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87)
287화부르델이 남부 산맥에서 로니안을 만나던 그 시기, 맥라인 왕성엔 일단의 무리가 방문했다.
성의 옆문으로 조심스레 들어온 삼십여 명의 무리는 자신들의 정체를 알리는 깃발조차 들고 있지 않았지만, 그랑피아의 내부에서는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손님들을 자연스레 맞이했다.
“연합 3국의 특사가 도착했습니다.”
드웨인의 말에 로건의 눈이 빛났다.
“벌써? 빠르군. 정말 단단히 작정한 것 같아.”
“이그니스도 직접 가져온 것 같습니다. 트리아의 특사가 보관 중인 듯합니다.”
“좋아. 일단 만나 보지.”
로건이 미소를 지으면서 일어나려는데, 드웨인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그를 붙잡았다.
“저기, 그런데 폐하.”
“음?”
“비밀을 요하는 일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빅토르가 자원해서 ‘그 일’을 하러 갔다는 것까지도 이해했습니다. 저희 왕국에서 폐하의 의도에 반할 사람은 없으니, 확실한 방법이 있다면 굳이 의논을 안 하시는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혹시나 또 무리수를 두실 거라면, 그 전에 반드시 상의를 해 주십시오. 꼭 제가 아니라 주변의 측근 중 누구에게라도요.”
드웨인의 불안한 얼굴에 로건이 헛웃음을 지었다.
“……데미안이 뭐라고 하던가?”
“제가 불안해서 그럽니다, 제가! 그 표정, 또 뭔가 꾸미고 계신 거잖습니까!”
“……아니, 아닌데?”
“허……, 폐하? 폐하!”
스스로도 못 미더운 표정으로 황급히 방을 나서는 로건의 뒤를 지극히 불안한 표정의 드웨인이 연신 한숨을 내쉬며 쫓아갔다.
* * *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폐하. 리처드 블레이어라고 하옵니다.”
3국의 대표로 나서서 먼저 고개를 숙인 것은 트리아 왕국의 특사였다. 사오십쯤 되어 보이는 외양에, 정갈하게 빗어 넘긴 갈색 머리와 푸른 눈동자가 인상적인 자였다.
‘최상급기사라…….’
리처드 블레이어라면 로건 역시 들어 본 바가 있었다.
트리아 국왕의 오른팔로 불리는 기사라던가.
통상 사절로 오는 이들이 거의 문관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굉장히 특이한 경우였으나, 이미 결정된 일에 관한 확인 차원의 사절이니만큼 충직한 기사를 쓰는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거기다 특별한 물건의 운반책도 되어야 했을 테니까.
로건이 리처드를 보며 눈을 빛내자, 그와 함께 온 다른 일행이 연이어 로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맥라인의 지배자를 뵙습니다. 리버티 왕국의 특사, 조던 말린즈입니다.”
“맥라인의 태양을 뵙습니다. 테로난의 사절, 브레드 패럴입니다.”
대머리 중년인과 노학자 같은 외관을 한 사절들은 리처드만큼 기개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적어도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부끄러움이 없는 이들이 보일 법한 눈빛이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소이다. 그런 그대들을 위해서라도 허례허식으로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으니, 긴말할 필요 없이 바로 약정된 조약서를 보여 주시오.”
로건의 그 단도직입적인, 외교적 관례를 무시하는 빠른 본론에 사절들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러한 관례 따위는 모르는 기사 출신의 리처드가 재빨리 준비한 서류를 꺼내 들었다.
로건처럼 초감각이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볼 수 있는, 푸른빛 마나가 번뜩이는 서류였다.
“국제 관례에 따라 마나 서약서를 준비했습니다. 조약의 대상자에 대한 본인 증명 외에는 어떠한 마법도 걸려 있지 않으니,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개인용 마법 계약서처럼 마법의 제약이 따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초인조차도 본인이 직접 동의한 이상 마법적 증거가 보존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서약서였다.
지금처럼 비밀 조약이 성립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근거이기도 했다.
그러나 로건은 대충 겉만 훑어보고는 서약서를 바로 옆으로 넘겼다.
“데미안. 약속된 바와 다른 점이 있는지 꼼꼼히 검토하라. 마법에 대해서도 점검하고. 기한이 얼마나 걸리지?”
