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03)
303화어두운 산속.
별빛조차 비치지 않은 우거진 삼림 속에서 일단의 인물들이 길도 나지 않은 수풀을 내달리고 있었다.
“헉헉! 빌어먹을, 내가 어쩌다가……!”
한탄을 토해 내는 가죽 경장 갑옷의 중년인.
그의 어깨에는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재질로 보이는 고급 의복을 입은 청년이 축 늘어진 채 들려 있었다.
감긴 눈은 볼 수 없었지만, 일반 대륙인에 비해 확연히 노란 피부에 검은 머리는 제국의 유명한 핏줄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지금 중년인에게 청년은 단지 짐일 뿐이었다.
그것도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짐.
– 무슨 일이 있어도 2황자를 확보하라.
– 황제의 직계 혈족만이 황실의 공격을 막아 낼 방패가, 그리고 우리가 양지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
협상을 위해 나왔다가 납치를 당한 황자가 자신들을 믿을까?
그나마 이전의 의뢰조차 좋지 않게 끝났다고 들었는데?
‘이놈이 정신을 차린 뒤 우리를 다 잡아 죽이겠다고만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침투해 있던 신분이 중앙 군단의 간부였던 탓에 제국 황족들의 행실을 대충 알고 있는 그는 회의적이었다.
스스로의 머리 위에 황제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능력도 없는 주제에 자부심만 하늘을 찌르는 멍청이들.
그나마 황제의 직계는 다르다고 하지만, 그만큼 더 무서울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아무리 봐도 허튼짓인데 내가 대체 왜! 빌어먹을!’
하지만 ‘탑’에서 상명하복은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할 원칙.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 흔적을 찾았다!
– 위쪽이다!
– 삐빅!
산 아래에서 들리는 호각 소리가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자 중년인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벌써?!’
쫓는 놈들의 정체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황실 감찰부. 정확한 세부 소속은 몰라도 그 정예 요원들일 것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리를 잡았는지 잘라 내도 잘라 내도 끈질기게 따라붙는 물귀신 같은 놈들.
하지만 놈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놈들이 뒤에 붙었다는 것은 검혼 트리스 혼스비나 삭풍의 마도사 갈렌 디카이드가 가까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빌어먹을 괴물들.’
탑에서 장로의 지위를 얻은 중년인의 무력으로도 그 두 사람은 감당할 수 없었다.
둘 중 누구인지 굳이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는 곧 본의 아니게 그를 쫓는 괴물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질주하던 그의 주변 공기가 갑자기 서슬 퍼런 칼날로 변해 사방에서 엄습해 왔으니까.
‘삭풍!?’
뼛골이 시린 푸르스름한 냉기까지 더해진 바람의 칼날들은 하나하나가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콰콰콰콰콰.
이를 악문 그가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검을 꺼내 들었다.
꽈아아아앙!
솟구친 ‘회색’의 포스블레이드가 엄습하는 바람의 칼날들을 사방으로 튕겨냈다.
“젠장!”
이 폭음으로 인해 그를 쫓는 모든 이가 그의 위치를 알아챘을 테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보다는 저 멀리 1km는 될 법한 거리의 상공에서 그를 똑바로 노려보는 것 같은 마도사가 더욱 무서웠다.
[황자님을 내놓아라!]찌이이이잉.
“큭!”
귓전을 때리는 메시지 마법이 웬만한 하위 마법사의 공격 마법보다 강력하게 고막을 뒤흔들었다.
저 먼 거리에서 자신을 정확히 저격한 마법의 위력도 놀랍지만, 더 큰 문제는…….
‘걸렸어. 도망칠 수 없다.’
차라리 검혼이었다면 일말의 가능성이나마 있었을 것이다.
그는 비록 초인이 아니지만, 초인이 할 수 없는 재주도 여럿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때로는 웬만한 초인을 능가하는 전투력이 되기도 했고, 전투의 변수를 창출하기에는 더욱 유용한 능력이었다.
하지만 하늘 위에서 그를 노리는 삭풍의 마도사를 벗어날 방법은 그가 아는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동귀어진!’
삭풍의 마도사와 같이 죽는다.
확률은 낮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실패하더라도 시간은 끌 수 있다.’
그 틈에 다른 동지들이 황자를 빼돌릴 테니까.
중년인은 그렇게 결심하며 황자를 어두운 수풀에 내던지곤, 곧장 심장에 자리한 회색의 마나를 움직였다.
‘버서크(Berserk).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 타깃 온 위저드. 메모라이징(Memorizing) 온 배틀 모드.’
피아를 가리지 않는 광기를 불러일으키는 대신 육체 능력을 몇 배로 증폭시키는 광폭화 주문.
그리고 그 광기를 오로지 한 대상에게 집중시키는 정신 마법.
