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9)
29화
“……뭐?”
로건의 말에 또 한 번 모두가 놀랐다.
이번 전쟁으로 확 바뀐 로건의 이미지였지만, 이 자리에 있는 대다수가 과거 파혼사건 당시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로건이 돈을 좋아한다는 이미지는 바뀌지 않은 것이다.
“포상을 안 받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돈으로 받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 말에야 역시나 하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어진 말에는 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돈 대신 땅으로 받고 싶습니다.”
“……지금 영지 내에 사유지를 만들겠다는 말이냐?”
한없이 호의적이던 패드릭의 표정 역시 살짝 굳었다.
하지만 로건의 태도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예.”
“허어…….”
패드릭의 깊은 한숨과 함께 관리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말도 안 됩니다. 우리 영지 사정에 사유지라니!”
“대공자의 전공이 아무리 크더라도 땅을 주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이 작은 영지에서…….”
“옛 백작가 시절에나 가능한 이야기를…….”
오죽하면 금기어를 꺼내 눈총을 받은 이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예전이라면 일고의 가치도 없이 무시당했을 이야기에도 패드릭이 우선 좌중을 진정시켰다.
“일단 물어나 보자꾸나. 왜 갑자기 땅을 달라고 하는 것이냐?”
자신에 대한 평판이 확 변했다는 것이 새삼 피부에 와닿았기에 로건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직도 영지에 돈이 많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 돈은 영지를 위해 쓰시고, 저는 대신 서쪽 황무지의 야산을 하나 받아 개발을 해 볼까 합니다.”
“황무지? 야산?”
“예. 테스론 영지와의 경계선 부근의 하천을 끼고 있는 그 야산 하나면 족합니다.”
어느 방향을 보나 황량한 맥라인 영지였지만 몬스터들이 많은 남부 다음으로 쓸모없는 것이 서부의 황무지였다.
야산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나무조차 몇 그루 찾아보기 힘든 황량한 불모지였다.
“……하필 그곳을?”
“거기 뭐 있어?”
“있긴 뭐가 있어.”
“근데 왜……?”
관리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했고, 그것은 패드릭도 마찬가지였다.
“그 땅을 개발하겠다고?”
“땅속에 금이라도 묻혀 있을 줄 누가 압니까?”
엉뚱한 로건의 말에 모두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땅의 금광은 이미 왕실에서 다 개발…… 아니, 됐다. 내가 무슨 설명을. 그냥 그 땅이 갖고 싶다는 뜻이겠지?”
골머리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은 가주의 말에 로건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대답에 가신들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시 대공자의 알 수 없는 괴행이 도진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곳에 모인 모두가 곧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어차피 쓸모없는 땅인데 대공자도 만족하고 예산도 아끼고. 나쁠 것이 없는 일 아닌가.
“좋다. 로건의 포상은 그 야산…… 드웨인, 지도 좀 가져오게. 정확히 어디……. 으음, 그래 이 산을 사유지로 내린다.”
덕분에 반발은 사라졌고 너무도 쉽게 허가가 떨어졌다.
‘됐다!’
로건은 회의실 탁자 아래서 남몰래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깟 30만 골드보다 이 땅이 훨씬 중요해.’
영지전이라는 고비를 넘은 것만으로도 가슴은 벅차게 뛰고 뿌듯한 감정이 영혼까지 고양시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 느낌에 취해 멈춰 서선 안 되었다.
‘앞으로 9년 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답답해지는 재앙이 덮칠 것이다.
왕국의 변방 귀족 가문이, 그리고 그 자식 중 하나에 불과한 자신이 제국의 공격을 막아 낼 결정적인 변수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전에 벌어질 왕국 내부의 재앙도 만만치는 않았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그 자신도, 가문도 넘어야 할 산이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지금 이 선택 역시 주도적으로 그 재앙들을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가문보다 내가 그것을 가지는 게 미래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쉽다.’
회의는 곧 끝났고, 로건은 바라던 모든 것을 얻었다.
* * * 회의실을 나선 직후, 로건은 오랫동안 마음에 걸렸던 또 하나의 짐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 짐은 언제나 그랬듯이 로건에게 날을 세웠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어머니!”
“무슨 꿍꿍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속아 넘어갈 것 같아?!”
로니안의 만류에도 버럭 소리를 지르는 새어머니의 핏발 선 눈과 창백한 안색은 이제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어머니! 제발!! 형님, 죄송해요. 어머니가 외가의 일로 상심하셔서 지금…….”
“괜찮다, 로니. 괜찮아.”
당황하는 동생에게 부드럽게 웃음 지어 준 뒤, 다시 새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이어진 원한이 있다 한들 지금은 실권을 잃은 가모에 불과했다.
더 이상 그에게 어떤 위협도, 방해도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이 비틀린 관계를 바로잡을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변명이 아닌 사과로, 진심으로 받아들여 주지 않을까.’
거리끼는 마음이 조금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각오는 어렵지 않았다.
로건은 숨을 고르며 머릿속에서 말을 정리한 뒤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지난 몇 년간 제가 보였던 모습들이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은 압니다. 질투심과 열등감에 휩싸여 저질렀던 일들, 저 역시 지극히 후회하고 있습니다.”
