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89)
289화
“어서 옵셔! 남부 산맥에서만 나는 귀한 약초 있어요!”
“방금 들어온 칼론의 해산물들 있습니다! 냉기 마법에 소금까지! 아주 신선해요!”
“맥라인산 비단도 있습니다!!”
우리 왕국 특산물 중에 비단도 있었나.
빅토르는 시끌벅적한 시장을 가로지르며 여기저기를 살폈다.
새삼 낯선 곳에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지나치면서 본 잡화점 거울에 비친 얼굴 또한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검게 탄 피부에 갈색 머리, 푸른 눈동자.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
익숙하지 않은 임무.
익숙하지 않은 얼굴.
지난 일주일간 이곳, 타히티 공국의 수도 타히난에서 정보와 실제를 비교해 보며 느낀 점은 단 하나였다.
‘첩자든 세작이든, 아무나 하는 일은 아니야.’
모든 것이 어색하기만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임무에 필요한 능력의 9할은 무력이라는 것 정도일까.
타히티 공국에 여행 온 외국의 부유한 귀족이라는 설정이 아니었다면 금세 이상한 사람이라 주위의 시선을 끌었을 것이다.
‘뭐 지금도 아예 없는 것 같지는 않지만.’
빅토르는 골목을 돌면서 20m쯤 뒤에 따라붙은 남자를 확인했다.
자연스레 시선을 돌린 그는 다시 태연히 걸음을 걸었다.
‘좋지 않아.’
며칠 전에는 시장의 상인으로 만났던 자.
이런저런 품목을 추천해 주기에 제법 긴 대화를 나눈 자였다.
그때와는 또 다른 변장을 하고 있었지만, 인상이 아닌 기감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빅토르에게는 그것이 더 어색할 뿐이었다.
변장을 하고 뒤를 밟는 놈이라니.
‘한 놈이라는 보장도 없지.’
놈이야 본의 아니게 오래 접촉을 한 덕에 기감을 기억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작정하고 주변을 살피자, 숙소 근처에 항상 보이는 두 놈도 의심스러웠다.
중계 무역이 활성화된 도시, 또 관광 도시이기도 한 이곳에서 외부인을 이렇게까지 경계하던가?
‘그럴 리가 없지.’
그럼 정보가 유출된 것일까?
맥라인에서 이 일에 대해 아는 자는 주군과 자신, 데미안, 드웨인뿐이라고 알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지금 숙소에 같이 있는 조력자 하나 정도.
정보가 새어 나갔을 리는 없었다.
국보를 담보로 넘겨주었다는 트리아에서는 누가 의뢰의 실행자로 나섰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그쪽에서 샐 정보도 없었다.
이래저래 가능성이 낮은 추측들을 제외하니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놀러 온 한량을 털어먹으려는 양아치들? 허…….”
타히난에 그런 놈들이 꽤 있다고는 들었기에 일부러 귀족 신분을 선택한 것이었다.
‘귀족은 안 건드린다고 하지 않았나? 씁. 이거 잘못하면 괜히 일이 꼬일 것 같은데.’
빅토르는 점점 무거워지는 마음을 안고 일주일 새 익숙해진 숙소에 들어섰다.
관광을 온 귀족답게 제법 넓고 고급스러운 숙소 안, 역시나 적응 안 되는 얼굴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어. 그래서 공왕성은 직접 눈으로 봤고?”
금발 머리에 곰보 얼굴을 한 삼십 대의 장한.
본래는 갈색 머리에 깡마른 몸, 피곤한 얼굴의 소유자였던 마법사 그릭이 변신한 모습이었다.
여전히 적응되지 않은 그 모습에 빅토르가 반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까지는요.”
“……그게 어디까지를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확인은 됐다는 거지?”
“예.”
“왕실 구조도와 경계 병력 수준도 숙지했고?”
“예.”
빅토르의 확고한 대답에도 그릭은 걱정스러운 기색을 좀처럼 지우지 못했다.
마도사, 골렘마스터 클레이튼의 대제자인 그가 굳이 이 자리까지 따라온 이유가 무엇이던가.
변신 마법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함도 있지만, 이 충직한 어린 기사가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그 준비 과정을 돕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몇 주 되지 않는 그 준비 기간 동안, 그릭은 데미안이 만든 정보 조직 ‘불꽃의 눈’이 준 정보를 분석하며 깨달은 것이 있었다. 바로 왕국의 대영지 수준이라 폄하하고 있던 공왕성의 경비나 호위 태세가 혼자서 뚫을 수 있을 만큼 만만하지 않다는 것.
