어진 말에 굳어 있던 라몬의 안색이 조금 풀렸다.
“그럴 리가요. 하지만 사안이 중대한 만큼 저희가 손을 보태는 것도…….”
[아닙니다. 국보를 담보로 거셨는데, 어찌 그런 수고를 끼치겠습니까. 저희만으로도 충분합니다.]필요 없다.
쓸데없이 방해나 하지 마라.
정중한 거절에 담긴 속뜻을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라몬은 그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불쾌하거나 걱정스럽다는 기색을 내비치기에는 상대방이 너무 거물이었으니까.
“황자 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2황자, 바로스 반 아레스는 그런 라몬을 배려하려는 듯, 작전을 다시 한번 설명해 주었다.
[맥라인은 제국이 아니니 인재도 그만큼 한정되어 있습니다. 전하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선 왕국에 이름난 인재가 움직일 수밖에 없을 테고, 그것은 곧 놈들의 목을 죄는 올가미가 될 것입니다.]끄덕.
라몬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스 황자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판을 깔아 드릴 터이니, 전하께서는 타이티의 ‘비극’이 발생한 직후 맥라인에 대한 성토를 하며 다시 연합의 주도권을 쥐시면 됩니다.]“그럼 이그니스는…….”
[그전에 이쪽에서 찾아 드릴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설령 찾지 못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 드릴 것입니다.]상응하는 보상이라.
일국의 국보, 그것도 6클래스 아티팩트의 가치를 얼마로 매길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말을 꺼낸 이가 차기 황제로 유력한 2황자다.
라몬은 걱정스러운 기색을 애써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다면야 안심하고 있겠습니다.”
[협조에 감사드리오.]그렇게 둘의 거래가 성립되고 바로스가 통신을 종료하려는데.
“아, 황자 전하. 아직 성혼을 하지 않으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습니다만?]“제게 과년한 여식이 있는데, 미색이 출중하고 재주가 많은 것으로 왕국에 소문이 자자하지요.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라몬 1세의 반짝이는 눈은 좀처럼 그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 * *
“이그니스를 담보로 내어 주다니, 트리아 국왕이 상당히 조급했나 보군요.”
“트리아의 상징이 우리 손에 있다면 허튼수작을 부리지 못하겠지. 그런데 너무 쉽게 받아들였다는 게 조금 찜찜하긴 해.”
“돌려준다는 말을 하셨으니 그런 게 아닐까요?”
“뭐, 트리아 상황이 심각한 것도 있을 테지. 자네 보고를 보면 거의 파산 직전 아닌가.”
“예, 그렇지요. 그러니 그런 조건을 달았겠지요.”
라몬 1세가 이그니스의 담보를 허락하며 덧붙인 조건이 있었다.
– 대신 맥라인에서 저희 연합에 대한, 정확히는 트리아와 리버티, 테로난 왕국에 대한 불가침 조약을 맺어 주셨으면 합니다.
불가침 조약.
전쟁 중도 아닌 상황에서 이웃 국가에 불가침 조약을 원한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우리가 도나티 펠로를 처리하면, 그 3국이 나머지를 정리하겠다는 거지.”
“연합 내부의 전쟁으로 그들의 국력이 약화되면 결국 폐하께서 바라시던 대로 그들을 끌어들이기야 쉬울 것 같습니다만…….”
“연합의 총 전력이 대폭 약화되겠지. 그건 또 곤란한데……. 우리가 전쟁을 말릴 수는 없겠지?”
“이그니스까지 주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 트리아 국왕의 의지가 확고해 보였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전쟁이 최대한 빨리 마무리될 수 있도록 돕는 수밖에.”
로건의 입가에 살벌한 미소가 맺히자, 데미안은 순간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어쩌시려고요?”
“아, 그건 사절이 오면 말해 주지. 일단은 트리아의 부탁을 들어줄 방도나 생각해 보자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주제를 돌린다.
이제는 데미안도 로건의 저 버릇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았다.
‘또 나나 드웨인 재무대신이 발작할 만한 일을 생각하신 걸 텐데…….’
뭐, 어련히 알아서 하실까.
‘신경 끄자.’
데미안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매번 한결같이 혈압이 오르는 드웨인 재무대신과는 달리 데미안은 이미 반쯤 달관해 버린 것이다.
데미안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자, 로건은 바로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자, 누구를 보내야 할까? 티가 안 나게 소수의 강자를 보내는 게 좋을 텐데. 그것도 충성심 강한.”
“혹여나 기사들이 반발할 것을 생각하면 인선을 신중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나라의 이득을 위해 암살행을 해야 하는 일이었다.
