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94)
294화별조차 거의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하늘 아래.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모닥불이 숲속의 작은 공터를 밝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우리 둘이서만 나오는 건 처음이던가요?”
짧은 ‘갈색’ 머리에 같은 색의 눈동자를 가진, 가죽 경장 갑옷을 입은 여자가 그렇게 묻자 비슷한 복장을 한 ‘갈색’ 머리 남자가 말을 받았다.
“……그렇네요.”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남자는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별이라도 많으면 좋았을 텐데.”
“난 이대로도 좋은데요, 뭘.”
모닥불 옆에서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에일렌이 그렇게 말하자 로건 역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전장으로 향하는 길.
긴장감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길에서 맞이한 별 없는 밤하늘은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옆에 있는 사람 덕분일까.
괜히 감상에 젖어 불쑥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내가 괜히 무리한 계획을 진행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 안 해 봤어요?”
“……다 미래를 생각해서 하는 거잖아요.”
“그래도 내 생각이 잘못됐을 수도 있잖아요. 이미 여러 번 어긋나기도 했었고.”
“이번에는 괜찮을 거예요.”
“음?”
“이렇게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을 똑같이 맞출 수밖에 없다는 것 빼고는 확실히 설득력 있는 작전이라고요.”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의 얼굴.
비록 변신 마법 덕분에 다소 생소한 느낌이 함께했지만, 그 말 덕분에 조금 더 자신이 생겼다.
“아무리 마도사라도 일단은 대지 속성의 마법사니까요. 어쩔 수 없는 거겠죠.”
물론 굳이 다른 색으로 못 바꿀 것은 없었지만, 그랬다가는 마법의 유지 시간이 짧아진다는 클레이튼의 설명이 있었다.
“흐음. 뭐, 클레이튼 공이 이 새로운 아티팩트를 만들어 낸 것만 해도 분명 훌륭한 성과겠죠?”
에일렌이 품 안에 넣고 있던 신분패를 슬쩍 들어 올렸다.
푸른빛이 번뜩이는 신분패.
보기에는 그저 귀족임을 증명하는 단순한 증표지만, 지금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마도사 클레이튼이 직접 만들어낸 변신용 아티팩트였다.
“예. 최근에 만들어 낸 성과라더군요.”
정확히는 이그니스와 크라우네가 남긴 연구 일지 덕분이지만, 굳이 그 세세한 내용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 연구 일지가, 어쩌면 실제로 존재하는 집단의 것이라면 더욱.’
검은 뱀을 상징으로 삼는 마법사들의 집단이라.
다시금 떠오른 그 불길한 문양에 로건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는데, 에일렌이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런데 전 좀 마음에 안 들어요.”
“음? 뭐가요?”
“너무 평범하잖아요. 기왕이면 좀 더 잘생긴 얼굴로 해 주지.”
“푸핫!”
실소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하는 추적을 염려하여 에일렌의 남장을 계획하고 만든 얼굴은 분명 평범했지만 본래의 얼굴이 조금은 남아 있어 선이 고왔다.
괜스레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씩 웃는 아내의 모습이 자신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함임을 알기에, 로건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거봐요.”
“응?”
“그 얼굴도 웃으니까 훨씬 낫잖아요. 서둘러야 하는 건 알지만, 적어도 며칠 간은 우리 둘만의 시간인데 여유를 좀 가져요.”
아무래도 너무 굳은 표정으로 있었던 모양이다.
로건 역시 같은 이유로 꽤 험상궂은 얼굴로 바뀐 상태였으니까.
“……미안해요.”
“미안하단 말도 그만하구요.”
“아, 그…….”
피식.
“우리는 이대로면 충분하잖아요.”
담담하게 울려 퍼지는 에일렌의 목소리에 로건 역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충분히.”
남들은 재미없는 커플이라 하지만, 그들은 지금처럼 단둘이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로건은 에일렌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추며 미래에 대한 걱정을 잠시나마 내려놓았다.
그로부터 3일 뒤.
“여기가 갈림길인가요? 아쉽네요. 이제부터 당신은 리버티 출신의 가일인 거죠?”