빅토르가 아무리 최상급기사라도, 세기의 천재라도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지금이라도 원조를 요청하는 게 낫지 않을까?”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겠어?”
걱정이 한껏 묻어나는 그릭의 말에도 빅토르는 그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릭 님은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뭐?”
“아무래도 날파리들이 꼬인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날파리?”
빅토르가 최근 제게 미행이 붙은 것을 말하자 그릭의 표정이 순간 좋지 않게 변했다.
“설마 계획이……?”
“아닐 겁니다. 무력이 형편없는 놈들이었습니다. 포스나 마나는 일절 느껴지지 않아요.”
“흐음…….”
눈앞의 천재 기사의 감각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고 있는 그릭은 그제야 빅토르의 설명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내가 남아 있는 편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에 좋지 않겠어?”
다만 그의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면, 저 혼자 도망치는 게 더 편합니다.”
“그, 그럴 거 같긴 한데.”
빅토르의 그 냉정한 말에는 그릭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변신 마법도 일주일은 유지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정말 혼자 하려고?”
“그렇다고 그릭 님의 골렘을 쓸 수는 없으니까요.”
잔소리가 이어지자 빅토르의 무표정한 얼굴에 얼핏 짜증의 기색이 떠올랐다.
거의 일주일 만에 보는 표정 변화와 함께 쏘아진 매서운 눈빛에 그릭의 목소리가 점점 더 쭈그러들었다.
“그거야 그렇지……. 난 그냥 걱정돼서…….”
“좋은 소식 전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돌아가십시오.”
결연한 얼굴의 빅토르를 보며 그릭은 그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3일 뒤, 혹시나 모를 양아치들의 방해를 우려한 빅토르가 바로 움직였다.
* * * ‘여기서 할 수 있는 조사는 다 했어.’
빅토르는 어두운 밤하늘에 어울리는 짙은 남색의 잠행복을 입고 조용히 그늘로 숨어들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귀신 그림자의 운신법. 자신이 생각해도 제 움직임은 무척 은밀하고 신속했다.
문득 이 수법을 가르쳐 준 주군의 목소리가 다시금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 어려울 것 같으면 바로 물러서라. 극단적으로 말하면 내가 직접 나서도 되는 일이니까. 변장만 잘 유지하면 된다.
– 대외적으로 난 중상으로 요양 중이야. 내가 작정을 하고 암살자 노릇을 하면, 스승님 다음으로 잘할걸? 아, 그 귀신 놈들은 빼고.
피식.
일국의 왕이 직접 암살자가 되겠다고 말하는 주군.
그 파격적인 행보는 정책이건, 전쟁이건 가리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리 농담이라지만.’
이런 일조차 주군이 직접 나서게 해서야 면목이 없다.
아무리 그 말이 옳다 해도 혹여나, 만에 하나라도 잘못될 확률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 왕이 해서는 안 될 일이니까.
빅토르는 작은 한숨과 함께 각오를 다지며 골목의 그늘 사이로 이동했다.
10일간 수집한 최적의 동선.
물론 공왕성에 들어간 뒤부터는 불꽃의 눈이 전해 준 정보에 의존해야겠지만, 그에겐 비장의 무기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지금 그가 입고 있는 옷.
무려 인식 장애 마법까지 걸려 있는 이 잠행복은 그 ‘귀신’들이 입던 옷이었다.
물론 단점도 있었다.
– 무슨 이유에서인지 원주인이 죽은 후로 마력이 서서히 흩어지고 있네. 이런 게 가능할 줄은 몰랐군. 이게 왜 어렵냐면 마학적 패턴…… 아, 자넨 관심 없지. 미안하네. 간혹 자네를 보다 보면 리아랑 착각될 때가 있어서…….
– 신기한 아티팩트라 연구가 필요하지만, 샘플이 열 개나 있으니 하나 정도는……. 적어도 한 달은 효력이 유지될 걸세. 가져가게.
클레이튼 님의 설명에 의하면 그 효능에 기한이 있었지만, 다행히 아직은 효력이 충분히 남아 있었다.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을 수도 있겠는데.’
이런 안일한 생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투지가 더욱 불타올랐다.
그것은 충성심과 별개로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 부딪치게 된 한계.
