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07)
307화
“조건이 있다.”
“조건?”
카셀 마탑주는 바로스의 말에 느물거리며 웃었다.
“어린놈이 귀가 좋지 않은가 보구나. 내가 다 해 주겠다는데 조건을 걸겠다고?”
“내가 당신을 어찌 신뢰하겠는가. 그 약속을 믿기 위해서라도 조건은 필요하다.”
“허허. 욕심이 많은 꼬마로구나.”
시골 촌로의 그것 같은 인자한 미소가 노인의 입가에 머물렀지만, 회색 눈동자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 소름 끼치는 눈동자를 바로스는 그저 싱긋 웃으며 바라보았다.
표정은 그저 얼굴 가죽이 만들어 내는 모양일 뿐, 진심과 전혀 상관없는 이들이 보이는 특징.
그런 이들은 제국 황실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들은 눈앞의 노인처럼 괴물 같은 무력을 지니진 않았지만 말이다.
“우리가 굳이 너를 택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나 말고 또 황위 계승권에 가까운 황족을 건드린다면, 이번엔 삭풍의 마도사가 아니라 제국의 군단이 당신들을 쫓게 될 텐데?”
“굳이 설득할 필요 없이 네 정신을 만져 주는 방법도 있다만?”
“황실의 마법 경계망을 뚫을 수 있다면 이미 그렇게 했겠지.”
미소는 짓고 있지만 미동도 없는 검은 눈동자와 회색 눈동자가 치열하게 교차했다.
“푸흐흐흐. 맹랑한 꼬마로구나.”
이내 노인이 헛웃음을 터트리자 바로스는 자신의 도박이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마주치기만 하면 내 정신을 흐트러트리는 놈이 있소. 놈을 없애 버리거나 그 원인을 조사해 주시오.”
상대방이 한 수 접고 나오는 데에야, 바로스는 기세를 겨루기 위한 반말을 접고 반쯤 공대로 바꾸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노인의 회색 눈동자가 살짝 부드러워진 것 같기도 했다.
“제국의 황자가 한 사람을 어쩌지 못한다?”
“일국의 왕이오. 초인이기도 하고.”
“뭐?”
“현 맥라인 왕국의 왕, 로건 맥라인. 놈이 바로 그 대상이요.”
“푸흐흐흐.”
재밌다는 듯 웃는 노인.
하지만 이내 웃음을 뚝 그친 그가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맥라인의 왕이라. 그래, 그 젊은 천재에 대한 소문은 나도 들었지. 그런데 그 왕이 죽거나 잘못되면 혼란이 커질 텐데?”
“오히려 바라던 바요.”
“역시 제국은 전쟁을 생각하고 있었군.”
노인의 말에 바로스는 순간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지나친 단서를 줬다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한 것이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꼬여 버린 이상, 이들을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카셀 마탑과 만나기로 한 자리에 황실근위대가 나타났다. 이대로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간다면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는커녕 그대로 목이 잘릴 게 분명했다.
바로스의 입장에서도 이들은 이제 반드시 붙잡아야 할 동아줄이 된 것이다.
“뭐, 나쁘지 않아. 안 그래도 주목하고 있던 인물이니.”
녀석을 주목하고 있었다?
왜?
무언가 불안한 예감에 다시 입을 열려는데, 번뜩이는 회색빛 눈동자가 바로스의 입을 막았다.
“황족의 꼬마, 전신의 후손아. 이제 때가 왔기에 네 장단에 맞춰 준다만, 더 이상은 없다. 거래의 기본은 알고 있겠지?”
때? 무슨 때?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거래를 빌미로 무엇을 캐내려 한다면, 노인이 지금까지처럼 순순히 받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거래의 기본은 주고받는 것. 모를 리가 있겠소.”
그러나 순순히 호구가 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나를 황제로 만들어 줄 테니 ‘그 조건’을 들어 달라는 것은 그대들이 한 제안이지, 내가 원하던 바는 아니오.”
“마치 황제가 되고 싶지 않다는 듯 말하는구나. 정말 그 위선자 놈의 핏줄들은 어찌 하나같이 이 모양인지…….”
선조를 모독하는 말에 바로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노인의 전신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회색 기운의 압박감은 그가 입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명심하거라 꼬마야. 세상 모두를 속일 수 있어도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다.”
순박한 시골 노인이 연상되던 노인의 목소리가 유독 스산하게 들렸다.
“검은 뱀의 계약은 영혼이 맺은 계약. 이제 네 선택은 절대 무를 수 없다. 어떤 신도, 어떤 마법도 이 계약을 깨지 못할 것이다.”
