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297)
297화 ‘이상해…….’
로건은 후퇴하는 적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순히 3국 연합이 트리아를 무시하고 모두 이곳에 뭉쳐서 덤빈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병력이 훨씬 많았음에도 적에게 박살이 났다. 병사들은 물론, 지휘관들도 멘탈이 붕괴될 만한 패전이다.
그럼에도 일반 병사들을 제외한, 정예로 추정되는 이들은 금세 정신을 추스르고 일사불란하게 도주하고 있었다.
그것도 눈앞의 왕성이 아닌 동쪽의 다른 성으로.
“로멘 왕국에 왕성보다 견고한 성이 있나? 전략적으로?”
“……없습니다. 타론 성이라고 성이 하나 있긴 한데, 요새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동쪽에는 연합의 국가뿐이니까요.”
카릴 자모드의 태도는 어느새 확 달라져 있었다.
반존대에 무시로 일관하던 지난날을 반성하듯, 공손한 말투에 고개조차 반쯤 숙이고 있었다.
스스로 아랫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듯한 자세.
하지만 온전히 그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직속 부하들도 그 모습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방금 전투에서 로건, 아니 가일이 보여 준 모습은 압도적이었으니까.
– 군터 대공께서 오셨어도 저렇게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도 직접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지휘관들 사이엔 어느새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왕국의 새로운 최강자가 등장했다는 인식이 그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것이다.
물론 로건으로선 그야말로 안중에도 없는 시선들이기에, 그는 그저 카릴의 말을 들으며 안색을 찌푸릴 뿐이었다.
“그럼 적들이 왜 왕성이 아니라 동쪽으로 도망가는 거지?”
“그나마 남은 아군을 따라간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가일 님이 놓치신, 아, 아니 가일 님을 피해 도망간 자가 로메로 왕국의 칼툰이라는 자였으니까요. 일단 살아남은 지휘관 밑으로 남은 병력을 모으려는 듯합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찜찜한데. 왜 여기에 연합군이 있는지도 그렇고.”
“지금 바로 알아보고 있습니다. 곧 연락이 올 것입니다.”
“그래. 그럼 바로 알려 주게.”
“물론입니다.”
당최 누가 최고 지휘관인지 모를 대화였지만.
– 대승 직후에도 곧바로 그 이후를 생각하시니, 역시……
이미 콩깍지가 단단히 씌어 버린 지휘관들의 눈에는 그조차 멋져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승리를 거둔 리버티군이 로멘의 수도 라일에 들어섰을 때, 로건의 찜찜함은 극에 다다랐다.
“왕과 식솔들의 모습이 흔적도 없습니다.”
“물자도 전부 증발한 것 같습니다.”
연이은 보고는 로멘 왕실이 이미 다른 곳에서의 총력전, 혹은 회전에서의 패배를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연합군의 규모로 볼 때 후자일 확률은 낮으니 결론은 하나였다.
“어제 그 병력이 다가 아니었다는 말이군. 아직 도착하지 않은 다른 원군이 더 있다는 소리거나. 이거, 약 4국이라는 명칭엔 어울리지 않는데?”
회전에서 죽거나 포로로 잡힌 병력만 전체의 1/3이었다.
사기가 크게 떨어졌겠지만, 남은 병력의 숫자만 해도 리버티의 전력에 준한다. 거기에 다른 병력이 또 있다면, 아직 완전히 승세를 잡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카릴의 생각은 달랐다.
“원군이요? 원군이 올 만한 나라라고 해 봤자 칼론 정도인데, 칼론은 해상 전력이라면 몰라도 육군은 별거 없습니다. 그냥 만일을 대비한 대처였을 겁니다.”
타히티는 공국 자체가 혼란에 빠진 것을 생각하면 회전에서 보여 준 것만도 과하다.
로멘과 로메로, 두 쌍둥이 왕국의 병력 또한 회전에서 보여 준 것이 거의 다일 거라고 카릴은 확신했다.
더구나.
“또 칼론을 제외한 나머지 삼국에는 초인도 없습니다. 가일 님이 함께하시는 이상, 저희의 승리는 확정적입니다.”
카릴은 그리 말하며 씩 웃었다.
‘왕성에 처박혀 있는 초인도 직접 나서면 더 빨리 끝나지 않겠냐.’
그 웃는 얼굴을 보며, 로건은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진심을 꾹꾹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국왕의 보신을 위한 과한 호위가 자칫 리버티의 패전으로 이어질 뻔했지만 그에 대한 지적은 없다.
