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13)
313화
“교란 작전은 따로 실행하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왕의 포스를 확인하는 게 그 무엇보다 먼저다. 서두르지 마라.”
“……알겠습니다.”
호위기사의 대장 준이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며 루이사는 작게 혀를 찼다.
그는 세뇌된 기사는 아니었지만, 최상부의 정보를 알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이 말한 전제를 이해할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줄 생각은 없는지라 루이사는 슬쩍 고개를 저으며 별궁의 입구로 향했다.
그에 화들짝 놀라 따라붙는 호위기사들.
세뇌당하지 않은 준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좀 모자라고 반응이 늦는 것이 역시나 마음에 안 들어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상급기사들이 마력의 대부분을 봉인한 마도사의 움직임조차 제대로 쫓지 못하다니, 저래서야 실제 전투에서 중급기사라도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황실에게 기백 년을 쫓겼으니 비밀 유지에 관한 강박이 있는 건 이해해. 하지만 손발을 다 세뇌자로 채워서야 언제나 이렇게 답답할 수밖에.’
이래서야 어떻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이 역시 가장 먼저 개선해야 할 조직 문화 중 하나였다.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비밀 유지가 철저해야 하지만, 반대로 그만큼 신뢰할 수 있는 사람도 많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 조직의 정책은 그 가능성마저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었으니, 새삼스레 꽉 막힌 상부의 늙은이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금 여기서 성과를 내야 해.’
루이사가 붉은 입술을 깨물며 각오를 다지는데, 어느새 따라붙은 준이 또 헛소리를 내뱉었다.
“그런데 로니안 백작이 정말 현혹에 걸린 게 맞을까요? 너무 멀쩡해 보이는데 말입니다.”
“뭐?”
“평상시의 루이사 님이라면 당연히 통했겠지만, 지금은 좀 걱정돼서 말입니다. 마법의 성사 여부도 직접 확인하실 수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피식.
준은 지금 서클이 봉인된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다.
오러유저의 기감이나 일반 마법의 탐지를 피하기 위한 서클의 봉인은 확실히 자신의 능력 대부분을 빼앗아 갔다. 왕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도 그 경지를 추론하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과한 걱정이었다.
“시차를 두고 서서히 물들였다. 알아채지 못했다면 설령 오러유저라도 저항할 수 없는 마법이야. 최상급기사 따위는 알아도 벗어날 수 없어.”
마력이 봉인되어 있긴 하지만 최상급 마정석 가루를 사용해 마도사가 직접 시간을 들여 전개한 마법이다.
그것도 인간을 뛰어넘고 신조차 능가하고자 했던 마도성자(魔道聖子) 지브릭 카셀의 마법을 계승한, 소울 위저드(Soul Wizard) 학파의 마도사가.
“그래도 걱정이…….”
“그만! 준, 걱정도 과하면 병이야. 네가 이렇게 사사건건 딴지를 걸어서야 내가 굳이 널 데리고 온 이유가 있을까?”
세뇌자들의 한 박자 느린 반응과 제한된 지능이 답답해서 그것을 조율하라 데리고 왔더니, 오히려 그놈이 더 답답하게 구는 꼴이라 짜증이 치솟았다.
루이사의 눈빛이 날카로워지자 준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발걸음을 멈추고 준을 노려보던 루이사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어느새 별궁의 입구에 가까워진 순간.
우웅.
루이사만 들을 수 있는 가벼운 파열음과 함께 일행의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막고 있던 은밀한 마법이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위장을 위해 마력을 봉인했어도, 이 정도면 충분하지.’
동시에 루이사는 발그레하게 홍조가 어린 표정과 은은히 반짝이는 눈빛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별궁을 나서기가 무섭게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바로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어디로 행차하시는지요? 모시겠습니다.”
붉고 푸른색의 오드아이에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기사가 한 발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빅토르 경……이셨던가요? 로니안 백작님께서 왕성으로 초청하셨습니다. 폐하와 수련하시는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하셨는데, 기별을 받지 못하셨나요?”
“아……. 그게 오늘이었군요. 저를 따라오시지요. 모시겠습니다.”
태도는 정중하지만 사사건건 행사에 간섭하는 기사. 배정된 별궁 밖으로 한 걸음만 벗어나도 바로 쫓아오는 이 기사는 자신의 본분에 지나치게 충실했다.
‘세뇌 마법 없이도 이렇게 충성스러운 자들은 많아. 확실히 조직의 기조가 잘못됐어.’
