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21)
321화- 변화…… 대비하라.
– 운명의 변곡점을…….
– ……때가 도래했다.
– 깨어나라!
“흡!”
갑작스레 뇌리를 울리는 웅장한 목소리에 일리아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기도하던 자세 그대로 잠이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근 어지럽게 돌아가는 교단의 상황에 밤샘 기도를 드리던 차. 결국 피로를 이기지 못한 탓이리라.
‘이런 불경을…….’
일리아는 다급히 의관을 정제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모시는 바다와 변화의 신, 아문다의 신상 아래에서 다시 참회의 기도를 올리려는데.
“어……?”
이상하게 몸이 가벼웠다.
몇 번의 경험상 기도하기 위해 엎드린 자세 그대로 잠이 들면 온몸이 쑤시고 결려야 정상인데, 마치 몇 날 며칠을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몸이 가뿐했다.
“이게……?”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그냥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몸 상태가 좋으면 기분도 좋아지기 마련.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밤샘 기도에 신께서 응답해 주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신께 감사를 올리다 보니 마지막에 뇌리를 울리던 목소리가 다시금 생생히 떠올랐다.
‘그럼 그 목소리는……?’
생전 처음 듣는 목소리.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딘가 익숙하고, 그립게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꿈속에서 그 음성의 주인과 무언가 길고 중요한 대화를 나누었었던 것 같은데, 그 내용이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단어 몇 개만이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는 듯 뇌리 깊숙이 박혀 있을 뿐.
“운명의 변곡점, 때가 왔다? 변화를 대비하라?”
넋두리하듯 중얼거려 보지만, 여전히 막연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신성한 광휘 아래, 무척이나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는 것이었다.
“설마…….”
우웅.
순간 오른쪽 어깨에 새겨진 성흔이 그녀의 짐작이 맞다는 듯 미미한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평상시보다 훨씬 밀도 있게 퍼져 나가는 신성력도 그녀의 마음에 확신을 더해 주었다.
“신탁……. 오, 이런…….”
한없이 감격스러웠고, 그만큼 안타까웠다.
자신이 모자라서 신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통렬하고 아픈 자각에, 일리아는 다시금 신상을 보며 기도를 올렸다.
“만물을 포용하는 나의 주께…….”
하지만 그때.
– 일리아 대주교님, 이제 곧 회의 시작입니다.
기도실의 문을 두드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 * *
“오늘따라 성휘가 유난히…….”
“에이, 착각이겠지.”
“원래 성녀…….”
주변의 수군거리는 목소리는 이미 익숙했다. 그보다는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신탁에 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할 뿐이었다.
분명 수많은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그녀의 머릿속에 남은 말은 불확실한 단어 몇 가지뿐이었다. 그리고 강렬한 이미지로 남은 ‘붉은색’ 하나.
그녀에게는 그것이 더없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무언가 세상에 큰 변화가 생긴다. 혹은 생겼다?’
가장 단순한 신언마저도 헷갈릴 지경이었으니, 이래서야 함부로 신탁을 받았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물론 말한다고 한들 전 교황의 손발이었던 타락한 추기경들이 받아들이기나 하겠냐마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금 한숨이 나왔다.
그때, 어디서 들어 본 듯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무슨 걱정이 그리 많으신 겁니까? 일리아 님.”
“아…… 트레이시 추기경님.”
그녀와 마찬가지로 새하얀 법복을 입은 중년의 여성이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이 중요한 날, 걱정이 많으신 듯하여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상념을 방해했다면 용서해 주세요.”
그 미소만큼 푸근한 말이 심란한 일리아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달래 주었다.
“아, 아닙니다. 중요한 날인만큼 고민이 많은 것뿐이지요. 그런데 추기경님은 편안해 보이시네요.”
“이제 막 추기경이 된 제가 무슨 고민이 있겠습니까. 저야 오스틴 님과 일리아 님을 믿고 따를 뿐이지요.”
트레이시의 푸근한 미소가 일리아의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요, 그들은.’
테너 레이니. 샘 프리먼.
전대 교황의 오른팔, 왼팔이라고 불리던 두 추기경은 지난 탄핵 심판일 이후 온갖 트집을 잡아 차기 교황 선출을 미뤄 왔다.
성도의 여론이 그들 파벌에 극도로 좋지 않게 흘러가는 상황. 아무리 교황 선출권이 추기경들에게만 있다 한들 당시에 교황과 함께 추태를 보였던 그들 중에서 차기 교황이 나온다면 어떤 반발이 터져 나올지 예상할 수 없었으니까.
– 최악의 경우 교단 수뇌부에 대한 전면 불신임, 레솔루티움(Resolutium)까지 나올 수 있다.
일반 사제들과 노비엔스의 모든 신민이 들고일어나서 교단의 수뇌부를 갈아엎는 일. 교단 역사에 딱 한 번 있었던 그 일이 재발할 수도 있음을 우려한 것이었다.