그 너머로 우연히 살짝 보게 된 새로운 세상은 오히려 심각한 갈증을 안겨 주었다.
한순간이지만 한계를 넘어 무한히 자유로워진 듯한 기분.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 온 세상을 품는 것만 같은 벅찬 감정.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전능감.
지극히 짧은 순간 겪은 그 감각들이 그에게 엄청난 갈망을 남긴 것이다.
게다가 수준이 비슷했던 왕비께서 그보다 먼저 그 한계를 넘어선 것을 본 이후로는 더욱 간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도 할 수 있어.’
그리고 그 갈망의 끝에서, 빅토르는 사실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주군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 자신의 인생을 관통하는 삶과 신념이 특성에 반영된다. 대다수의 기사들처럼 그저 강해지고자 한다면, 일반적인 특성을 얻을 뿐이야.
– 물론 내 스승님을 보면 그 역시 나쁘지는 않다만, 특이한 특성일수록 더욱 강해질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것은 그분도 동의하신 사실이야.
– 게다가 넌 누구보다도 남다른 인생을 살아왔으니, 네가 스스로 바라는 것을 잘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도록 해라. 그것이 선행되어야 네가 바라는 특성을 설계할 수 있다.
– 초인이 안 되면 어쩌냐고? 푸하하. 넌 분명 초인이 될 거다. 내가 장담하지.
그 가르침에 따라, 빅토르는 자신의 신념과 과거를 관통하는 큰 줄기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 특성의 시기와 종류까지 자신이 선택해서 발현하는 것. 난 폐하를 보고 나서 그게 다들 가능한 건 줄 알았다. 내가 세기의 이론을 정립했다고 확신했지.
– 하지만 또 생각해 보니 너무 이상한 거야. 무의식의 발현을 대체 어떻게 조절한단 말이야? 그런 의문이 들기 시작한 거지. 오러를 발생시키는 요령을 완전히 터득했으면서 한계를 넘는 시기를 조절한다? 특성 설계를 위해서? 그게 자제가 될 것 같으냐? 어림도 없지!
– 벌레에서 사람으로 진화하게 됐는데, 벌레가 그 시기를 조절할 수 있다고? 너도 찔끔 경험해 봤다며? 그치? 이상하지? 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하고 싶지? 그래. 폐하가 정말 이상한 거다.
또한 주군이자 스승이 말한 특성 설계의 개념을 창시한 자, 루터 카일 군단장의 말에도 깊이 공감했다.
게다가.
– 그게 가능한 시점에서 이미 사람의 한계를 벗어난 거지. 하지만 내 이론과 폐하의 실재를 통해서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 자기 자신의 인생과 신념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 그것을 더욱 강하게 염원하는 것. 그 염원이 인간의 한계를 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
– 그리고 그 파악이 정확할수록, 그 한계를 넘어서는 방향도 스스로 특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폐하처럼 스스로 특성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더라도, 어차피 얻게 될 특성을 더욱 강화하는 것은 가능할 거야. 어차피 가야 할 길을 명확히 가르쳐 주는 것. 그게 그 이론의 가장 큰 가치라고 생각한다.
루터 카일이 덧붙인 설명에 의하면 그 이론에 가장 부합하는 이는 바로 빅토르 자신이었다.
‘로니안이라면 그냥 강해지기만을 원했을 거야. 주군을 뛰어넘기를 바랐을 테지. 하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바라 왔던 꿈이 있다.
그리고 현재 바라는 꿈도 있다.
거기에 그 모든 것을 이뤄 준 이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그 모든 것을 다해서라도 지키고 싶은 이가 있다.
빅토르는 지금껏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관통하는 신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고, 그랬기에 스스로가 걸어가야 할 길도 알았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것은 분명했다.
‘생명이 간당간당할 만큼 위험한 실전. 혹여나 실패한다면……, 아니, 아니야. 실패 안 해.’
빅토르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불길한 상상을 지워 냈다.
이 임무가 아니라면 어디 전쟁터나 마경에 뛰어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계를 돌파할 만한 위험을 마주할 수 있을 테니까.
어쩌면 자신은 전생에 싸우지 못해서 속이 터져 죽은 미친놈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미친 살인마였거나.’
그렇게 실없는 상상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몸을 날리다 보니, 저 멀리 공왕성이 보였다.
이제부터는 정말 아차 하면 죽을 수도 있다.
잡념을 털어 내고 감각을 바짝 조이는데,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이질적인 감각이 그를 엄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