“거봐, 로니안! 저놈도 인정했잖아! 모두 저놈이…….”
“어머니! 제발 그만하세요!”
메리안의 허리를 부여잡은 로니안이 슬픈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형님, 어머니가 지금 정상이 아니세요. 지금 그런 얘기를…….”
“그냥 들어라, 로니안 맥라인. 사실 내가 진짜 사과해야 할 것은 너니까.”
“예……?”
“돌아온 직후부터 미안하다고 말은 했지만 무엇이 미안한지는 아직도 얘기하지 못했지. 수십 년 동안 쌓인 후회도 비겁한 본성을 쉽게 이기지는 못한 모양이야.”
“……형님?”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에 로니안이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너도 알고 있었잖아, 로니. 넌 바보가 아니니까.”
그리고 이어진 말 한마디에 로니안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지난 몇 년, 나는 너를 증오했다.”
그 어떤 꾸밈도 없는 단도직입적인 고백에 메리안조차 할 말을 잃었고, 로니안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했다.
그 모습에 로건은 씁쓸하게 웃었다.
“너를 미워함으로써 나의 못남을 회피하려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한심한 시절을 진심으로 후회한다, 로니안.”
로건은 애써 동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로니안, 내 동생아. 지금에서나마 네게 정식으로 사과하마. 정말 미안했다.”
새어머니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이고, 어색해진 동생의 표정은 제대로 쳐다보기도 힘들었다.
말을 하다 보니 괜히 울컥한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이 쉬운 말을 하지 못해 수십 년을 후회했다.
과거로 돌아와 가문의 위기를 한 차례 넘기고 나서야 진솔한 사과를 할 용기가 생겼다.
‘잘한 일로 잘못한 일을 덮을 수는 없는 것인데. 여전히 어리구나, 로건 맥라인.’
후련함과 별도로 자조 섞인 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괜찮아요, 형님.”
잠시 굳어있는 듯했던 동생이 이내 밝게 웃었다.
“그때도 전 괜찮았어요.”
“……뭐?”
전생에서도, 지금도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뜻밖의 말이었다.
“제가 잘하면, 언젠가는 제가 알던 형님으로 돌아오실 거라 믿었거든요. 실제로도 이렇게…… 하하.”
미소 짓는 동생의 모습에 헛웃음만 나왔다.
이렇게 쉬운 것을, 왜 그 오랜 시간을 망설였을까.
로건은 아직도 불신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새어머니를 보며 맹세하듯 말했다.
“어머니. 제가 로니안을 해치려 했다면 이번 전쟁에서만 해도 기회는 많았습니다.”
“그런…….”
“오히려 절 구해 주셨죠. 형님이.”
“……제가 로니안을 위하는 마음은 진심입니다. 가능하면 로니안이 후계자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진심이구요.”
“예? 형님. 그건…….”
“당장 믿어 달라는 말이 무리라는 것은 압니다. 그러니 지켜봐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새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로건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 * * 논공행상이 끝났음에도 전후 처리에 바쁜 맥라인 가문의 지휘부는 정신이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로잡은 포로 기사들과 병사들의 전향 문제였다.
병사들이야 굳이 설득도 필요 없었지만 기사들은 시간이 좀 필요했다.
사회에 암묵적으로 퍼져 있는 기사의 의무, 그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 바로 충성심이었다.
섬기던 군주를 버리고 다른 군주를 모신다는 것은 그 기사에게 배반자라는 낙인을 찍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귀족사회 어디에도 발붙일 수 없는, 신분 상승의 길을 막아버리는 족쇄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나라, 같은 왕을 모시는 영주라는 측면에서 그나마 설득의 여지가 있었다.
가장 근본적인 충성의 대상은 동일하고 그 밑의 사람만 바뀌는 것이라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논리였지만, 이런 명분은 기사 개개인에게 정말 중요했다.
그런 명분조차 없다면 죽거나, 오명을 뒤집어쓰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테니까.
‘명분이 있으니 월봉이야 좀 적더라도 다 전향을 택할 거야.’
기사도 사람이고 하만 테스론은 빈말로도 좋은 주군이라고 볼 수 없는 놈이었다.
물론 체면을 생각해 줄다리기하는 놈들도 있을 테니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로건의 입장에서야 왜 그러는지 이해 못 할 일이었지만 그런 것이 중요한 사람도 있으니까.
그 외에도 테스론 영지와 맥라인 영지의 행정적 처리 문제와 치안 유지를 위한 병력 문제, 세금과 세율 그리고 영지 수입의 문제.
남은 문제 모두가 하나같이 단시일 내에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그러나 아직 공적인 지위가 없는 로건은 그 상황에서도 한적하게 자신만의 길을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후계자가 되면 안 좋다는 거야. 꼼짝없이 잡혀 있을 뻔했잖아.’
기껏 인생의 고비 하나를 넘겼는데 그 여운을 즐길 틈도 없이 서류에 치여서 살 뻔했다.
‘무엇보다 지금 시점에 그래선 곤란해.’