결국 시간을 끌며 여론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던 그들이 최후에 내세운 것이 바로 공석이 된 추기경의 자리였다.
맥라인에서 복귀하다 죽은 에셀 추기경의 후임을 뽑자는 말.
명예 추기경인 일리아가 있다지만, 그녀는 추기경이기 전에 바다와 변화의 신 아문다의 대주교였다. 아문다 신전의 추기경 클린스만이 건재한 지금, 그녀는 명예직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근거였다.
그들은 그 시간이면 성도의 여론이 가라앉을 것이라는 계산이었지만, 그 당시 들끓는 여론을 등에 업고 새로이 추기경이 된 것은 성도에서도 고행자로 유명한 청렴결백한 여사제 트레이시였다.
오스틴 추기경과도 제법 교분이 있는 인사였던 그녀가 추기경 취임식에서 한 말은 잦아들어 가던 여론을 더욱 시끄럽게 만들었다.
– 율리오 움베르토 1세와 같은 사기꾼이 다시 교황이 되게 두지 않겠습니다!
그로 인해 전 교황 파벌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테너 레이니와 샘 프리먼 추기경의 비리에 관한 증언까지 연달아 터져 나오게 되었으니, 결국 그들은 교황 선출 기간인 임페라토리움(Imperatorium)을 선언했다.
임페라토리움의 기간 중엔 추기경에게 불체포 특권이 주어진단 점을 노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선출 기간의 끝이 다가오고 있는 지금, 벼랑 끝에 선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는 일리아로서도 예상하기 어려웠다.
“어렵군요. 정말…….”
트레이시가 아군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상대 파벌의 추기경이 무려 7명이다.
“그들 중에서 교황을 내세우지는 않기를 바랄 수밖에요.”
“……설마요.”
그건 최악의 경우였다.
교단에 대한 전면 불신임, 레솔루티움(Resolutium)을 겪었던 당시의 교단이 다시 민중의 신임을 얻고 대륙 신앙의 중심지라는 이름을 되찾는데엔 무려 100년의 세월이 걸렸다.
당시 성도의 이름이던 호노루(Honor)는 타락의 상징처럼 알려졌고, 결국 무너지는 교단 내부에서 새로이 9명의 성자와 성녀가 나와 다시 교단을 건립할 때까지 암흑기를 걸어야 했다.
지금의 성도, 노비엔스(Noviens)라는 이름은 9대신을 기리기 위함도 있지만 그 아홉 성자를 기리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최악의 역사를 반복할 수는 없어.’
그리고 당시 타락한 고위 사제들은 분노한 민중들에게 맞아 죽었다.
그렇게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테너 레이니나 샘 프리먼 역시 그런 최악의 수는 두지 않을 것이다.
“힘을 내 주세요, 성녀님. 성도의 모두가 일리아 님과 오스틴 추기경님을 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용기를 가지셔야 해요.”
“예, 물론입니다.”
트레이시 추기경의 말이 그녀의 가슴에 다시 한번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래. 일단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하자.’
일리아는 불확실한 신탁에 대한 상념을 거둔 채 눈앞에 다가온 교단의 위기에 정신을 집중하기로 다짐했다.
그 때문에 성흔에 담긴 힘이 아주 약간 약해지는 것은 느끼지 못한 채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성녀.”
중앙 신전의 회의실, 영광의 홀에 들어서자 테너 레이니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때로는 강단 있게, 때로는 야비하게 보이는 얇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지만, 그의 갈색 머리는 이전에 비해 눈에 띄게 희끗희끗해진 상태였다.
최근 그가 받은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였는지 대략 짐작이 가는 모습.
‘다 자업자득이지.’
하지만 그런 동정심으로 교단의 미래를 망칠 생각은 없는지라 일리아는 그저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게 눈 밑이 퀭한 샘 프리먼의 인사도 형식적으로 받은 그녀가 진심으로 웃으며 인사한 것은 오직 오스틴 추기경이 입장할 때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 파벌도 마찬가지였던지라, 명예 추기경인 일리아까지 도합 10명의 추기경이 모인 자리의 분위기는 한참 동안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이 불편했을까.
“임페라토리움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슬슬 결론을 내려야 할 때 같은데…….”
테너 레이니가 냉랭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먼저 입을 열었다.
자연히 좌중의 시선이 몰리는데, 그의 입에서 일리아가 예상하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저희 일곱 명은 전대 교황, 그 사기꾼을 지지한 죄를 물고자 교황 선출권을 포기하겠습니다.”
“예!?”
너무나도 의외의 말에 일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는데, 그런 그녀를 흘끗 바라본 테너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만 조건을 하나 달고 싶습니다.”
역시.
이 인간들이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지.
일리아의 표정이 굳어진 것을 본 오스틴이 그녀를 대신에 말을 받았다.
“……말씀해 보시지요.”
“선출권을 포기하는 대신, 과거의 죄도 묻어 주시지요. 저희의 면책권을 원합니다. 그리고…….”
