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88)
288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심중의 당황을 반영하듯, 리버티 왕국의 특사 조던 말린즈의 대머리에서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렸다.
슬쩍 옆을 보니 테로난의 외무대신인 브레드 역시 그 연륜과 어울리지 않게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을 당황하게 만든 로건은 태연하게 다시 말을 이었다.
“모른 척할 필요 있소? 우리와 불가침 조약을 맺고 나면, 연합의 강성 삼국이 지금 주류가 된 나머지 네 왕국을 정리하려는 거 아니오. 그 예정된 전쟁을 직접 도와주겠다는 말이오만?”
‘왜 내 뜻을 몰라 주지?’ 하는 순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로건을 보며 사절들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다 침중한 안색의 브레드 대신 조던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저희가 각 왕국을 대표하는 사절로 이곳에 온 것은 사실이오나, 향후 국가의 운영 방안에 대해 언급할 수 있는 자격은 없사옵니다. 폐하의 말씀은 감사하오나 그것은 후에 다시…….”
“아니, 아니지요. 전쟁을 도와준다는 빌미로 내가 무엇을 요구할지 두려워서 그러는 것 아니오.”
그 말에 조던의 안색이 굳어졌다.
로건의 그 단도직입적인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맥라인 왕국은, 특히나 최근 국가의 모든 병력을 왕의 손안에 재편성한 맥라인 왕국은 과거 그란디아 왕국보다 분명히 강성하다.
연합의 일곱 왕국 모두가 똘똘 뭉쳐야 간신히 대항할 수 있을까 싶은 강국인 것이다. 그런 맥라인이 원군 파병을 빌미로 연합의 영토에 침입하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말을 잇지 못하는 조던 대신 여태 가만히 있던 브레드가 무언가를 각오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조던의 고개가 그에게로 홱 돌아갔다.
아무리 그래도 면전에다 대고?
놀란 조던의 표정을 보면서도 브레드는 흔들림 없이 굳건한 눈빛으로 로건을 바라보았다.
“저희가 불가침 조약을 맺기 위해 이곳에 온 이유 자체가, 맥라인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관여하시겠다면, 애초에 이런 회동을 할 의미 자체가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브레드 님…….”
그 말에 조던의 입에서 신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살짝 돌려 말하긴 했지만 그 속뜻은 분명했다.
너를 못 믿겠다.
도와준다고 말해 놓고 그대로 집어삼키려는 것 아니냐.
아무리 외국의 사절이라도 좋은 꼴을 보긴 힘든 직언이었다.
하지만 그 직언을 들은 당사자는 오히려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나를 그리 무도한 사람으로 보았소이까. 걱정이 과하시군. 본 왕국은 우리의 안보를 지키기에도 급하니 굳이 외국에 군대를 파견할 생각이 없소이다.”
전쟁을 도와주겠다면서 군대를 파견하진 않겠다니?
이게 무슨 개소리지?
사절들로선 그야말로 앞뒤가 안 맞는 헛소리였다.
어리둥절한 그들을 보며 로건은 피식 웃었다.
“대놓고 군대를 보내고자 했다면, 여기에 리처드 블레이어도 불렀겠지요.”
그 말에 사절들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그 말씀은……?”
“병력이 아닌 다른 방면으로 도우시겠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저희야 감사할 따름입니다.”
좀 전까지 국가 운영 방침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했던 조던 말린즈가 반색하며 웃음 짓자 로건이 말을 덧붙였다.
“뭐, 그대들도 들으면 만족할 만한 지원일 것이라 장담하지요. 하지만…….”
잠시 망설이듯 뜸을 들인 로건이 눈을 가늘게 뜨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전에 그대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소이다.”
“……예?”
“혹시 그대들의 왕국 쪽에서 제국과 줄이 닿아 있는 자가 있소? 내가 제국의 고위층에 연줄을 만들어 볼까 해서 말이오. 아, 뭐 굳이 들어주지 않아도 되는 부탁이긴 한데, 그에 따라 지원이 달라질 수는 있을 거라 생각하면 될 거요.”
의뭉스럽게 웃는 로건의 말을 해석하자면 제국과 줄이 있으면 연결해 달라, 대가는 톡톡히 치르겠다, 는 뜻이었다.
그 말에 당황스러워하던 두 사절이 서로를 눈치를 살피다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송구스럽습니다, 폐하. 그러시다면 리처드 경을 다시 부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트리아 왕국?”