루이사는 작게 솟구친 짜증을 내색하지 않은 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궁에 있는 국왕 전용 연무장엔 호위기사들이 들어설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빅토르만을 동행한 루이사가 연무장 안으로 들어서자, 지난 며칠간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붉은 머리 청년이 환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공주님. 직접 모시러 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리 멀지도 않은 길인데요, 뭘.”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한마디를 해 주는 것만으로도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 올라가는 청년.
‘현혹은 확실히 걸렸어.’
루이사는 그런 로니안의 모습을 보며 마음 한구석에 찜찜하게 남아 있던 준의 우려를 털어 냈다.
“폐하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먼저 인사부터 하시지요.”
로니안이 가리키는 곳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루이사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녀자의 무리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아닙니다, 공주. 어차피 아우와의 수련은 정기적으로 해 오던 터라, 참관인이 좀 늘어난다고 한들 상관없습니다.”
“넓으신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이전에도 묻고 싶었소만, 공주는 왜 나에게 폐하라 청하는 것이오? 제국의 관례에 어긋난 것 아니오?”
“제가 로니안 백작님과 혼인하게 되면 이 왕실의 사람이 될 텐데, 관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호오……?”
“그리고 제국의 속국도 아닌 맥라인의 지배자께 제국 왕작(王爵)의 호칭을 쓰는 것이 오히려 실례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제국의 공주답지 않은 말이군요. 생각도 깊고.”
“부끄럽습니다. 저는 그저 사실을 말한 것뿐인걸요.”
잠시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눈 뒤에야 로건과 로니안은 연무장 가운데에 섰다.
“하압!!”
쾅.
“좀 더 빠르게!”
뻐억.
“컥!”
형제는 로니안의 실력을 철저히 감춰 가며 겉보기만 요란한 대결을 펼쳤다. 물론 수없이 합을 맞춰 본 경험이 있으니 마도사가 그 공방의 허점을 알아차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도 모종의 수단으로 능력을 제약하고 있는 마도사라면 말이야.’
로건은 그렇게 생각하며 은밀히 루이사의 반응을 살폈다.
그런데.
“하……. 하하. 저, 정말이었어. 정말…….”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공주의 눈빛은 정말로 감격에 찬 듯 반짝이고 있었다. 오러유저나 최상급기사의 대련을 처음 보는, 그리고 동경하던 평범한 규중처자처럼.
‘정말 연기를 끝내주게 잘하는군.’
혹시나 이 황당한 청에도 무언가 속셈이 있지 않을까 경계했던 자신이 우습게 생각될 정도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역시 이건 로니안의 반응을 확인해 보려는 속셈이었나.’
로건은 그리 생각하며 다시 연기에 집중했다.
그런 자신의 등 뒤에 집요하게 따라붙는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 * *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정말 황금빛 포스가 맞습니다. 단순히 대지 속성의 포스가 소문으로 와전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이더냐.]“예! 확신합니다!”
말을 하는 루이사의 어조에는 환희가 담겨 있었고, 통신구 너머 대스승의 음성 역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운명을 바꾸는 자, 그 전설이 나의 대에 다시 나타나다니……. 역시 예언이……]신들이 떠난 시대.
조직이 오랜 시간 기다려 온 그때가 다가왔음을 알리는 징조가 발견되었다.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 아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유난히 많이 태어난 맥라인에 주목했던 것이 적중했다.
‘예언 속 모든 징조가 다 나타났다.’
생각만으로도 손이 떨려 왔다.
이제 대스승의 행보에 따라 조직의 움직임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루이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통신구 너머의 목소리가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한참 뒤에야 생각에 잠겼던 대스승이 입을 열었다.
[……암살은 보류, 아니 금지다. 제국의 의뢰는 네가 말한 두 번째 방향으로 간다.]제국의 의뢰. 2황자를 통해 굴복의 뜻을 전했으면서도 명령이 아닌 의뢰라 말한다.
황제가 들었다면 바로 다시 추적이 시작될 만한 단어 선택이었지만, 조직의 목표를 알고 있는 장로 루이사로선 당연한 말이었다.
“왕국의 혼란 말씀입니까?”
[그렇다. 혹여나 2황자 그 아해가 왕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거든 오히려 막아야 한다. 예언의 그때까지 운명을 바꾸는 자가 살아 있어야 하니까.]“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자는 적어도 오러유저 중급 이상. 고작 암살자 따위에 당할 리 없습니다.”