‘이걸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충성심이 강하다고 해야 할지…….’
자신 덕분에 이긴 전쟁이라 굳이 잘못된 점을 지적하지 않은 건지는 몰라도 외부인으로서는 한심하게 보일 뿐이었다.
“뭐, 나야 좋지만.”
“예?”
“아니, 아니야. 그래서 트리아의 소식은? 일이 이렇게 꼬였는데 아직도 연락이 없나?”
“그, 그게 재촉은 하고 있습니다만…….”
그 난처한 표정을 보니 아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라 로건은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다행히 바로 다음 날, 기다리던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그 소식은 예상 이상으로 달갑지 않은 내용이었다.
– 트리아 왕성에서 영문 모를 테러 발생. 트리아 국왕 라몬 1세 사망.
– 트리아 국정 마비. 진군하던 군대 회군.
제국의 수작이다.
로건은 직감적으로 그 사실을 알았지만, 여기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짜증과 분노는 이어지는 말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엿 같은 말이군. 이런 중요한 정보를 이제야 알았단 말인가?”
“트리아 왕실에서 계속 숨겼던 것 같습니다. 라몬 1세가 자식이 워낙 많아서 왕위 계승 문제가 복잡하다 보니…….”
그 보고를 듣고 있던 이들이 제각기 다른 곳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비공식적이지만 사실상 군대의 지휘관이 된 로건은 냉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적들은 그 정보를 미리 알고 저리 연합까지 결성해서 준비했는데, 우리는 이제야 그 정보를 접하는군. 혹시 내가 우리 군의 문제에 대해 또 모르는 점 있나?”
카릴 자모드도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 다른 이들이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라고 생각했는데.
“테로난도 고전하고 있다 하니, 오히려 잘된 일 아니겠습니까? 이대로 승기를 잡아 3국을 제압하면, 저희 리버티가 연합의 최강국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반색을 한 참모의 말이 회의장의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
“확실히…….”
“과연…….”
“그럴듯해. 아니, 확실히 그렇겠군.”
카릴 자모드 역시 반색하며 로건을 바라보았지만 로건은 웃을 수 없었다.
“테로난이 고전 중이라고?”
“칼론의 초인인 해일의 마도사, 구스타프는 해전에서는 무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애초에 테로난은 칼론만을 감당하기로 한 것이었지요.”
해일의 마도사.
순간 그곳으로 가 있을 에일렌이 걱정되었지만,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다.
이제는 초인이 된 반려를 믿어야 했다.
“확실히. 그렇게 되면 본국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과겠군.”
물론 그렇게 될 리는 없겠지만 말이야.
‘제국이 연합의 혼란을 바랐다면 고작 트리아에만 손을 댔을 리가 없어.’
그런 생각에 억지 미소를 짓는데.
– 타론 성에서 적들이 출진했다는 보고입니다!
그 생각을 증명하듯 곧바로 예상치 못한 보고가 들어왔다.
“잘못 본 거 아냐?! 다시 확인해!”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
“그놈들이 죄다 돌았나?”
불과 이틀 전, 대패했던 적군이 이곳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
그 상식을 벗어난 보고에 지휘부에선 다시 난리가 났다.
* * *
“전군 출진 준비!”
뿌우우우.
하달된 명령에 나팔 소리가 울렸다.
생사를 가르는 전장에서 얻은 극도의 긴장감을 풀기에 이틀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더구나 아군의 수뇌부에서 적군 왕성의 약탈까지 금한 상황.
전장의 스트레스를 동료와의 싸움 등으로 풀거나 그저 끙끙 앓고 있던 리버티의 병사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물론 그 신경질적인 나팔 소리를 유발한 적들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 분노는 그곳으로 향했다.
“이게 무슨 일이래?”
“패퇴한 놈들이 어딜!”
“또 박살 내 주자고!”
“은빛 사신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풀지 못한 스트레스는 이내 사기로 전환되었고, 라일을 나서는 리버트군의 기세는 하늘을 뚫을 듯했다.
‘이걸 말릴 수도 없고.’
적군의 지휘관이 바보라거나 미쳤다기보다는 다른 노림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이겼던 군대다.
이제는 병력 차도 얼마 나지 않는 적군이 굳이 성에서 기어나와 불리한 회전을 자청한다는데, 군대의 출진을 막을 명분은 없었다.