여유로워 보이던 로건의 눈빛에 불꽃이 이글거렸다.
간신히 작은 파도를 넘었지만 가문에, 이 나라에 덮쳐 올 거센 물결은 이제 시작이었다.
나라 자체가 멸망하게 된 제국의 침략이 최후의 난관이라면, 지금으로부터 1년 뒤인 내년 겨울에 벌어질 일은 나라 전체가 쇠락하는 시발점이 된다.
바로 현(現) 왕, 사무엘 폰 그란디아의 죽음.
아무리 왕실의 힘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왕은 이 나라의 정명한 지배자였다.
그런 왕이 별다른 조짐도 없이 갑작스레 사망하는 사고는 왕국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국민들의 심리적인 충격이야 솔직히 별것 아니었다.
하지만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왕국 수도 그랑에서부터 시작된 전쟁. 각 왕위 계승권자 별로 파벌이 나뉘어 발생한 내전은 향후 3년을 이어지며 왕국의 전력을 대폭 깎아 먹었다.
그리고 그 전력이 회복되기도 전에 제국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사실상 나라를 망하게 만든 첫 번째 원인인 것이었다.
특별히 따르는 파벌도 없는 맥라인 영지는 이대로라면 중립을 지키며 웅크리는 것만으로 그 태풍을 비껴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저 그 내전이 만들어 낸 수많은 영웅과 악당의 이야기들을 한발 물러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만으로 관객처럼 즐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기회를 그냥 날릴 수는 없어.’
로건은 그 혼란기를 틈타 적극적으로 가문의 세력을 확대할 생각이었다.
최대한 빨리 과거 백작령의 영토를 회복하고 서남부 지역의 로드 자리를 되찾도록.
그리고 가능하다면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팽팽했던 내전을 종식시킬 카드가 될 수 있기를 바랬다.
아니면 그보다 더…….
짝.
‘정신 차리자. 이제 간신히 한고비 넘었어. 이런 고민을 할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다행이야.’
끝없이 뻗어 나가는 상상을 뺨을 두드리며 털어 낸 로건은 당장 해야 할 일을 다시 생각했다.
‘군비를 확장하자는 것이든 영지전을 일으키자는 것이든 지금 말해 봤자 다시 정신 나갔다는 소리나 들을 거야.’
로건의 입장에서는 한창 전력을 증강해야 할 시점이지만 이것을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우선은…….’
‘그것’을 손에 넣고 가문의 자금력을 틀어쥘 필요가 있었다.
군비를 늘리건 전투를 대비한 인재를 고용하건, 자신의 개인 자금을 운용하는 것은 뭐라 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그것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할 때였다.
‘만약 가문에서 영지전을 거부한다면, 내가…….’
“도대체 어딜 가는 겁니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번져 가는데, 일순 로건의 상념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건이 뒤를 돌아보자 뚱한 표정의 드워프 하나가 그의 뒤를 천천히 따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 로건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충분히 쉬었잖아. 슬슬 일할 때도 됐지.”
“불안해서 그러오, 불안해서. 주인님이 웃으니까 또 그 물건들 쥐어 짜낼 때 생각이 나서…….”
“걱정하지 마. 이번에는 분명히 네가 좋아할 만한 일이니까.”
“내가 뭘 좋아할지 알고요?”
퉁명스러운 응대에도 로건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른 인간과는 다르게 저 잊힌 종족들은 종족 공통의 취향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그리고 로건은 지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저 드워프의 취향에 맞을 것이라 확신했다.
“잔말 말고 따라와 봐. 실망하지 않을 테니.”
“그러면서 왜 감옥으로 가는 것이오. 설마 좀 놀았다고 감옥에 처넣으려는 건…….”
“쓸데없는 상상하지 마, 하마르. 앞으로 너와 같이 일해야 할 이들을 데리러 가는 거니까.”
“감옥으로 말이우?”
“그래.”
하마르는 황당해했지만, 그 말은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맥라인 성의 지하, 포로들이 갇혀 있는 감옥.
그중에서도 기사들이나 가둬 놓는 튼튼하고 육중한 철문 안쪽의 한쪽 구석에는 한눈에 봐도 별 무력은 없을 것 같은, 털북숭이 중년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오호! 진짜 왔어! 그 도련님!”
“오오! 진짜네!”
“근데 옆에는 뭐지? 사람이 아닌…….”
“드, 드워프다!”
“뭐? 드워프?!”
그들이 로건과 함께 나타난 하마르를 보고 눈을 빛냈다.
“뭐, 뭐요. 저 인간들은?”
노예시장에 있을 때조차도 느껴보지 못한 눈길이었다.
하다못해 그놈들 전부가 털투성이의 중년 남성들이었으니, 하마르로서는 턱수염이 곤두설 지경이었다.
“자칭 지질학자라던가 광산 전문가라던데, 내가 보기엔 그냥 땅파기에 미친 놈들이야.”
“……광부란 말이요? 갑자기 웬 광부를?”
“필요하니까.”
“예?”
“광산을 개발할 생각이거든.”
“예엑!?”
놀라는 드워프의 모습을 보며 로건은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