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06)
306화- ……이대로라면 정복 전쟁이 계획대로 진행될 경우, 동부 8군단만으로는 피해가 클 것이라 예상됩니다.
허공을 울리는 목소리에 옥좌에 앉아 있던 지배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맥라인 왕국의 성장세에 대한 보고가 기분이 나빴던 걸까 싶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목소리의 예상과는 좀 달랐다.
“그 과정을 내게 일일이 다 보고하는가. 암검의 빈자리가 크군.”
– ……부족함을 사죄드립니다. 대장은 앞으로 한 달이면 운신이 가능할 것이라 알려 왔습니다.
쯧.
“아니, 되었다. 맥라인이라. 단순히 장수의 싹만을 보았거늘 그 아이에게 왕의 자질도 있었던가. 허…….”
답을 요하는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허공의 목소리는 그저 침묵했다.
잠시간 생각에 잠겼던 황제는 이내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클리드와 동익왕(東翼王)을 궁으로 들라 하라. 길이 울퉁불퉁하면 미리 다져 놔야지.”
흡.
1황자의 이름과 사방왕(四方王) 중 용의 날개를 상징하는 이의 이름이 나오자 암중의 목소리가 잠시 헛숨을 삼켰다.
그에 황제의 표정이 다시 살짝 굳어지자 목소리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 명을 따르겠습니다.
목소리는 두 사람 모두 아세리안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공무를 보고 있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황제의 명은 그 어떠한 공무보다 앞서는 것이니까.
“……검은 뱀들의 동향은?”
– 삭풍의 마도사께서 그리 물러나신 이후로 소식이 끊겼습니다. 다시 꼬리를 잡는 데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흠…….”
좀처럼 변화가 없던 황제의 표정이 오늘따라 자주 변했다.
그것도 좋지 않은 쪽으로.
그리고 이내 집무실의 밖에서 그 표정을 더욱 굳어지게 만드는 보고가 전해졌다.
– 실종되셨던 2황자 전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 * * 황실 마도사가 바로스의 신체와 정신을 꼼꼼히 검증하는 데엔 무려 일주일의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온갖 감시의 시선 속에서 다시 황제의 앞에 엎드린 바로스의 얼굴은 긴장과 공포보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사죄하는 목소리마저도 당당하게 들릴 만큼.
그 예상외의 모습을 본 황제가 눈을 기묘하게 빛냈다.
“재미있구나. 어찌 된 일이냐?”
주어와 목적어가 전부 생략된 간단한 질문이 바로스의 가슴에 묵직하게 와닿았다.
“소자가 부족하여 적의 수단에 놀아났습니다. 벌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유를 묻고 있다.”
그 말에 바로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부터 하는 말의 결과에 따라 그의 운명이 결정지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애써 자신감을 연기하던 얼굴에 완연한 긴장감이 드러났다.
어찌어찌해서 살아 돌아왔다.
그런 ‘쓸모없는’ 설명은 황제의 관심 밖일 것이다.
황제에게 자신은 자식이 아닌 여러 핏줄 중 하나일 뿐.
그 차이는 매우 컸다.
그가 묻는 이유란 게 어찌 살아 돌아왔냐는 뜻은 아닐 것이기에 바로스는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카셀 마탑주가 황실에 굴복의 의사를 전해 왔습니다.”
제국 마법사의 정점. 삭풍의 마도사를 일방적으로 패퇴시킨 대마도사와 그 수하들이 제국의 산하로 들어오겠다는 말.
적아를 가릴 것 없이 인재를 아끼는 황제의 성정이라면 그들을 섬멸하는 것보다 이편이 더 나을 것이다.
기대에 찬 바로스의 시선이 황제를 향했다.
무표정한 황제의 얼굴에 자신이 생각하는 표정이 떠오르길 바라면서.
그리고 그 기대대로, 황제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한쪽뿐이었다.
명백한 비웃음.
기대와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고작?”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말.
냉소와 함께 살기를 드러낸 황제의 모습은 마탑주의 의사를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수작을 부리다 쫓겨난 놈들이 본래의 자리를 찾고 싶다는 말이로구나. 그게 네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의 전부더냐?”
전혀 예상치 못한 대응에 당황한 바로스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이미 백여 년 전의 일입니다, 폐하. 전전대의 일은…….”
쾅!
“황실을 기만하고 제국을 농락한 놈들이다!”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황제의 노골적인 분노.
그것을 마주한 순간 차가운 냉수를 한 번에 들이킨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검은 뱀, 카셀 마탑.
고대의 초월자 지브릭 카셀의 후예들이자 아레스 제국의 건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공신들 중 하나.