거기에 이미 준비된 전투 마법을 자동으로 발동시키는 탑의 비전, 매크로(Macro) 주문을 발동한 중년인의 눈빛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시에 떠오른 회색 기운은 그의 전신을 급격하게 강화시켰고, 이내 그의 주위로 사람의 머리만 한 회색의 구체 셋이 떠올라 불규칙한 공전을 시작했다.
그때 한 줄기 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앞으로 세월의 힘으로 반쯤 새하얘진 금발의 마도사가 내려앉았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만 아니라면 여전히 청년처럼 보일 얼굴.
“중앙 군단 소속 천인장, 팔먼 리할트 너를…… 하?”
콰아아앙!
담담한 외침은 이내 눈앞의 배리어를 직격하는 포스블레이드에 끊어졌다.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포스블레이드.
그와 동시에 마도사가 착지한 자리에서 순식간에 검은 가시넝쿨이 자라나 그를 옭아매었다.
파지지지직.
주변을 둘러싼 바람과 냉기의 장벽에 금이 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 안의 마도사는 오히려 감탄하며 웃었다.
“호? 카셀 마탑의 자랑이라는 마검사인가? 나도 실제로는 처음 보는군.”
“크르르.”
하지만 그 감탄에 돌아온 답은 짐승 같은 울음소리뿐이었다.
콰콰콰콰쾅!
번개 같은 검격이 이어지는 와중 세 개의 회색 구체는 번갈아 가며 시야를 흐리는 독성 구름을 뿜어내거나 가시넝쿨과 검은 벼락을 불러내며 사정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그 모습을 본 갈렌 디카이드가 눈살을 살짝 찌푸려졌다.
“광기에 몸을 맡긴다? 그러면서도 마법을 쓰는 것이 신기하긴 하다만, 그래 봤자 이 위대한 나의…….”
콰직.
갈렌의 여유 있던 표정은 그의 배리어가 부서진 틈으로 회색빛 포스블레이드가 스며들자 사라지고 말았다.
꽈아아앙!
마도사답지 않은 빠른 움직임으로 그 자리를 피한 갈렌.
하지만 어느새 하늘 위로 도피한 잘생긴 얼굴에는 이미 가느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피……?”
수십 년간 좀처럼 느낄 일이 없던 미묘한 통증.
손끝에 느껴지는 축축한 느낌에 갈렌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내 고귀한 피를!!!”
삭풍의 마도사.
바람과 얼음의 속성을 다루는 제국 최강의 전투 마법사.
아는 사람만 아는 그의 또 다른 별명은 매드 나르시시스트였다.
고위 마법사 중의 고위 마법사라 불리는 그는 마법사를 가리키는 속설 그대로 사이코 중의 사이코.
“찢어 죽여 주마!”
푸른 눈이 흰자위를 드러내며 뒤집히는 순간 갈렌이 존재하는 곳을 중심으로 사방 100여 미터에 시퍼런 바람의 칼날들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찢어지고, 얼어붙어라!”
콰콰콰콰콰콰콰.
캬악!
아우우!
한밤중의 고요한 숲에 광풍이 몰아치고, 느닷없는 재앙을 만난 숲의 생물들이 소란을 떨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으로 돌격해 들어간 팔먼은 허공에서 피 분수를 뿜어내며 그대로 지상으로 추락했다.
쿠웅.
“끄, 끄으…….”
전신을 난도질당한 듯한 상처.
하지만 신음과 함께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는 팔먼의 상처는 급속하게 아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갈렌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버텨? 버텼다고!? 이 쓰레기가 감히!!”
허공을 울리는 괴성과 함께 간신히 일어선 팔먼을 중심으로 시퍼런 냉기의 폭풍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콰.
5서클의 냉기 마법 블리자드를 수십 배로 증폭시킨 듯한 마법이 사방을 한동안 몰아치고 난 뒤.
싸아아아아.
한여름의 숲속은 때아닌 한겨울의 혹한이 불어닥친 폐허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투명한 얼음 동상으로 변해 버린 팔먼이 서 있었다.
“크하하하하! 꼴 좋구나, 쓰레기!”
쨍그랑.
웃음소리가 만들어 낸 진동 때문일까.
초토화된 숲속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형체를 유지하던 팔먼의 몸이 얼음 조각으로 변해 부서져 내렸다.
그 순간.
“이거 듣던 것보다 더 미친놈이구나.”
냉랭한 목소리가 폐허가 된 공간에 울려 퍼지자 갈렌의 광소가 뚝 그쳤다.
“자신이 뭣 때문에 그 아이의 뒤를 쫓았는지도 잊었느냐? 내가 없었다면 이 아이도 그냥 비명횡사했을 것 아닌가, 쯧쯧.”
혀를 차는 음성과 함께 노쇠한 모습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륙 남부의 시골에 가면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작은 체구의 노인.
그 초라함을 더욱 강조한 듯한 누더기 홑옷은 한여름에도 추위가 느껴질 것처럼 얇고,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듯이 볼품없어 보였다.