그렇게 묻는 에일렌의 목소리는 로건만큼이나 낮게 변조되어 있었다. 남편과 함께하는 며칠간만이라도 남겨 두려 했던 긴 머리 역시 목에도 닿지 않게 짧아진 상태였다.
에일렌의 변신이 이제 완전해진 것이다.
“맞아요. 당신은 테로난 출신의 아머드가 되는 거고.”
“……몸조심해요.”
“당신도.”
로건은 갈림길 중 하나로 사라지는 아내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몸을 틀었다.
왕이기 이전에, 남자로서 제 아내를 전쟁터로 밀어 넣는 것이 미안하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제국전도 아니고 소왕국 연합의 전쟁에서 초인을, 그것도 방어형 특성을 각성한 초인을 걱정하는 것은 괜한 기우일 것이다.
로건은 자꾸만 따라가고 싶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자신이 가야 할 길로 향했다.
* * *
“조던 말린즈 님의 추천으로 온 가일이라고 한다.”
로건이 리버티 왕국의 수도, 리버스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하지만 전쟁을 앞둔 나라의 왕성에 그 한마디 말로 들어설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로건은 몸소 ‘은빛’ 오러를 꺼내 보였고.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의 앞을 막아섰던 경비병들은 강철을 무처럼 잘라 버리는 퍼포먼스를 확인한 뒤에야 황급히 왕궁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 초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불과 30여 분 후.
조던 말린즈와 비슷하게 생긴 대머리 관료가 날 듯이 달려 나와 로건의 앞에 섰다.
“헉. 헉. 가, 가일 님이십니까? 아쉽지만 조던 말린즈 대신은 병참 점검차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에릭 그리스라고 합니다.”
잘 알지.
‘그래서 내가 이리로 온 것이니.’
아무리 변장을 하여 외모를 바꾸었다고는 하나, 자신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 조던이 혹시라도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면 곤란해질 테니까.
다만.
“죄송합니다만, 실례가 아니라면 징표를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신분을 증명하기 위한 절차는 어쩔 수 없었다.
로건은 말없이 조던 말린즈의 울퉁불퉁하게 쪼개진 신분패 반쪽을 내밀었다.
달칵.
품 안에서 나머지 신분패 조각을 꺼내 맞춰 본 대머리 대신, 에릭 그리스는 이내 환하게 웃으며 즉시 허리를 숙였다.
“리버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가일 공.”
“별말씀을. 나도 리버티 출신인데.”
설정상의 말일뿐이었지만 에릭의 환한 웃음은 더욱 진해졌고, 그로부터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로건은 리버티의 국왕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대가 바로 그 원군인가?”
국왕과 로건. 그리고 국왕의 옆에 선 기사 한 명. 그렇게 단 셋만이 자리한 집무실.
“그렇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로건이 그저 고개만 까닥이며 인사를 끝내자 국왕의 옆에 서 있던 노년의 기사가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와 동시에 그 기사에게서 뻗어 나온 유형의 기세가 로건의 전신을 내리눌렀다.
– 꿇어라.
‘저자가 군터 리버티인가.’
직접 말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오연하기 그지없는 태도는 그리 말하고 있는 듯했다.
대놓고 실력을 시험해 보겠다는 그 도발에 로건은 눈을 빛내며 응했다.
우우웅.
파지직.
둘 사이의 공간이 파열음과 함께 일그러지며 사방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그에 안색이 침중하게 굳어진 노기사, 군터가 자신의 왕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거의 저에 준하는 수준입니다.”
그에 국왕이 놀란 기색으로 로건을 바라보는데, 로건으로선 솔직히 좀 우스운 심정이었다.
‘지금의 루터 공과 비슷한 경지다. 물론 그것도 대단하긴 하지만.’
강3국이라지만 그래 봤자 연합의 일각.
그 나라의 유일한 초인이자, 특이하게도 왕제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군터 리버티. 그의 경지는 오러유저 중급으로 결코 무시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일국의 유일한 초인의 수준이 고작 이 정도라는 게 다소 실망스러웠던 것이다.
