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00)
300화
“타히티 공왕성을 완전히 점령했습니다.”
수하의 보고를 받은 카릴 자모드의 시선이 자연스레 옆으로 옮겨졌다.
모두가 공식적인 지휘관인 카릴 자모드 백작보다 더 상급자로 여기는 한 사람 로건, 아니 가일 슬레이어가 그 시선을 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 테로난의 소식은?”
“하루 이틀 내에 칼론의 왕성을 점령할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해일의 마도사가 ‘수호자’에게 사로잡힌 이후 별다른 저항도 못 하고 있다 합니다.”
“그렇군.”
가일은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반응을 지휘부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지켜보았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어언 한 달.
하지만 평원의 두 번째 회전 이후 리버티군에 이렇다 할 위기는 없었다. 사실상 압도적인 전력으로 3국을 순식간에 점령해 버린 것이다.
오히려 로메로 왕국이 항복한 뒤, 혼란에 빠진 상태에서도 마지막 전력을 쥐어 짜냈던 타히티 공국을 평정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을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이 바로 눈앞의 초인이었다. 오직 일개인의 무력만으로도 몇 번이고 위험에 처했던 리버티군을 승리로 이끈 것이다.
– 이제 연합은 우리 리버티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 국왕께서 미치지 않은 이상, 이 사람은 왕국의 2인자가 될 것이다. 군터 대공 이상으로.
지휘부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이상, 이 중에 그의 심기를 거스를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이 좋은 날, 이 어색한 침묵을 깨고 조심스레 말을 건넬 수 있는 것도 카릴 자모드 정도뿐이었다.
“가일 님. 이제 승전을 선포해도…….”
모두의 기대 어린 시선이 그를 따르는데, 이 승전을 이끈 영웅이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아니. 우리는 이대로 트리아를 향해 진군한다.”
“……예?”
혼란에 빠진 트리아. 기세가 오른 리버티군.
그 말뜻을 모르는 이는 없었지만,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트리아는 저희 연합군입니다. 명분이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트리아와 테로난이 연합해서 저희를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전쟁엔 명분이 중요하다. 작게 봐도 아군의 사기를 좌우하는 문제가 되고, 크게 보면 제3국의 간섭을 차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명분 없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주변의 모든 국가를 적대하고도 승리할 자신이 있는 경우에나 국한된다.
지금 리버티군은 분명히 기세를 탔지만, 그것은 테로난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교롭게도 양국에 초인 신성이 등장한 것도 비슷했다.
“물론 가일 님이 지실 리야 없겠지만, 거기에 트리아까지 가세하면 곤란합니다. 군터 대공께서도 나서야 할 테고, 그렇다면 테로난의 철벽도 나설 것입니다.”
카릴은 자신을 응시하는 가일의 시선을 받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거기다 막상 전쟁이 일어나면 트리아 내부의 혼란도 일단은 잠식될 것입니다. 테로난의 초인에 트리아의 작센 대공까지 나선다면…… 상황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좋게 표현해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지 질 게 뻔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이 순간 지휘부 모두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일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테로난과 연합하여 트리아를 양분한다. 이후 연합의 영토는 테로난과 리버티 양국의 영토로 분할 통치될 것이다. 그 정도 대가라면 전하도 테로난도 모두 만족하지 않겠는가.”
가일의 어조는 미묘했다. 조국인 리버티를 타국처럼 표현할 뿐만 아니라, 국왕에 대한 경의나 존경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미묘한 어색함을 정확하게 잡아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저 그 내용에 집중할 뿐.
“틀린 말은 아니야.”
“확실히…….”
“충분히 가능해…….”
지휘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카릴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 상신하겠습니다.”
전쟁이 생각보다 더 길어질 듯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기대보다 달콤할 것이다.
긴장감으로 굳어졌던 카릴의 얼굴에 옅은 흥분이 떠올랐다. 카릴뿐 아니라 리버티의 지휘관들 대다수가 비슷했다.
그리고 그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옆 왕국의 지배자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예정대로라면 트리아와 리버티, 테로난의 3국 연합으로 바뀌었겠지만 지금 트리아를 그냥 둬서는 곤란해.’
트리아의 국왕 라몬 1세는 자식이 많다. 혹자는 기백 명이 넘는다고 할 정도였다.
그 수많은 왕족들이 극한의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왕권을 향한 레이스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 내분이 얼마나 이어질지는 몰라도 1, 2년 이내에 수습될 것 같지는 않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설령 금세 수습된다고 한들 그 후유증은 막대할 것이다.