“원래 제국의 사절을 맞이하는 것은 트리아 왕국에서 연합을 대표하여 전담했던 터라…….”
그 말을 들은 로건의 눈빛이 묘하게 변한 것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사절들이 무거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예. 특히나 지난 10여 년간은 트리아 왕국이 의장국이었던 탓에 제국의 사절이 트리아 왕실에서만 머물렀습니다.”
“혹시 지원의 대가로 바라시는 게 그것이라면 저희 왕국 역시도…….”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두 사절의 모습을 유심히, 아니 말 그대로 내장까지 훑어본 로건은 이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 박동과 혈액의 흐름이 전부 느려지고 있다. 이들의 말은 진실이야.’
오러유저 상급의 경지를 터득하며 얻게 된 초감각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을 스승이 보았다면 분명 한마디 했겠지만, 로건으로서는 이보다 더 유용한 용처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나라를 대표하여 이 자리에 왔다는 것은 그 왕국의 실세임을 의미한다.
전쟁의 지원을 두고서도 이리 대답할 정도면 트리아와는 달리 일단 믿어 봐도 좋을 것 같았다.
짝.
“좋소. 제국과 연이 없다는 말은 믿겠소. ‘두’ 왕국을 지원해 드리리다.”
가볍게 손뼉을 친 로건이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그리 말하자, 흠칫하던 두 사절이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폐하. 그 말씀은……?”
“지금 저희를 시험…….”
“최근에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왕국 내에서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제국의 짓이라 의심하고 있지요.”
“아……!”
“그 소문이 정말 사실…… 아, 실례했습니다.”
일국의 왕이 공표한 말을 대놓고 의심한 꼴이라 브레드의 눈총을 받은 조던이 황급히 말을 수습하는데, 로건은 그저 빙긋 웃을 뿐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리고 트리아 왕국은 왠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 두 사람을 따로 부른 것이오.”
그 말에 두 사절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리버티와 테로나는 트리아와 더불어 연합을 평정하기로 밀약을 맺은 사이.
그런데 그 중심이 되어야 할 국가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
“폐하. 지금 그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하신 건지, 연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 걱정스러운 물음에 로건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있긴 하나 모든 것은 심증뿐이라, 내가 무슨 말을 한들 그대들의 군주를 설득할 수 있겠소?”
사람의 말은 다리를 건너면 건널수록 신빙성을 잃게 되는 법이다. 가장 먼저 그 말을 한 사람이나 들은 사람이 심정적으로 완벽히 공감했다 한들, 물증 없이는 타인을 설득하기 어렵다.
그것이 특히나 국가 간의 관계라면 더욱 더.
그 말뜻을 이해한 사절들의 얼굴이 어두워지는데, 로건이 말을 덧붙였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소이다. 그래서 내가 그대들을 지원하겠다 한 것이니까. 어떤 변수도 없앨 수 있도록.”
그 말에 사절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세상을 살 만큼 산, 그리고 그만큼 경험도 많은 그들이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이 웃기기는 했지만,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만큼 자신들의 조국을 사랑한다는 거겠지.’
수백 년간 이어 온 전통을 깨고,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나라들이다.
그만큼 사절들이 무게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브레드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지원을 대가로 저희가 해 드려야 할 일은……?”
“그런 것은 없소. 그저 그대들의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 내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오.”
그 말에 두 사절은 다시금 눈을 맞추었다.
‘무슨 뜻이죠?’
‘글쎄. 전혀 모르겠군.’
눈빛으로 나눈 대화 그대로 그들은 로건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상황에서 굳이 이유를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그럼 어떤 지원을 해 주시려는 겁니까?”
“병력이 아니라 다른 지원이라면 역시 식량이나…….”
기대감 어린 표정.
하지만 태연스레 이어진 로건의 말에 그들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웃음기는 단 1초 만에 사라졌다.
“아니, 병력을 파견할까 합니다만?”
지금 장난하냐!?
내심 똑같은 생각을 떠올린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당장이라도 폭언을 쏟아 낼 듯한 표정이었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사절로서 임무를 잊지 않았다.
“크흠…….”
조던은 헛기침으로 간신히 욕설을 삼켰다.
“……소인이 부족하여 폐하의 농담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허허.”
반면 노년의 브레드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어떻게든 분위기를 맞춰 보려 했다.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로건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흠. 농담은 아니오. 내가 하고자 하는 지원은 고작 두 사람이니 사실 병력이라고 하기에는 그 수가 적지.”
