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22)
322화
“원칙대로 교황의 입후보권은 추기경 모두에게 있소이다.”
오스틴은 테너의 흥미롭다는 시선을 무시하며 원론을 말했다.
그에 흥미가 식은 듯 테너가 풀썩 웃는데, 일리아가 겸손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역시 오스틴 추기경 예하께서 교황직에 더 어울리는 분이시지요.”
“직접 신께 선택된 성녀만 하겠소이까. 제게는 과분한 자리입니다.”
오스틴은 그 말을 받아 오히려 일리아에게 공을 넘겼다.
훈훈한 대화였지만, 테너를 비롯한 구 교황파 추기경들에게는 그저 위선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둘 다 욕심이 없다면, 차라리 저 트레이시 추기경이 어떻겠소.”
샘 프리먼의 불퉁한 말에 화살은 트레이시에게 향했다.
그에 여전히 푸근한 웃음을 지어 보인 트레이시가 손을 내저었다.
“어찌 제가 나서겠습니까. 새로운 교황은 두 분 중 한 분이 되어야지요.”
그녀의 말에 좌중의 시선은 다시 오스틴과 일리아에게 향했다.
한 사람은 한평생 성도에서 청렴결백한 사제의 상징으로 살아온 인물. 그리고 한 사람은 신의 선택을 받은 성녀.
두 사람이 합심하여 전대 교황의 부정을 밝혀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평가되는바. 그 둘 중 누가 교황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오스틴 예하께서…….”
“아니, 성녀께서…….”
둘의 사이 역시 나쁘지 않았으니 서로 양보하는 모습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물론, 전 교황파 추기경들은 그 훈훈한 광경에 얼굴을 더욱 찌푸릴 뿐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전대 교황의 전적이 있으니, 성자 출신의 교황은 조금 거부감이 있지 않을까 싶군요. 물론 일리아 님의 성흔이 진짜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트레이시가 슬쩍 오스틴에게 힘을 실어 주는 말을 보탰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살짝 의외라는 표정을 지은 일리아가 이때다 싶어 냉큼 동조하는데, 그 사이로 테너가 다시 끼어들었다.
“우리가 선출권을 포기한다면 셋 중 둘이니 가결이군요. 그럼 이제 우리의 제안을 어찌 받아들일지 답을 주시겠소, 오스틴?”
다시금 좌중의 시선이 오스틴에게 집중되었다.
그의 대답에 따라 앞으로 신전의 방향성이 결정될 것이다.
구 교황파도, 일리아도 긴장하며 그의 입을 바라보는데 잠시 침묵하던 오스틴이 심유한 눈으로 테너를 바라보았다.
“……참회 기도 100일과 추기경 지위 사임에, 그동안 모은 재산의 9할을 신전에 기부하시오. 좋은 곳에 쓸 테니.”
“그런……!”
샘 프리먼을 비롯한 다른 추기경들이 오스틴의 과한 요구에 순간적으로 발끈했다.
전부 내려놓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런데 테너가 손을 들어 그들의 반발을 막았다.
“확실히 생각보다 융통성이 있었군요, 오스틴. 그런 점을 예전에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칭찬인지, 욕인지 모호한 표정.
오스틴의 제안을 홀로 환영하는 모습이라 같은 파벌이었던 추기경들조차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테너가 2인자라 할 수 있는 샘 프리먼의 귀에 뭐라 속삭이자, 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바뀌었다.
“확실히……. 흠, 우리가 사임한 이후에 이중 처벌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나 역시 동의하겠소.”
그 말에 같이 발끈하던 전 교황파 추기경들이 일제히 함구했다. 테너와 샘이 동의한 것이라면 확실한 근거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들의 시선이 다시 오스틴에게로 향했다.
“나의 주, 빛과 조화의 신 아사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소.”
오스틴 플루이트, 이제 차세대 교황으로 지명될 이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들이 왜 그런 무리한 조건을 받아들였을까요.”
영광의 홀을 나오는 길.
일리아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든 일이 예상외로 순조롭게 풀렸지만, 그 과정이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옆에 있던 트레이시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역시 일리아 님은 훌륭하세요.”
“예?”
뜬금없는 말.
일리아의 황당한 시선이 옆으로 향하는데, 트레이시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비웃는 게 아니에요. 그만큼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는 뜻이니까요. 진심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오스틴 님은 관대한 제안을 건넨 거예요. 사임이나 참회 기도야 어차피 그들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테니…….”