빠르면 1년 반, 혹은 그 이전에도 제국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로건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트리아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제국의 수작을 확인하고 뿌리를 뽑는 것도 중요했다.
그러니.
‘연합을 리버티와 테로난으로 양분하고, 양쪽 모두와 다시 조약을 맺는다.’
겉으로는 불가침 조약이자 상호 방위 조약이 될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제국과 상대할 속국을 만드는 조약일 것이다.
사실 연합을 이분한 뒤, 지금의 지위를 이용해 두 왕실까지 쳐내서 아예 맥라인에 합병하는 방향도 생각했었다.
‘지금 그러기에는 전력을 재수습할 시간이 부족해. 후유증도 꽤 클 테고.’
강제 합병은 그 후유증이 막대하다.
전생에 그란디아가 제국에 점령당한 뒤에도 20년 가까이 저항 운동을 이어 갔던 것처럼, 혹은 그 이상의 반발이 따라올 수도 있다. 소왕국 연합의 근원 자체가 맥라인의 전신인 고대 그란디아의 억압에서 벗어난 영웅들이 세운 국가이니까.
“……지금은 이것이 최선이다.”
리버티 공국에서의 마지막 날.
공왕이 사용하던 화려한 방 안에 시린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 * *
– 황실에 꼬리가 잡혔다.
– 검혼과 삭풍이 습격 중.
– 외부 지원 불가.
– 모든 계획을 전면 재검토.
“빌어먹을 황실……. 이곳에 투자한 게 얼만데…….”
밀실에서 한탄을 토해 내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인영.
로브 밖으로 보이는 것은 새하얀 손뿐이었는데, 그 가늘고 고운 손가락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게로힌 장로가 죽었다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할 주요 인력, 장로 중의 한 사람이 죽어 버렸다.
의뢰를 핑계 삼아 그 황실에서 가장 먼 곳에 자리를 잡을 계획이었는데, 그조차 시작 단계에서 좌초되어 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2황자에게 섣불리 접근한 것이 문제였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직은 이르다고 그리 말했는데!’
검은 로브 아래로 슬쩍 드러난 붉은 입술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뒤에 시립해 있던 또 다른 검은 로브의 마법사들이 그 한숨을 듣고는 하나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지원은 없습니까?”
“루이사 님. 그럼 트리아는 어떻게…….”
“장로님. 부디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시끄럽다.”
차갑게 나온 한마디에 움찔한 수하들이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이내 루이사가 조용히 돌아서며 말했다.
“탑의 지시를 따른다. 철수다.”
“하지만 이미 투자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게로힌 님도…….”
좀 전의 루이사가 떠올린 생각을 고스란히 입 밖으로 낸 수하.
하지만 그는 루이사의 차가운 시선을 받고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더 말하지 않겠다. 철수를 준비하라.”
그 말을 하는 루이사의 표정은 냉랭했지만, 그 아래의 내심은 부하들 못지않게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최연소 장로라는 타이틀은 탑의 다른 제자들에게는 크나큰 영예일지 모르지만, 같은 장로들 사이에선 그저 막내일 뿐이었다.
새삼 발언권이 약한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웠다.
‘이래서 이상에 취해서 현실을 못 보는 늙은이들이 문제야.’
물론 그 이상을 이룰 수 있다면 루이사 본인도 기꺼이 목숨을 바칠 용의가 있었다.
다만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실을 먼저 봐야 하는 법.
‘돌아가면 이번 일에 책임이 있는 늙은이들을 다 쳐낸다. 큰 스승님께 요청해서라도 내 발언권을 높여야겠어.’
그것을 위해서라도 당장은 이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되찾아야 했다.
조금 과격한 수를 써서라도.
“단. 게로힌 님을 죽인 놈에게 선물을 하나 남겨야겠다.”
그 말에 우울해하던 수하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 * *
– 트리아를 양분하고 전쟁을 끝낸다.
물밑에서 진행된 협상은 이상할 정도로 빨랐다.
리버티에서 제안하고, 테로난에서 받아들이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3일.
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었지만 로건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에일렌이 잘해 주고 있으니까.’
이곳의 ‘가일’과 마찬가지로, 테로난 내에서 ‘아머드’의 입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중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입을 맞춘 일이다. 그들로서는 일이 빠르게 진행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동시에 발표된 성명.