맥라인 기사들의 충성심이 높은 편이라고는 하나, 아무나 시킬 수는 없는 일.
“……이럴 때 부르델이 있었으면 정말 딱 좋았을 텐데.”
로건은 새삼 타이밍이 아쉬웠다.
마수 사냥꾼으로서 초인의 경지에 근접한, 그리고 결국 초인이 될 활의 달인.
전생에 제국의 초인 용병으로 활약하던 부르델은 결국 제국의 장군이 되어 다른 정복 전쟁에서 주로 요인 저격 역할을 맡았다. 정복 전쟁이 끝난 후에는 그랑디아 해방 전선 같은 저항군의 요인들을 사냥하는 사신으로 이름을 떨쳤다.
유령 궁수(Phantom Archer).
전생에 20년 뒤에는 모르는 자가 없었던 이름.
하지만 지금 부르델의 이름을 아는 자들은 제국 북방의 마수림 근처에서 활동하는 마수 사냥꾼들밖에 없으니 더욱 좋았다.
하지만…….
“부르델 경 역시 로니안 왕제님을 쫓아 남부 산맥으로 들어선 이후 연락이 없습니다.”
“알고 있다. 로니안 그 녀석은 대체 그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전쟁에 대한 준비와는 별개로 동생에 대한 걱정이 점점 커지고 있었지만, 로건은 동생이 멀쩡히 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믿지 않으면 다른 일상에도 지장이 생길 테니까 억지로나마 그리 생각하는 중이었다.
‘괜찮을 거야. 분명히.’
로건은 또다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동생에 대한 걱정을 고개를 저어 털어 버리고는 다시 현재에 집중했다.
“도나티 펠로, 그자와 레온 타히티 공왕을 쳐내려면 어느 정도 전력이 필요할까?”
“타히티가 아무리 저희 맥라인의 대영지 하나 정도 수준의 작은 국가라지만, 적어도 최상급기사 수준에 이른 강자 다섯은 필요할 것입니다. 혹은 초인을 동원하거나요.”
“그렇게나? 조용히 그 둘만 제거하는데?”
“……저기 폐하. 그나마도 최소로 잡은 겁니다. 도나티 펠로 그자가 타히티에 데려온 자만 최상급기사 둘에 5서클 마법사 하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공왕성의 경비도 튼튼한 편입니다.”
“……그래? 흐음.”
로건이 인상을 찡그렸지만, 사실 이 상황에선 선택지가 좁을 수밖에 없었다.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자.
그리고 그만한 실력이 있는 자.
거기다 기사이면서도 암습이나 습격에 망설임이 없는 자.
로건의 시선이 자연스레 자신의 옆으로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그 시선을 받은 빅토르가 무표정한 얼굴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암살행의 경험은 없으나, 최상급기사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어린 나이.
게다가 항상 그의 곁에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이름이 나지 않은 기사.
적당한 위장을 하고 타히티에 접근한다면 이 이상의 인선은 없을 것 같았다.
데미안 역시 비슷한 생각을 떠올린 것 같았지만, 반응이 좀 달랐다.
“폐하. 아무리 그래도 빅토르 경은 이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경험도…….”
“아니, 괜찮아.”
“예?”
“무엇보다 다른 이들 중에 빅토르보다 나을 거라 생각되는 자가 있나?”
다른 최상급기사들은 최소가 중년인.
수십 년간 기사로 살아온 이들이 과연 이 역할을 잘해 낼 수 있을까.
데미안은 할 말을 잃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더러운 일을 전담할 이들이 필요해. 그만한 강자들을 키울 시간도. 하지만 지금은…….’
그런 그림자들을 만들기에는 왕국의, 아니 왕조의 역사가 너무 짧았다.
전생에 로건이 독사라 평했던 데미안이 그에 어울리는 생각을 떠올리며 아쉬움에 입술을 깨물 때, 로건은 확신을 가지고 빅토르의 어깨를 두드렸다.
‘과거의 귀족학살자.’
혼자서 영주의 성에 뛰어들어 그 목을 베는 것을 취미로 삼았던 이.
비록 현생에서는 그 길을 걷지 않았다 해도 그 재능이 어디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었다.
“빅토르. 데미안에게서 정보를 숙지한 다음, 리아와 함께 인선을 짜서 보고해라. 확실히 성공할 수 있는…….”
그런데 그 믿음을 과신한 것일까.
“폐하. 이번 임무는 저 혼자 해 보겠습니다.”
빅토르가 턱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뭐?”