옆에서 그 두 배는 될 법한 청년이 허공에 둥둥 떠서 따라붙고 있는 것이 그 노인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일 정도로.
그러나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아는 갈렌으로선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냐?”
“나? 너와 트리스 그 늙은이가 쫓고 있는 사람.”
그 말에 갈렌의 얼굴이 서리가 내린 듯 얼어붙었다.
“카셀 마탑주?”
“그렇게도 부르지.”
“네가 ‘진실을 삼킨 뱀’이라고?”
“호오. 그 말도 알아? 요즘 아해 같지 않구나.”
“하…….”
아해.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노인의 말.
평소라면 발광을 하며 분노했을 갈렌이었지만 그는 그저 냉정한 눈으로 노인을 노려볼 뿐이었다.
“내 앞에 직접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간이 부었군.”
“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아까운 아이 하나를 잃었지. 쯧쯧. 암검(暗劍) 그놈이 이름값은 하고 갔어.”
“암검?”
“자신에게 명령을 하달한 자가 누군지도 모르나. 이거 명성에 비해 아는 게 없구먼그래.”
싯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는 노인의 말에 갈렌의 얼굴이 더욱 굳었다.
“늙은이가 생긴 것보다 혀가 더 더럽구나. 어디 언제까지 떠들 수 있나 보자.”
갈렌의 전신에서 흰색 기운이 솟구치더니 허공에 찬란한 백광이 어리기 시작했다.
자연히 시선이 쏠리는데.
콰직.
노인이 내디딘 작은 한 발.
그 발밑에서 터져 나온 희미한 소음과 함께 노인의 근처에서 일어난 푸르스름한 기운이 유리창 깨지듯 와장창 터져 나갔다.
“크…….”
동시에 허공에 떠 있던 갈렌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입가에 옅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미친 줄로만 알았는데 음흉하기까지 하고. 정신 나간 모습은 연출이었나?”
평범하고 노쇠해 보인 노인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갈렌은 이전처럼 웃지 못했다.
회심의 한 수가 가벼운 한 수에 무너져 내린 상황.
“웃기지 마라!”
일그러진 표정의 마도사가 전신에 희고 푸른 휘광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투명하고 차가운 폭풍으로 변해 일대를 휩쓸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콰콰.
투명한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은 작은 칼날의 폭풍이 되어 지나치는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깎아 내는 바람.
적이 적은 수의 강자라면 집중된 파괴력으로, 많은 수의 대군이라면 상식 이상의 범위 공격으로.
언제나 극대화된 효용을 보일 수 있는 갈렌의 진짜 비전 마법이 얼어붙어 폐허가 된 숲속의 모든 것을 먼지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게 그 유명한 삭풍의 군세인가.”
그 안에서 홀로 여유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폭풍이 몰아치는 소음을 뚫고 울려 퍼지는 늙수그레한 목소리.
그 이질적이고 기괴한 상황에 갈렌의 표정이 굳어질 때, 삭풍의 군세 중심부에서 검은 빛살이 번개처럼 허공을 갈랐다.
스각.
“컥!?”
반사적으로 상체를 기울인 갈렌의 오른쪽 가슴에서 핏물이 치솟아 올랐다.
동시에 숲을 아예 소멸시킬 듯 몰아치던 바람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피해?”
그리고 그 안에서 의외라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노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에서 무력으로는 손가락 안에 꼽히는 존재에게 단번에 중상을 입혔건만, 노인은 그조차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죽음을 피한 갈렌은 고통조차 잊은 채로 멍하니 물었다.
“설마…… 대마도사?”
“대마도사는 무슨. 조상님들이 들으시면 웃으신다.”
“무슨…….”
“‘대이주’이전의 진짜 대마도사들이 보았다면 부끄러운 수준이지. 물론…….”
“그게…….”
“네놈은 그보다 한참 못하지만 말이다.”
차가운 비웃음과 함께 새카만 어둠이 갈렌의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인의 표정이 변한 뒤에야 그 이변을 깨달은 갈렌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으아아압!”
기합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와 함께 다시금 몰아친 푸르고 흰 휘광.
하지만 그 상서로운 광채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어둠에 점차 그 빛을 잃어 갔다.
그리고.
쩌어어어엉.
허공에 울려 퍼지는 진동과 함께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것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모조리 사라졌다.
하지만.
“하? 도망을 쳤다고?”
어이가 없다는 듯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노인은 이내 피식 웃더니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그 안에도 숨긴 수가 있었던 게로군. 허허. 미친놈이 아니라 음흉한 놈이었구나. 그렇지 않느냐?”
마치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묻는 노인.
당연히 답을 하는 이는 없었지만.
“이미 한참 전부터 깨어 있음을 안다. 꼬마야, 내 제안을 들어 보겠느냐?”
그 말에 기절한 듯 허공에 늘어져 있던 청년, 2황자 바로스 반 아레스의 눈이 가늘게 띄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