그리고 백여 년 전, 전전대 황제의 정신을 세뇌하여 황실과 제국을 조정하려 했다는 끔찍한 반역을 저지른 이들.
그 결과 황족이 어려서부터 정신 마법에 대한 방비를 철저하게 받는 전통을 만들어 낸 이들.
그것이 바로스가 그들의 과거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하지만 진정 그것이 전부였다면, 지금의 황제가 오히려 웃으며 끌어안았을 힘을 가진 것이 그들이기도 했다.
“황실의 핏줄이, 제국의 황자라는 놈이 고작 놈들의 나팔수가 되어 살아남았던 것이냐? 말해 보아라, 바로스!”
한데 달가워하기는커녕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그 의미가 분명했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어!’
생각이 거기에 미치는 순간, 바로스는 가능한 한 끝까지 숨기려 했던 패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카셀 마탑주가 성국을 황실에 바치겠다 약속했습니다!”
다급하게 뱉어 낸 말이었지만 그 내용만큼은 황제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뭐라?”
살얼음처럼 시리기 그지없던 황제의 눈빛에 다시금 기묘한 빛이 번뜩이고, 집무실을 뒤덮었던 살기 역시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계속해 보거라.”
그 극명한 분위기 전환만으로도 바로스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제국을 지배하는 황제의 분노는 보통 인간의 분노와는 결이 다르다.
황제는 제국과 황실의 권위를 침범받았다 느낄 때만 화를 표출하고, 제국과 황실에 그 이상의 이득이 있다면 그 어떠한 분노도 참아 낸다.
평생을 그렇게 교육받았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지배자의 분노란 그런 것이었다.
그러니.
‘단순히 카셀 마탑을 다시 휘하에 두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과거가 있다는 거야. 황실이 아닌 황제에게만 전해지는 비사(?史)가.’
그리고 그 무엇인지 모를 과거가 성국보다는 가치가 확실히 덜한 듯했다. 물론 현 제국에 있어서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것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사제들과 신전으로 대표되는 성국.
단순히 대륙의 최강국이 아닌, 대륙 신민들의 정신적인 지주인 9대신의 지상 권위를 대행하는 자들.
그렇기에 최전성기에 이른 대륙 최강의 국가 제국조차도 섣불리 상관할 수 없고, 건드릴 수 없는 또 하나의 제국이 가진 다른 이름이었다.
“성국을 바친다? 그놈들이? 대체 무슨 수로?”
생각이 길었는지, 바로스의 귓가에 설명을 재촉하는 황제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벌써 표정이 살짝 찌푸려진 것이, 여기서 헛소리를 하면 좀 전의 분노가 몇 배 크기의 철퇴가 되어 자신을 후려칠 것이다.
지금부터가 진짜 운명을 가를 분수령이다.
“그게…….”
바로스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카셀 마탑주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자는 아마 이런 상황까지 예측하였던 것일까?
– 우리가 굴복을 표하는 것만으로 황제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다면, 성국을 바치겠다고 하거라.
– 당신이? 무슨 수로?
– 그리도 찾던 선조의 유물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것을 활용할 수 있다면 간단하다. 눈뜬장님들을 현혹하는 정도야 쉽지.
마법사들은 흔히 그리 말하고는 한다.
신과 섭리만을 따르는 사제들은 섭리를 틀어서 이용하는 마법사들에 비하면 눈뜬장님이나 다름없다고.
– 단지 시간이 좀 필요할 뿐이다.
그 마법사의 최고봉, 전설에나 나오는 대마도사의 말은 왜인지 신뢰가 갔다.
아니, 솔직히 신뢰보다는.
– 너를 대륙의 모든 영토와 모든 인간을 지배하는 진정한 황제로 만들어 주겠다. 그럼 너는 우리에게…….
그 더없이 유혹적인 거래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고대 선조의 유물을 활용하면 방법이 있다 하였습니다. 물론 시간이 좀 걸린다고는 하였습니다만.”
시간이 얼마나 걸리건 그 대가가 성국이라면야.
어찌 무시할 수 있을까.
다행히 이번에는 황제의 반응도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마도성자의 유물이라. 아, 그 교황의…… 팔찌. 그래, 그렇군. 그럴 수도 있겠어.”
지고한 황제답지 않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모습은 조금 의외였지만, 그는 지금 황제의 말에 끼어들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그리고.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
다시 무표정한 얼굴이 된 황제가 예의 기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본 뒤에야 그는 자신이 운명의 고비를 넘겼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폐하.”
쿵.