절로 왕국 연합과 맥라인의 차이, 나아가 제국과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놀랍군. 잘해야 삼십 대로 보이는데.”
“전하. 외견일 뿐입니다. 실제로는 훨씬 나이가 많을 것입니다. 물론 그래도…….”
군터의 말대로 오러유저는 대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지만, 그것은 경지를 달성한 후에 외양이 젊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장년도 아니고 청년으로 보이는 경우는 한 가지뿐이다.
“……30대에 경지를 달성했다는 말입니다만.”
“뭐? 믿을 수가 없군. 어찌 자네 같은 자가 알려지지 않았단 말인가?”
“그러게 말입니다. 맥라인의 전력이 대단하다더니, 이제야 믿을 수 있겠습니다.”
좀 전에 자신을 적대하던 모습은 깨끗이 사라진 듯, 군터는 오히려 호의 어린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이는 로건, 아니 가일이 리버티의 원군이기 때문이겠지만 아마 다른 이유도 있을 터였다.
‘내가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해서겠지.’
우웅.
일부러 그리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현재 ‘은빛’의 오러를 발현하는 가일의 경지는 분명 막 중급에 발을 걸친 수준이었으니까.
그것은 자신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포스를 억지로 변화시킨 데에 따른 대가였다.
완숙한 오러유저 상급이 되어 최상급의 경지를 넘보고 있는 지금에서야 할 수 있게 된 재주. 물론 그조차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 단순히 색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본질을 주시하고 근원을 움직이라 말씀드렸더니 아예 본질을 바꿔 버리다니요.
– 그러고도 몸이 멀쩡하다는 게 더 대단합니다. 정말 제 제자라지만 폐하의 재능은…….
스승조차 감탄한, 하지만 도통 사용할 일이 없을 것 같던 재주가 엉뚱한 곳에서 훌륭하게 쓰이고 있었다.
로건은 자신의 연기가 완벽하게 먹혀들었다는 것을 자축하며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저는 리버티 출신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 말에 왕은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암, 그렇고 말고! 군터가 나를 지키고 자네가 전장에 나간다면 전쟁이 훨씬 쉽게 끝나겠어.”
그 군터 경도 직접 나서면 훨씬 쉬워질 것 같습니다만.
권력자가 자신의 보신을 우선하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로건은 새삼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오면서 보니, 바로 전쟁이 벌어질 듯한 분위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아, 물론이지. 말해 주고 말고. 군터.”
“예, 전하. 지금 상황은…….”
그렇게 듣게 된 연합의 상황은 로건이, 그리고 불꽃의 눈과 데미안이 예측했던 것과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 3국의 억지 주장을 참지 않겠다.
연합에 속한 4국은 강3국의 선포에 마주 전쟁을 선포했다.
타히티만 정벌하겠다는 말을 믿을 바보는 없었을뿐더러, 그다음 수순이 어찌 될지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다.
“이번 사건의 주동자라 할 수 있는 트리아 왕국에서의 병력 동원이 늦어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일세.”
“예?”
“핑계야 그럴듯하게 대고 있지만, 가장 먼저 전쟁을 주장한 자들이 준비를 안 하고 있었다는 게 말이나 되나? 그런데 정보원의 말에 따르면 아무래도 그게 진짜 같아서 더 문제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전쟁을 입으로만 치를 심산이었던 것처럼 준비가 덜 됐었다는군.”
그 말에 로건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지만, 군터도, 국왕도 그 감정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하여튼 트리아도 이제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4국은 타히티의 정세 때문에 제대로 힘을 합치지 못하고 있으니 곧 전쟁이 시작될 걸세.”
“우리는 그 전쟁의 선봉으로 자네를 세우고 싶네.”
타국의 원군을 선봉으로 세우겠다.
다소 염치없는 소리였지만, 그 원군이 초인이라면 또 얘기가 달랐다.
게다가 그것은 로건 역시 원했던바.
“알겠습니다. 전쟁은 최대한 빨리 끝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로건은 진심을 숨긴 채, 또 다른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렇게 그가 전쟁이 시작될 국경으로 파견된 것은 그로부터 불과 이틀 뒤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