“하지만 재산의 9할을 기부하라고…….”
“예. 그 점이 관대한 거죠.”
“예?”
“오스틴 님은 ‘기부’라고 하셨잖아요. 집행이 아니라.”
“그게 무슨 의미죠?”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의 일리아를 보며 트레이시는 예의 그 푸근한 미소와 함께 차분히 말을 이었다.
“기부는 강제하지 않고, 감시하지도 않지요. 오스틴 님은 저들이 적당히 챙기고 물러설 여지를 준 겁니다.”
“예!?”
그제야 추기경들 간에 오고 간 말의 속뜻을 깨달은 일리아의 얼굴이 단숨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죄인들을 봐준다고요!? 지금까지 고발된 죄만 해도 수십 건이 넘습니다! 횡령에 배임, 부녀자 희롱, 강간, 뇌물 등등 셀 수도 없는 죄를 저지른 죄인들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흥분한 일리아와는 달리 트레이시는 그저 모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예, 분명 그렇지요. 하지만 그들이 교단의 수뇌부와 함께 죽겠다고 나선다면, 그 피해를 생각해 보셨나요?”
“……그건.”
“교단 조직이 해체될 경우, 지금과 같은 체제가 언제 다시 만들어질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신들의 뜻을 온전히 전할 전통이 흐려지고, 사이비들이 판을 치겠지요. 그리되면 결국 고통받는 것은 죄 없는 신민들뿐입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트레이시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을 속인 사기꾼이었던 전대 교황의 수족들을, 그 교황에 비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은 그 죄인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말은 차마 입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불의와…… 타협하는 일 아닙니까.”
일리아의 복잡한 표정을 본 트레이시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성녀님은 그 모습 그대로 있어 주세요. 세속의 때가 묻은 일은 저와 오스틴 교황님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자신을 토닥이는 트레이시의 손길은 포근했다.
마치 그녀의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라는 존재의 손길처럼.
“……쉬고 싶어요.”
“그러세요.”
그랬기에 일리아는 더 따지고 들지 못한 채, 그저 아무 말 없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녀를 지켜보던 트레이시가 예의 그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참 단순해. 그래서 아까워. 성흔만 아니었어도 너를…….”
예의 푸근한 미소로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트레이시는 바로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곳에는 착잡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오스틴 플루이트, 그가 홀로 남아 있었다.
“납득하던가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까지는 이해한 것 같습니다. 한동안 마음을 좀 정리하라고 휴식 기간을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침음성을 흘린 오스틴은 이내 한숨과 함께 돌아섰다.
“……교단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성녀도 곧 이해하고 돌아올 겁니다.”
“저도 그러리라 믿습니다, 교황 성하.”
‘교황’ 그 단어가 주는 마력일까.
착잡하기만 하던 오스틴의 얼굴에 그 순간 미미하지만 분명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찰나의 미소를 확실히 눈에 새겨 둔 트레이시는 웃으며 본론을 꺼내 들었다.
“어쨌거나 결국 제 말대로 되었군요, 성하.”
“아, 그렇지요. 정말로 그들을 설득할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트레이시 추기경. 한데, 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오스틴의 의문은 타당했다.
그는 오지에서 경전만 읊으면서 살아온 사제가 아니었다.
신전이 타락했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던 시기, 그 부패의 중심이나 다름없는 성도에서 청렴결백의 상징처럼 홀로 빛났던 사제.
그는 부정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았고, 홀로 푸름을 지켰기에 그만한 명성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타락한 추기경들이 그리 쉽게 물러섰다는 것을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조건을 달았다고는 하나 이미 탐욕에 눈이 먼 자들을 달래기엔 턱없이 모자란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에 대한 트레이시의 대답은 그저 한결같은 미소뿐이었다.
“진심을 보여 주고 설득했을 뿐입니다. 그들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던 거지요.”
“흠…….”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탄핵 심판의 과정을 거쳐 오며, 오스틴은 현실과 적절한 타협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홀로 깨끗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실로 당연한 부정을 수면 위로 드러나게만 하는 것도 힘들었다. 일리아 성녀가 아니었다면 이 모든 과정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스틴은 타협을 배웠다.
그것이 그가 평생을 지켜봐 온 많은 사제들이 타락하게 된 시발점이라는 것은 깨닫지 못한 채.