[귀신들이라 해도 말이냐?]“예. 아무리 저희의 비전을 일부 담은 귀신들이라 해도 어려울 겁니다. 게다가 이미 실패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암검이나 그 수장들이 직접 나서지 않은 탓이겠지.]“그거야 그렇겠습니다만.”
운명을 바꾸는 자가 그리 쉽게 쓰러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루이사는 대스승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황실을 원망하면서도 묘하게 귀신들의 편을 드는 듯한 느낌.
탑의 비전으로 탄생시킨 집단에 대한 애증이 고스란히 느껴졌으니까.
[확실히……. 황제라면 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에나 왕을 암살하려 하겠지. 황실의 동향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겠구나.]“반대로 말하면 그전까지는 안심해도 된다는 뜻이겠지요.”
여차하면 암살하려 했던 대상을 보호하기라도 할 모양새였지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진리였다.
[네 계획대로 실행하거라. 왕국을 지탱하는 근간이 무너지고 제국에 복속되고 나면, 운명을 바꾸는 자를 확보하기가 더 편해질 테니.]물론 그 이유는 절대 호의적이지 않았다.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루이사의 얼굴에 섬뜩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 * *
“들어!”
“쏴!”
파바바박.
기사의 호령과 함께 수십 발의 쿼렐이 과녁을 향해 일제히 쏟아졌다.
잠시 후.
“테논. 또 만발이다!”
기사, 덱의 외침에 주변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야!”
“대단해. 역시 사냥꾼 출신이야!”
“에이, 나도 한 발만 더 맞췄어도…….”
“포기해. 어차피 상금은 테논 거야.”
왁자지껄해지는 무리의 중심지.
클리드 영지의 자경단 훈련장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기만 했다.
하지만 테논이라 불린 중년인은 주변의 소란스러운 칭찬에도 묵묵히 석궁의 시위를 조절하며 장비를 점검할 뿐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소꿉친구 아만이 다가왔다.
“테논. 오늘은 정말 한잔해야지?”
테논의 평범한 갈색 눈이 아만에게 향했다.
‘그날’ 이후,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숲속에 숨어 산 지가 벌써 10년.
다가오는 모든 사람을 밀어 내는 자신이 자경단의 사람들에게 이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이 쓸데없이 오지랖 넓은 친구 덕분이었다. 고마웠지만, 10년 전에 이미 다 쏟아 내 버린 마음은 그 고마움을 표현할 여유가 없었다.
“……일없어.”
“이제 그만 마을로 돌아와, 테논. 세상 살기가 좋아졌다고. 영주도 예전 같은 패악질은 못 해, 이젠.”
안다. 알지만…….
떠나 버린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간다.”
“아직도 영주한테 복수하고 싶은 거야?”
우뚝.
돌아서려는 순간 절묘하게 던져진 아만의 질문이 테논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내가 너무 걱정이 돼서 그래, 이 사람아.”
“……간섭 마.”
다가오는 친구에게 퉁명스레 쏘아붙여 보지만, 아만은 자신이 하고픈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이제 기사도 없고 병사도 없는 영주라지만, 그래도 귀족이야. 혹시나 네가 일을 벌이면 너뿐만 아니라 우리 마을 사람들까지 다 끝장나. 알지?”
“……알아.”
그래. 안다.
다 순박하고 고마운 사람들. 과거의 내 가족들과 에리나가 남긴 인연들이 다 그 마을에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의 발목을 옥죄는 족쇄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팠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친구를 뒤로하고 홀로 숲속의 거처로 돌아온 테논.
고요한 오두막 안에 지친 몸을 누이자니 새삼 쓸쓸함이 몰려왔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이는 그의 머릿속에 언제나처럼 그리운 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에리나…….’
원통한 듯 눈조차 감지 못하고 죽은 처의 얼굴이, 그 마지막이 다시 떠오르자 무의식적으로 질끈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쇠 맛이 느껴졌다.
손에 들린 석궁이라면 기사도 죽일 수 있다는데, 기사도 병사도 없는 지금의 영주에게 복수할 시도조차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겁쟁이인 걸까? 응? 에리나.’
언제나처럼 답이 없는 하늘을 보며 한탄하는데.
[아니야, 자기야. 자기는 할 수 있어.]들릴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리나!?”
벌떡 일어서는 테논의 눈동자에 희미한 회색 기운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