그 말에 오스틴의 얼굴도 굳어지고, 격분을 참지 못한 일리아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사제의 신분으로 지은 죄, 신의 철퇴가 두렵지 않나! 부끄러움을 안다면 순순히 그 죄를 받아들여야지!”
일리아는 진심으로 저들이 부끄러웠다.
신의 뜻을 대행하는 이들이 어찌 저리 수치를 모른단 말인가.
어차피 죽어 신을 뵙게 된다면 낱낱이 밝혀질 일이다. 사제가 타락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테너의 말은 신성 모독 그 자체였다.
“저들이 스스로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오스틴 추기경, 선출이 끝난 후에 이 죄를…….”
“……임페라토리움 기간 중 추기경의 발언에는 면책 특권이 있습니다, 성녀. 일단 무슨 말을 할지나 더 들어 봅시다.”
다만 일리아의 분노는 같은 아군에게까지 번지진 않았으니, 그녀는 차분한 얼굴의 오스틴을 보며 곧 스스로의 실책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추기경님.”
“젊음의 혈기가 나쁜 것은 아니지요.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 아닙니까.”
훈훈한 미소로 답한 오스틴의 시선이 다시 중앙의 테너에게 향했다.
그러자 잠깐 사이 더욱 늙어 버린 것 같은 테너 레이니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 나이를 먹고 나니, 눈에 보이는 것만 믿게 되더이다. 죽은 후의 세상 따윈 내 알 바 아니오. 나는 현생의 안락한 말년을 바랄 뿐이니, 원하는 것은 오직 그 약속뿐이외다.”
종교의 지도자가 할 말이라기에는 지독하게도 세속적인 말.
그 말에 평온하던 오스틴의 안색도 싸늘하게 굳어졌다.
“지금 그게 추기경이라는 자가 할 말입니까. 정말 끝까지 타락했구려, 테너 레이니.”
“내 눈에는 그대들이 우스워 보일 뿐이오. 실체조차 없는 신에 대한 광기에 평생을 맡기다니. 차라리 황금을 섬기는 자들은 납득이라도 될 텐데 말이오.”
“……지옥에 떨어질 말을 서슴없이 하는구려. 타락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거늘. 자비로우신 신들께서도 그대의 발언은 용서하지 않으실 거요!”
“자비로운? 흐흐흐. 오스틴 추기경, 정말 신들이 자비롭다고 생각하시오? 제대로 먹지도 못해 태어나자마자 굶어 죽고 병들어 죽는 아이들이 파다한 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그 신들이?”
“그만!”
“그럼 대이주 시대 이전에는 9대신의 이름도 찾기 힘들었다는 것은 아시오?”
“신성 모독은 그만하시오, 테너 레이니! 더 이상은 참지 않겠소!”
“참지 않으면 어쩔 거요? 우리가 협조하지 않으면 교단이 몰락할 텐데?”
“다 그대들이 벌인 죄 때문이 아닙니까!”
참지 못한 일리아가 다시금 소리를 질렀지만, 테너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수십, 수백 대 전의 조상이 지었다는 원죄를 현대의 사람에게 묻는 것만 봐도 끔찍한 연좌제 아니오. 자비로운 신들이라니, 웃기지 마시오. 차라리 이기적이고 잔혹한 신이라면 설득력이라도 있지.”
“신성력을 가진 자가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신성력? 아, 이것 말이오?”
우웅.
테너 레이니의 손끝에서 사제들만이 볼 수 있는 샛노란 광채가 솟아올랐다.
금과 상업의 신 아게론의 신성력.
하지만 그 신성력을 피워 올린 자는 타락할 대로 타락해 버린 사제였다..
“나는 나의 신을 믿소이다. 다만 그 신이 자비롭지 않고,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도 믿을 뿐이지. 그러니 현생에 집중하고 싶은 것뿐이고.”
“그런 말도 안 되는……!”
“타락한 사제가 신성력을 계속 쓸 수 있는 이유가 뭔지는 생각해 보셨소이까, 성녀.”
“그만! 그만! 지금이 교리 논쟁을 할 때인가!”
급작스레 벌어진 교리 논쟁에 오스틴이 다급히 끼어들며 대화를 멈췄다.
그의 씰룩이는 눈가에서 분노가 여실히 느껴졌지만.
“저지른 죄에 대한 참회가 먼저요, 테너. 용서는 그 후에나 논할 문제고.”
그 끝에서 토해 내는 말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참회라……. 역시, 어린 성녀에 비해 융통성이 있으시구려. 뭐, 기회를 준다니 원하는 대로 하겠소. 어떤 방법이 좋겠소?”
“……참회의 방법은 임페라토리움을 끝낸 뒤 다시 논의하겠소이다.”
“호오?”
그에 씨익 웃은 테너의 삐뚜름한 시선이 오스틴과 성녀를 향했다.
“뭐, 약속만 해 주신다면 아무래도 좋지. 그런데 그럼 다음 교황은 누가 되는 거요? 당신? 아니면 성녀?”
좌중의 시선이 그의 말을 따라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