선언하듯 울려 퍼지는 목소리와 함께 일순 노인의 회색 기운이 온 세상을 뒤덮은 듯한 착각이 들며 바로스의 숨통을 조여 왔다.
“커억. 컥. 이, 이런…….”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바로스가 비명을 토해 내는데.
“그러니 약속을 잊지 말게나, 바로스 황자.”
다시금 웃는 표정으로 돌아온 노인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전신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착각인 듯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바로스는 노인처럼 웃을 수가 없었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무슨 짓이라니? 그저 대화를 나눴을 뿐이거늘.”
흘흘 웃음을 흘리는 노인의 표정에 바로스의 얼굴이 더욱 싸늘해졌다.
“나를 바보로 보는……!”
“네가 직접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황실의 마법 경계망을 무산시킬 수 있다면 굳이 이렇게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고.”
“……!?”
“겁을 좀 주었다고 정말 겁을 먹어서야 쓰나. 장차 황제가 될 놈이.”
그 말에 바로스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으나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더 말을 해 봤자 통하지 않으리라 여긴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에는 황실의 마법적 조처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노인이 했던 말 그대로 자신도 모르게 제게 수작을 부릴 수 있다면 이런 긴 대화 따위 필요치 않을 테니까.
“약속이나 잊지 말거라.”
“……당신이야말로 약속을 잊지 마시오. 특히 그 성국에 관한 것은 어찌할지 확실히…….”
“네 아비는 내가 말한 대로 전하면 알아들을 것이다. 황제가 성국의 동향을 모를 리 없으니. 그것이면…….”
* * *
“그들을 쓰겠다?”
황제의 물음이 순간적으로 상념에 잠겼던 바로스를 다시 일깨웠다.
“예, 폐하. 굳이 형님과 동익왕 전하께 수고를 끼칠 필요는 없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해야 할 일이 뭔지나 알고?”
“로건 맥라인과 그 측근들의 목을 따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
그 직접적이고 과격한 표현에 황제의 표정이 살짝 굳는데 바로스가 바로 말을 이었다.
“이전과는 다릅니다. 그들을 쓴다면 설령 실패한다 해도 우리 제국과의 연관 관계는 찾지 못할 겁니다. 부끄럽지만, 최근 저 때문에 벌어진 소동도 있었으니까요.”
그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눈을 빛냈다.
황제 역시 묘한 표정으로 바로스를 바라보는데 불쑥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못 본 사이 황자 전하께서 꽤 달라지신 모양입니다. 본인의 허물을 그리 쉽게 받아들이시다니.”
동익왕, 제라드 반 아세리안의 푸른 눈에 웃음기가 돌았다.
황제와 황자의 대화. 그 도중에 양해도 없이 끼어든 무례였지만 그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위로는 오직 황제만을 두는 제국의 네 기둥. 사방왕의 한 사람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으니까.
“제라드.”
“죄송합니다, 폐하. 대부로서 바로스 전하의 성장이 기껍다 보니…….”
“아직 한참 모자란 놈이다.”
동익왕의 칭찬에도 황제의 말은 차갑기만 했다.
황제의 평가에 반박할 깜냥까지는 없는 동익왕이 말없이 한 걸음 물러나 고개를 숙였다.
말만 듣자면 대체 누가 진짜 아버지인지 모를 만큼 두 사람의 말에 담긴 온도 차이는 컸다.
그리고 바로스는 얼굴에 경련이 일 것 같은 느낌을 억지로 참으며 시선을 내려뜨렸다.
‘차라리 냉정한 평가가 낫지.’
동익왕의 저 따스해 보이는 말은 진심이 얼마나 담겼는지 모를, 말 그대로 빈말이니까.
“그런데 제가 호출된 이유를 방금 바로스 전하께서 말씀하신 것 같은데, 맥라인에 대한 그…… 작업이 맞습니까?”
웃음기 가신 푸른 눈을 보며 황제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어떤 방식이든 좋다. ‘계획’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적절히 손을 쓰도록.”
“……방식은 자율입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저 역시 바로스 전하의 의견에 손을 들어 주고 싶습니다.”
그 말에 바로스의 시선이 동익왕에게로 향했다.
황제 역시 의외였는지 기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바로스 전하께서 동부의 여러 나라에 손을 쓰고 있던 것을 여기 계신 분들 모두가 아시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줄곧 서방에 계셨던 클리드 전하보다는 효율적인 일 처리가 가능하겠지요.”