– 트리아에 약속을 어기고 연합에 큰 위기를 초래한 책임을 묻겠다.
그렇게 양국의 군대가 트리아를 향해 진군을 시작하자 혼란을 거듭하던 트리아에선 그야말로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로 뭉치자!”
그렇게 외친 한 왕자를 중심으로 세력의 절반 정도가 힘을 합쳤다.
“신의를 지키지 않은 우리의 잘못 아닌가.”
그리 말하며 테로난이나 리버티에 빌붙으려는 자들이 남은 절반을 반씩 차지했다.
십여 개의 세력으로 이합집산을 반복하던 때에 비하면 한결 정리된 것이었지만, 온전히 하나로 뭉쳐도 상대가 될 리 없는 적을 두고 고작 절반의 전력만으로는 제대로 항전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진군하라!”
“항복! 항복입니다! 목숨만은…….”
리버티군의 진군 속도는 점령 속도와 거의 일치했다. 그것은 반대쪽인 테로난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연합을 재편하는 마지막 전쟁은 그렇게 쉽게 끝날 것처럼 보였다.
트리아의 수도, 트레고니아로 향하는 길목. 대군이 지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목인 트레게 요새에서 트리아의 오러유저 작센 대공을 만나기 전까지는.
“우리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이 한목숨 바칠 것이다!!”
“우와아아아!”
원래 색깔이 어땠는지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새하얗게 센 머리와 수염.
오러유저임에도 막을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뚜렷이 보이는 노기사가 성벽 위에서 소리를 지르자, 들판을 울릴 듯한 함성이 그 뒤를 따랐다.
고작 1만 명이 될까 말까 한 인원이었지만, 그 각오만큼은 진심인지 목소리에 담긴 기세가 10만 대군 부럽지 않았다.
“그래 봤자지만.”
“예?”
“테로난 군과 동시에 진군하면 반나절 안에 함락할 수 있다. 전갈을 보내.”
로건은 트레게 요새를 앞두고 멀지 않은 거리에서 진영을 꾸리고 있는 테로난군을 턱으로 가리켰다.
벌써 한 달 넘게 보지 못한 반려가 있는 곳.
그립긴 했지만 당장 아는 척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오히려 덤덤한 듯 무심하게 행동한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카릴의 얼굴에 난색이 떠올랐다.
“저, 그게…….”
요즘 알아서 입 안의 혀처럼 굴며 부관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카릴에게선 좀처럼 보기 힘든 상황.
“왜 그러지?”
“어느 쪽이 선두에 설 것인지가 문제가 될 듯합니다. 저희도 테로난을 뒤에 두고 선봉에 서기는 좀…….”
“아…….”
어처구니없지만 당연한 문제였다.
이제 연합을 둘로 나눠 먹게 될 두 국가의 군대에 어느덧 경쟁심과 경계심이 생겨난 것이다.
물론 제삼자의 입장에서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우리 군대가 좀 작살나도 상관없으니 그냥 돌진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앞장선다. 대신 트레고니아는 우리가 가진다고 알려.”
“예? 하지만 저들이 그리 놔둘지는…….”
“어차피 한 도시를 둘이서 나눠 먹을 것도 아니잖아. 어떤 식으로라도 결론을 내야 한다면, 차라리 그게 낫지.”
“……아마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테로난이 먼저 가라고 해. 트레고니아 준다고.”
“예!? 하지만 국왕 전하께서 아시면…….”
“어차피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야. 지금은 우리 군대가 더 유리하지 않나?”
그 말에 카릴의 눈에 노골적인 혐오감이 떠올랐다. 마치 더러운 쓰레기를 보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이내 스스로가 자각했는지, 카릴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혀, 현명하신 선택입니다. 그럼 그리 전하겠습니다.”
피식.
참 생긴 것하고는 다르게 머리 굴릴 줄도 알고.
또 머리 굴리는 것 치고는 속마음이 투명하게 보이는 인간이라.
이제는 이런 카릴에게 정까지 들 것 같았다.
‘진짜 그랬다가는 2차 전쟁이 나게?’
테로난이 트레고니아를 가지게 된다면 로건은 협약을 준수하자고 할 참이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머리를 굴린 제안이 채 전달되기도 전에.
– 나 작센 트럼블이 사신과 수호자에게 결투를 청한다! 용기가 있다면 나서라!
요새의 정문으로 나선 노기사의 외침에 전장의 시선이 전부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