마음이 급한 그들을 농락하는 듯한 말에 두 사람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오러유저 둘, 즉 초인들이 임시로 자네들 왕국의 소속이 될 것이오. 어떻소?”
그러나 웃으며 이어진 말에는 그들도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 * *
“……알려지지 않은 초인을, 그것도 둘이나요? 그런 전력이 우리 왕국에 있었습니까?”
드웨인이 경련이 이는 눈썹을 부여잡고 또박또박 물었다.
“없지.”
“어흐흐…….”
로건의 그 태연한 대답에 드웨인은 결국 얼굴을 부여잡고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다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맨날 일을 저지르고 나서야 생각을 하십니까! 어깨 위에 그게 박치기하라고 있는 것도 아닌데!!”
저혈압과 고혈압을 순식간에 오가며 급변하는 가신의 모습에, 새삼 그의 건강이 걱정되었던 로건은 황급히 준비한 대책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만들어 낼 방법은 있지.”
“예? 어떻게요?”
마치 초인을 찍어 낼 수 있다는 듯한 말에 드웨인이 반신반의하면서 슬쩍 눈을 떴다.
“우선은 에일렌.”
“……와, 왕비님을요?”
“그녀가 초인으로 각성한 것은 나와 자네 같은 최측근들밖에 몰라. 그녀를 마법으로 변장시켜서 전장에 내보내면……!”
“왕. 비. 님을요!?”
드웨인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확 높아졌다.
로건으로선 나름대로 완벽한 계책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는데, 드웨인의 표정이 생각보다 더 좋지 않았다.
그에 당황한 로건이 설명을 덧붙였다.
“말했다시피 초인이 된 거 자체가 비밀이니 변장만 완벽하면…….”
그런데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드웨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체 정신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일국의 왕비를, 아니 그 전에 자기 마누라를 뭐 어째요?!”
아. 그 뜻이었나.
드웨인의 분노를 그제야 이해한 로건이 헛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좋아하던데?”
“예?”
“왕비가.”
“……예? 뭐를요?”
“전장에 간다고 들떠 있던데? 꼭 보내 달라고 성화야. 그 사람, 각성 이후에 몸이 근질근질하다며 답답해했으니까.”
그 말에 잠시 멍해 있던 드웨인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흐흐. 진짜 다 때려치울까. 이놈의 미친 맥라인…….”
땅바닥에 주저앉아 중얼거리는 게, 영 상태가 좋지 않은 듯했다.
아끼는 수하의 건강을 걱정한 로건이 다음 말에는 더 충격을 받을까 봐 말을 아끼려는데, 한참을 뭐라 중얼대던 드웨인이 갑자기 퀭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갑자기 불안해서 그럽니다. 그럼 나머지 한 사람은요?”
“……커험. 흠. 흠. 나머지 한 사람이야말로 참 적당한 사람이 있지.”
“……괜히 뜸들이지 마시고요. 누군데요?”
이제는 낯빛까지 거무튀튀해진 드웨인이 대답을 재촉했다.
“거, 외부엔 중상을 입어서 골골대고 있다고 공표된 초인 하나 있잖아.”
그 말에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해 하던 드웨인은 이내 그 사람이 누구를 의미하는지를 깨닫고는 두툼한 볼살에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로건을 가리켰다.
“서, 설마? 폐하요?”
“그래. 내가 잠행을 좀 해 봤잖아. 나 눈동자 색하고 머리카락 색만 바꾸면 아무도 못 알아….”
“그럼 설마 또 릭이 폐하를 대행하는 겁니까!?”
‘참 장단 맞추기 힘드네.’
갑자기 엉뚱한 곳에서 폭발한 드웨인의 모습을 보며 로건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당장에라도 뒤로 넘어갈 것 같은 드웨인의 모습에 부드러운 목소리를 쥐어짜 그를 달랬다.
“왕비의 역할은 라일라가 할 거야. 딱 맞지? 중상을 입은 왕과 그 왕을 간호하는 왕비는 침소 근처에서 꼼짝도 안 하는 거지. 구실도 그럴듯하지 않아?”
“안 돼요! 절대 반대입니다! 절대!”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지나치게 흥분하는 듯한 가신의 표정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미안. 이미 결정했어.”
연합의 전쟁을 최대한 빨리 수습하고.
‘그 안에 제국의 수작이 있다면 그조차 부순다.’
언제나 그랬듯, 로건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