바로스가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가까스로 건져 올린 운명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이어진 황제의 말이 다시금 그를 얼어붙게 했다.
“하지만 금기를 어긴 처분은 해야겠지.”
바로스는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금기를 어기고 반역자와 손을 잡은 죄. 황족의 지위를 박탈하고 사형에 처하는 것이 옳다.”
“폐, 폐하!”
온몸에 소름이 돋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하나 그 의도에 제국을 위함이 있고, 가능성 또한 충분해 보이는바. 처분은 그 가능성의 유무가 판별될 때까지 보류한다.”
아버지, 아니 황제의 서늘한 안광이 얼굴을 스치는 순간, 바로스는 얼어붙을 뻔한 심장에 가까스로 따스한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순간 절로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아 버린 것은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허, 허흐. 흐…….”
“성국에도 내 눈과 귀가 있으니, 너의 장담이 틀어질 시에는 너 역시 그놈들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이다.”
냉랭하게 내려다보는 눈빛이 마치 자신의 추태를 꾸짖는 것 같아 바로스는 황급히 자세를 바로 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물러가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쿵.
다시금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고개를 잔뜩 조아린 바로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뒷걸음질을 쳤다.
당당하게 행동하고자 했던 처음의 결심은 조금도 지키지 못한 채 추태마저 보였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카셀 마탑과 협상을 위해 나섰던 그 날, 가까스로 도망친 레오스를 제외하면 측근들의 과반이 몰살당했다.
다시금 인맥을 형성하고 경쟁을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런데 그때, 문밖에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클리드 황자 전하와 동익왕 제라드 전하께서 알현을 청합니다.
‘형님? 동익왕?’
가장 강력한 경쟁자와 제국의 사방왕 중 동부의 통치를 맡은 동익왕이라니.
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인물들이 동시에 등장하자 바로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들라 하라.”
– 예.
끼이이이.
거대한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당당한 발걸음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
그중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신과 같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 노란 피부에 2m에 가까운 당당한 체격을 갖춘 청년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 아니더라도, 그 체격과 얼굴 윤곽부터 옥좌에 앉은 지배자를 똑 닮은 모습.
자신의 배다른 형님이자 가장 큰 경쟁자인 1황자, 클리드 반 아레스였다.
그와 시선을 마주친 1황자는 잠시간 그를 응시하더니 바로 고개를 돌렸다.
걸음걸이조차 흔들리지 않는 그 모습이 왜인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아 바로스가 입술을 꽉 깨무는데.
그 옆, 검은 머리카락으로 황실의 핏줄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지만 새하얀 피부에 푸른 눈을 가진 중년의 미남이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며 미소를 보였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였지만, 바로스는 그 미소를 무시했다.
– 웃으세요, 전하. 힘이 없는 자는 웃어야 살 수 있습니다.
– 누가 깔본다고요? 그러라고 웃으시라 하는 겁니다. 적을 속이기에는 만만해 보이는 게 가장 확실하니까요.
황자들은 유년기에 사방왕 중 한 명에게 맡겨져 몇 년간 교육을 받는 것이 의무. 그렇게 그의 대부이자, 자신의 인생을 결정짓는 조언을 해 준 자가 바로 저 빌어먹을 인간이었으니까.
‘동익왕.’
자신의 경쟁자와 사방왕 중 한 사람이 왜 같이 들어오는 것일까.
사방왕은 황위 계승전에 관여할 수 없으니, 그것 때문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이 불안감은 대체 뭐 때문일까.
클리드, 동익왕.
황실과 동왕부가 같이 움직일 만한 일.
‘설마……, 맥라인?’
별다른 증거도 없는 추론, 아니 망상이라 치부해도 상관없을 수준이었지만 이상하게 확신이 들었다.
그 순간 바로스는 뒷걸음질 치며 물러나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청을 드릴 일이 있사옵니다.”
막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으려던 클리드와 동익왕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는 순간.
“소자. 과거에 동부에서 벌인 일을 직접 마무리하고 싶사옵니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옵소서.”
바로스는 무릎을 꿇으며 그리 소리쳤다.
“하……?”
그러고는 황제의 표정이 다시 굳어지는 것을 보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자들의 힘을 이용하겠습니다. 제국의 전력이 낭비되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사실은 이미 저질러 놓은 일이 있었다.
그것이 재수없게 경쟁자의 공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하기에 무례를 저지른 것인데.
“흐음.”
다행히 황제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또한 그것은 그들이 제국에 굴복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다시금 흥미를 보이는 황제의 눈빛을 보며 바로스는 그 무서운 노인네와의 ‘또 다른’ 약속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