확인되지 않은 추측만으로 병사들의 사기를 꺾는 것은 더욱 미련한 짓일 테니까.
하지만 다시 시작된 회전에서 로건을 비롯한 리버티군은 적군의 노림수가 무엇이었는지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가일 공께서는 혹시나 모를 변수를 견제하기 위해 이곳에 남아 주십시오. 대등한 전력이라면 저희가 유리합니다.”
명령 체계가 통일된 단일군이 연합군보다는 우세할 것이다.
카릴의 말은 분명 타당했다.
다만 그렇게 시작된 회전에서 이변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죽어라!!”
“이런 미친……!”
콰앙!
돌진하는 리버티 기사단의 선두가 갑자기 방향을 꺾어 옆의 동료를 들이받았다.
히이이이잉!
용맹한 전마들은 돌진하다 말고 펄쩍 뛰어오르며 사방으로 흩어지려 했다.
그렇게 대형이 흐트러져 버린 리버티 기사단은 적 기사단의 돌진을 막아 내지 못했다.
꽈아아아아앙!
기사단의 선두가 폭발하듯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리버티의 지휘관들에게는 악몽이나 다름없는 광경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적들이 기이한 수작을 부렸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군이 말 그대로 갑자기 자멸하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도무지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만일의 사태를 위해 후미에 대기하고 있던 로건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선두의 기사들을 움직이고, 말들을 조종하는 회색빛의 이질적인 에너지가.
‘그놈들이구나!’
– 알려지지 않은 기괴한 마법을 썼습니다. 정신을 조종하고 시체를 터트리는.
– 마치 전설에나 나오는 악마의 수법 같았습니다.
빅토르의 보고를 떠올린 로건의 눈이 빠르게 전장을 훑었다.
‘어디? 어디냐?’
변용한 갈색 눈에 황금빛이 스치는 순간.
로건은 아군의 병사들이 서로를 향해 칼질하고 있는 부근에서 그 마법의 출처 하나를 확인했다.
히이이잉!
“가일 공!”
말없이 뛰쳐나간 로건을 보며 카릴이 소리를 질렀지만 그 역시 정신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군이 아군을 공격하는 말도 안 되는 참상을 목격하며 패닉에 빠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질주하는 로건을 보면서도 아무런 지원도 해 주지 못했고, 은빛의 오러를 뽐내며 달리는 단기 필마의 질주는 이내 적군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놈이다]메시지 마법으로 전달된 음성에 연합군의 곳곳에 숨어 있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은빛으로 번뜩이는 기마를 향해 저마다 손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건의 눈에는 제게 접근해 오는 회색의 마나가 또렷이 보였다.
‘씁. 귀찮군.’
자신을 향해 파고드는 회색 마나는 가볍게 끊어 냈지만, 이미 저들의 마법에 정신이 점령당한 자들은 어쩔 수 없었다.
“죽어어!”
자유를 상징하는 리버티의 푸른 깃발 문양.
갑옷에 그 문양을 새긴 기사 하나가 눈이 뒤집힌 채로 로건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살짝 인상을 찡그린 로건은 절묘하게 창을 피해 기사의 안면을 후려쳤다.
아군도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아군의 기사를 대놓고 죽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쾅!
털썩.
안면을 가격당한 기사가 그대로 낙마하여 땅을 나뒹굴었다.
이런 전장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자를 기다리는 것은 결국 죽음뿐이다.
하지만 주위의 아군들은 전부 로건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이내 로건이 지나가는 길에 눈에 보이지 않는 혈로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스각.
적의 기사를 몇 번이고 베어 넘긴 은빛 오러블레이드가 어느 병사의 목을 치는 순간.
“어?!”
“끄윽. 내, 내가 왜?”
“이, 이게 뭐야!”
그 앞에서 난전을 벌이던 병사 수십 명이 일제히 정신을 차렸다.
그것을 확인한 로건은 전장의 이곳저곳을 오가며 적군 병사를 한 명씩 죽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될수록 광기에 빠져 있던 리버티군의 정신이 돌아왔다.
“이, 이게?”
“정신 차려!”
“적들이 온다!”
“가일 님이! 가일 님이 적들의 술수를 깨부수고 계신다!”
공황 상태에 빠진 아군들 사이에서 홀로 유일하게 전장을 유린하는 로건의 모습이 리버티군의 사기를 늦게나마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죽어라.]로건의 귀에 음산한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지금껏 가장 진하고 불길해 보이는 회색빛 기운이 그의 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