“반나절이면 충분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래. 그러면 모두 반나절 후에 다시 이 자리에서 만납시다. 아, 트리아의 특사는 내게 전할 물건이 있지요?”
“……어찌 폐하를 기다리게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사답지 않은 아부성 멘트와 함께 리처드는 바로 고개를 숙였고, 로건은 미소로 그 예를 받았다.
“좋습니다.”
다른 나라의 사절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로건과 리처드를 번갈아 보는 것을 보니, 이그니스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 새어 나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대들은 이만 돌아가 쉬고 있으시오. 서류 검토가 끝나는 대로 다시 부르겠소이다.”
로건은 사절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 응답하지 않은 채, 바로 자리를 파했다.
대략 한 시간 후, 로건은 같은 자리에서 리처드 블레이어와 독대했다.
리처드 블레이어의 손에는 어떻게 들키지 않고 운반했는지 모를, 그야말로 눈에 확 띌 수밖에 없는 물건이 들려 있었다.
3m가 넘는 길이에 빛을 벼려서 그대로 고정해 놓은 듯 찬란하게 빛나는 창날. 거기에 이어진 창대까지도 모두 자줏빛 서광에 휩싸여 있어,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냈다.
“이 무기를 가지고 독대하는 것은 제국의 황제도 허락해 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폐하께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군요. 여기, 저희 트리아 왕국의 국보 이그니스입니다.”
씁쓸한 웃음과 함께 앞으로 내민 손은 말과는 달리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한데 저기 저분은……?”
리처드가 로건의 뒤를 눈짓하며 말했다.
그곳에는 무언가에 홀린 듯 이그니스를 쳐다보는 험악한 면상의 마도사가 있었다.
“아티팩트의 진위를 판별하기 위해 모신 우리 왕국의 마도사요. 몇 안 되는 내 측근이니, 비밀이 새어 나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아, 예. ……그런데 눈빛이 좀.”
리처드의 떨떠름한 목소리에 로건이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보기에도 클레이튼은 정말 희한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몽롱한 거 같기도 하고 황홀한 것 같기도 한 그 표정은 그를 알게 된 수년 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로건이 몇 번 헛기침을 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클레이튼이 조심스레 앞으로 나섰다.
“맥라인의 마도사 클레이튼입니다. 작위는 받았지만, 아직 성은 정하지 못해서.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 이그니스를 내가 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반쯤 횡설수설하는 클레이튼을 보며 미심쩍은 표정을 지은 리처드였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그가 창대를 잡은 채 조심스레 창을 내밀었다.
“과연…… 놀랍습니다. 어찌 이런 물건이…….”
이그니스의 창대를 쓰다듬는 클레이튼의 손길과 눈빛이 다시금 몽롱해진 것이 그 표정만으로도 진위 판별에는 무리가 없을 듯했다.
한편 여전히 창대의 끝을 잡은 채 클레이튼을 보고 있는 리처드의 표정은 그대로 창을 찌를지 말지 갈등하는 것 같아, 로건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품이 맞는 것 같군요.”
“물론입니다.”
안색이 잔뜩 굳어진 리처드는 로건의 말에 대답하면서도 계속 머뭇거릴 뿐, 이그니스에서 좀처럼 손을 떼지 못했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라, 로건은 굳이 재촉하지 않았다.
“창왕을 기리며, 트리아의 기사들은 개인 무구도 거의 창을 사용한다 들었소.”
“……그렇습니다.”
“다행히 맥라인엔 창을 사용하는 기사가 거의 없으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것이 외부의 눈에 띄는 일은 없을 것이라 장담하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그 말을 듣고서야 리처드는 섬광창, 이그니스를 손에서 놓았다.
우우웅.
소유주가 변했다는 것을 아는 듯 울어 대는 전설의 무기.
로건은 창을 완전히 넘겨받은 뒤에도 홀린 듯 멍한 표정으로 창을 쓰다듬는 마도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여기에 부여된 마법이 대마법 소멸의 섬광이었던가. 클레이튼 공. 장담한 대로 아티팩트 연구에 더 진척이 있길 바라겠소.’