“최근에 벽을 넘기 위한 실마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목숨을 걸 만한 실전이 필요할 것 같아 특별 휴가를 청하고 마경이라도 찾아갈까 고민하고 있던 참입니다.”
“하……?”
“그런데 임무를 맡게 된다면, 그것도 이런 임무라면 제 한계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듯합니다. 맡겨 주십시오.”
쿵.
그리 말하며 무릎을 꿇는 빅토르를 로건은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지금 이 상황에 뭐라는 거야?
이게 갑자기 무슨?
“빅토르. 목숨 걸고 싸우면서 경지를 뛰어넘는다는 게 말처럼 그리 간단하고 쉬운 게 아니다. 괜히 영웅소설에 나오는 게 아니야!”
쉽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아차 하면 그냥 죽는다.
그렇기에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일인 것이다.
로건으로선 상식을 말한 것이었지만, 빅토르는 태연히 반론을 제기했다.
“폐하께서도 실전에서 경지를 깨우친 적이 있으시잖습니까?”
“내가?”
“예. 제가 병사로 참전했던 첫 전투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
실반 자작령 전투.
당시 상급의 경지에 반쯤 발을 걸쳤던 자신이 적 상급기사와 싸우면서 벽을 넘은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거야 내가 한창 미숙할 때 얘기 아니더냐. 이미 반쯤 벽을 넘었다고 확신한 상태에서 나머지 껍데기를 깨기 위해서였던 거야. 더구나 그건 초인의 벽에 도전하는 것과는 격이 달라!”
말 그대로 격이 다른 이야기.
하지만 빅토르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저번 습격 사건 때 왕비님께서 겪으신 변화도 있지 않습니까.”
“어…….”
로건이 순간 말을 잃자 빅토르의 눈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저 역시 그때 느낀 바가 있습니다. 한 발짝, 아니 반 발짝만 더 내디디면 될 것 같은데 일상적인 훈련으로는 그게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리 중요한 임무를 그렇게 사사로운 이유로…….”
“말씀을 듣는 순간 이거다, 싶었습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특성 설계의 방향도 유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원하던 길을 이 임무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공할 수 있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네가 원하던 길이 뭐였길래 여기서 찾아……?
설마 암살……?
나한테 가루가 된 그놈처럼?
로건이 황당한 마음에 대답을 못 하고 있는데, 별안간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말로만 듣던 그 초인의 특성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빅토르 경이 설마……? 하, 그럼 저는 찬성입니다.”
“데미안?”
로건이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데미안은 자신만의 공상에 빠져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폐하께서도 기척을 못 잡아냈다는 그 암살자 같은 특기. 멋지군요. 안 그래도 필요……. 아, 실언입니다. 실언. 하하.”
살기 어린 눈빛을 맞은 데미안이 슬며시 고개를 돌리자, 로건은 다시금 차분한 얼굴로 빅토르를 보았다.
“지금이야 불가피한 경우라서 너에게 시킨다만, 나는 너만 한 인재를 고작 암살자로 키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가 가르친 것 때문이라면, 그 특성 설계부터 아예 다시 짜 봐. 이번 일은 다른 이에게 맡기겠다.”
“알고 있습니다.”
“음?”
“저 역시, 그때 그놈들처럼 음침한 암살자의 길에는 관심 없습니다. 다만 확신이 있습니다. 부디 제게 맡겨 주십시오. 아니라면 저 역시 이공자님처럼 남부 산맥이나 마수림을 찾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신경 쓰이는 부분을 찌르는구나.”
“죄송합니다, 폐하.”
“아니, 아니다. 벽을 넘기 직전이라……. 그 너머를 확실히 본 것이더냐?”
“네.”
적청의 오드아이가 확신을 담고 두 눈을 똑바로 마주쳐 왔다.
로건은 그제야 이 또 다른 동생에 대한 걱정을 떨치고 그의 상태를 차분히 감지해 볼 수 있었다.
빅토르의 심장에 자리한 4개의 포스코어가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듯이 맥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포스코어에서 면면히 흐르는 포스가 신체 곳곳으로 퍼져 언제라도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최상급의 극,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로건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임무를 안 맡기면 마경을 찾아가겠다고?”
“네, 그렇습니다.”
“로니안과 어울리더니, 하는 짓도 똑같구나.”
“제가 더욱 강해져서 폐하를 지키고자 함입니다.”
당사자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이상 로건도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허락하마. 하지만 정보를 단단히 숙지하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바로 포기하도록 해라. 알겠지?”
“예! 감사합니다, 폐하!”
빅토르의 우렁찬 외침이 있은 지 사흘 후.
왕의 호위기사였던 빅토르의 모습을 왕성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