그 말에 가만히 동익왕의 말을 듣고 있던 클리드 황자의 표정이 눈앞의 누군가처럼 살짝 찡그려졌다.
‘저런 표정까지 비슷하다니.’
일부러 연습한 게 아닐까.
바로스는 배다른 형의 그런 사소한 표정까지도 마음에 거슬렸지만, 굳이 티를 내진 않았다.
작은 허점도 보여서는 안 되었다.
동익왕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지금 그는 자신을 밀어 주고 있었으니까.
그 간절한 마음이 통한 것인지 내내 큰 반응을 보이지 않던 황제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단, 동익왕의 조력을 받아라.”
“……예?”
“그리고 동익왕이 그놈들을 관리하게 하라. 그 정도 조율은 할 수 있겠지?”
힘들 것 같다는 진심은 결코 드러낼 수 없었다.
“예, 폐하!”
그저 단호한 대답으로 자신도 믿지 못하는 믿음을 심어 줘야 했다.
그렇게 예기치 못한 3자 간 알현이 끝났다.
“여러 가지로 변했구나.”
“아. 그렇습니까, 형님. 부족한 소제가 형님을 따라가려 하다 보니.”
“……음흉한 것은 그대로고.”
클리드의 무표정한 얼굴에 옅은 혐오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저 돌덩이 같은 얼굴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오히려 기꺼웠던 바로스는 더욱 진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최근의 실책을 바로 잡고 싶었을 뿐입니다만, 본의 아니게 형님께서 헛걸음하시게 된 것 같아 송구합니다.”
피식.
“헛걸음이라……. 그럴 리가.”
무언가 얻었다?
그 의미심장한 말에 바로스의 눈썹이 슬쩍 꿈틀거리는데.
“이야, 역시 우리 황자 전하들은 우애도 좋으시구먼. 어찌 이번 대에는 피바람이 안 불려나?”
능글맞은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어깨에 팔을 두르는 사람이 있었다.
두 황자의 얼굴이 동시에 찡그려졌다.
이번만큼은 두 사람의 생각이 일치하는 듯했다.
족히 20cm는 차이 날 듯한 두 황자의 어깨높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그 행태가 우스꽝스러웠을 뿐 아니라, 능청스레 뱉어 낸 말 또한 진심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어? 아니야? 설마 또 그 꼴을 봐야 하나?”
오히려 황자 간의 불화를 조장하는 듯한 말에 클리드가 무심한 표정으로 동익왕의 오른팔을 쳐 냈다.
“저는 바빠서 이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휙 돌아서는 움직임에 동익왕이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어째 클수록 더 딱딱해지는 것 같아. 그렇지 않나, 바로스?”
바로스 역시 이번만큼은 저 배다른 형과 똑같이 해 버리고 싶었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과거의 실책. 그것을 묻어 버리기 위해 해야 할 일의 감시책이 바로 이자였으니까.
“자, 이제 일은 어찌 시작할 거야?”
하아.
“방해나 하지 말아 주십시오.”
“방해라니? 명백히 조력자라고, 나? 아까 폐하의 말씀 못 들었어?”
“들었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허허. 이거 참 대부를 슬프게 하는 말이군. 아, 일단 동왕부에 먼저 가는 건 어때? 거기가 지리상으로 가깝기도 하고.”
“됐습니다.”
“오랜만에 루이사도 봐야지. 사촌 간에 못 본 지가 너무 오래되지 않았나?”
바로스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들에게 동왕부의 컨트롤을 받으라고 어찌 말을 한다.’
당면한 가장 큰 문제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탓에 그는 동익왕의 기묘하게 빛나는 푸른 눈에 스쳐 지나가는 회색 기운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 * *
“장로회의 분위기를 바꾸고 싶다고 했지, 루이사.”
“예.”
“그럼 공을 세워야지.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공을.”
“…….”
“네가 맥라인으로 가거라. 그리고 그자를 조사해.”
“……조사면 되는 겁니까?”
“조사가 먼저다. 그 왕의 행적은 신이 떠나 버린 시대가 시작된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수 있다.”
“그 후에는요?”
“……관련이 없다고 판단되면 바로 처리하도록. 그러나 관련이 있다면 다른 수를 쓴다. 왕국의 혼란에 꼭 왕의 죽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예, 알겠습니다.”
어두운 석실 안.
검은 로브 아래, 찰랑거리는 새까만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흰 피부와 푸른 눈이 인상적인 미인의 얼굴은 제국에서 유명한 누군가와 유난히도 닮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