괜히 쓰지도 않을 무구를 담보로 받은 것이 아니었다.
– 6클래스의 아티팩트를 연구할 수만 있다면, 대량 생산되는 아티팩트의 수준도 한 단계 높일 수 있습니다.
애초에 그 시작은 클레이튼의 투정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충분하겠소?’
‘충분합니다.’
눈빛으로 전해진 클레이튼의 의사에 로건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한다고 했지, 연구 대상으로 삼지 않겠다고는 안 했다.
로건은 내심을 숨긴 채 최대한 엄숙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이것이 양국 간의 우호를 증명하는 담보가 될 것임을 나 로건 맥라인의 이름으로 맹세하겠소. 물론 트리아 국왕과의 약속 또한 충실이 이행할 것이오.”
너희가 먼저 뒤통수를 치지 않는다면 말이야.
사람의 마음을 읽는 재주가 없는 리처드로선 그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렇게 인사를 하긴 했지만, 리처드 블레이어는 방을 나서기 직전까지도 몇 번이고 다시 돌아서서 이그니스를 바라보았다.
트리아 왕실의 핏줄도 아닐 텐데도 여실히 보이는 아쉬움의 감정. 그 모습만으로도 그들의 시조, 창왕 트리아 카셀이 트리아 왕국에서 가지는 위상을 알 것 같았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비로소 리처드의 모습이 사라지자 로건이 휙 고개를 돌려 클레이튼을 바라보았다.
“클레이튼 공. 성과를 거두려면 최소 어느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겠습니까? 설령 일이 틀어지더라도 그 기간만큼은 지켜보겠습니다.”
“……나선형의 클래식 마나 패턴에다가 복합구조식을 섞어서 꼬았어. 어떻게 이게…….”
“……클레이튼 공?”
“재료가 가장 큰 문제일 거라는 예상이 틀렸군. 그럼 이게…….”
“클레이튼 공!!”
“헙! 아, 예! 폐, 폐하.”
버럭 소리를 지른 뒤에야 정신을 차리는 마도사를 보며 로건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연구는 연구실로 가져가서 실컷 하십시오. 최소한의 성과가 나오려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기대치 않았던 대답에 로건의 안색이 다소 굳어졌다.
“하지만 이것을 연구할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그 연구 일지에서 더 많은 부분을 해석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능성은 넘치도록 충분합니다.”
“연구 일지?”
“아, 그 크라우네의 연구 일지 말입니다.”
“아……. 그걸 아직까지 연구하고 있었습니까? 난 아티팩트 연구에 대한 실마리라고 보고 받은 것 같은데?”
“……같은 말입니다. 대체 어떤 단체가 만든 연구 일지인지는 몰라도, 마법을 물체에 담는 수많은 방법을 전부 망라하고 있으니까요.”
“단체라. 그러고 보니 전에도 그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만.”
“예. 그건 절대 개인이 연구할 만한 자료가 아닙니다. 아무리 천재라도 연구의 양적 범위를 봐선 불가능합니다.”
“흠…….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 성과가 있기를 기대하지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그냥 한번 질러 본 건데 바로 줄 줄은 몰랐던 것뿐이오. 그만큼 좀 찜찜하긴 하지만.”
로건은 이그니스를 보면서 새삼 라몬 1세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과연 그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혹시 모르니 최악의 상황도 대비해 둬야겠지.’
그렇게 마음을 다진 로건은 마음이 급해 보이는 마도사를 빠르게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바로 릭을 불렀다.
“리버티와 테로난의 사절들을 불러와라.”
“예? 하지만 사절들은 반나절 후에 보신다고…….”
“할 말이 있어. 그들의 계획에 도움이 될 거라고만 전하면 된다.”
“예, 알겠습니다.”
본래대로라면 삼국의 사절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하고자 했던 말. 하지만 트리아의 행동에서 영문 모를 찜찜함을 느낀 로건이 일단 리처드를 대화에서 뺀 것이다.
그렇게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이르게 로건과 다시 마주하게 된 리버티와 테로난의 사절은 로건의 제안을 들은 순간 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면 어떻겠소?”
“허…….”
“그거야 당연히…….”
서로를 마주 본 두 사절은 똑같은 모습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