“예, 그리 믿겠습니다. 고행 사제들의 힘이 그 정도니 든든하군요.”
트레이시로 대표되는 신의 뜻을 얻기 위해 고행하는 사제들. 그들을 앞으로도 이용할 수 있음에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예. 그러면 성하, 송구스럽지만 약속하신 것은…….”
“아……. 율리오 움베르토의 팔찌를 말씀하셨지요?”
“예.”
신성력을 흉내 내는 아티팩트는 존재할 수 없다.
신의 힘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니까.
그러나 전대 교황의 팔찌는 분명 신성력을 흉내냈다.
신전이 존재해 온 이래 쭉 고수해 온 이론을 깨트리는 흉물스러운 물건.
그렇기에 성전기사단의 기밀 창고에 깊숙이 보관 중인 물건.
하지만 트레이시는 전 교황파 추기경들의 설득을 전제로 그 팔찌를 내어주라고 요구했다. 결코 설득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일단 허락했던 것인데, 놀랍게도 그들을 설득해 낸 것이다.
오스틴의 얼굴이 살짝 굳어진 것을 보았을까.
트레이시가 바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저희 고행 사제들은 어찌 그런 물건이 존재하는지 연구해 보고 싶을 뿐입니다. 그것이 신의 뜻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지름길이라 생각합니다.”
“……물건을 중앙 신전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물건을 사용할 시, 상시 성전기사들이 함께하게 될 겁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말씀드렸듯, 연구를 위함입니다. 충분합니다.”
트레이시가 미소를 지으며 무리한 조건을 받아들이자 오스틴의 표정도 비로소 풀어졌다.
“좋습니다. 우리 함께 새 시대를 열어 봅시다.”
내가 새로운 교단을 만들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 것이다.
수십 년을 올곧게 살아온 노사제의 눈 속에 야망의 빛이 깃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트레이시는 만연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 *
– ……이로써 새로운 교황 오스틴 플루이트 1세의 즉위를 만천하에 알리는 바이다!
“우와아아아아아!”
트레이시 추기경의 목소리가 아티팩트를 통해 광장에 울려 퍼지자 성도가 떠나갈 듯한 함성이 그 뒤를 이었다.
“이제야 썩은 사제들이 싹 갈려 나가겠군.”
“오스틴 추기경, 아니 오스틴 교황 성하면 믿을 수 있지.”
“이제 강제 기부금도 사라지려나?”
웅성웅성.
광장을 가득 메운 채 새로운 교황 즉위식을 지켜보는 성도 주민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가득했다. 새 교황에 대한 기대감으로 모두가 잔뜩 들뜬 것이다.
이내 환영을 투사하는 아티팩트를 통해 오스틴 교황의 얼굴이 허공에 떠오르자, 소란스럽던 좌중이 일제히 숨을 죽이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교황은 신전의 지도자이기에 앞서, 이곳 성도 노비엔스의 지배자.
성도의 주민들은 새로운 지배자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새기고 싶은 마음에 목이 빠져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영 속 오스틴 플루이트 1세는 여태 등극했던 교황들이 그랬듯, 긴 공치사가 들어간 즉위 연설을 시작했다.
– 나 오스틴 플루이트는 9대신의 뜻을 받들어…….
“흐암. 엄마 나 졸려.”
“쉿, 인석아. 그래도 참아.”
“성실한 사제님이라 그런지 말씀도 참 올곧네.”
“음. 너무 옳은 말만 해서 졸릴 지경이야.”
“어이, 이 사람…….”
“농담, 농담이라고.”
일부는 졸고, 일부는 키득거리는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연설이 끝을 향해 나아갈 때.
– 나 오스틴 플루이트는 인류의 가장 큰 세력인 아레스 제국과의 협력을 통해 신의 뜻을 더욱 널리 퍼트릴 것이다.
“에?”
“뭐라고?”
“무슨…… 뜻이야?”
보통의 교황 즉위 연설에서는 들을 수 없는 이상한 선언에 모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쾅!
“아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교황 성하! 갑자기 제국을 왜?”
“보다 적극적인 포교를 위함일 뿐이오, 성녀.”
“아니, 신전은 세속의 권력과 손을 잡지 않습니다! 그것은 고대로부터 이어진 전통…….”
“낡은 전통은 바꾸어 가야 합니다, 성녀.”
일리아의 흥분한 목소리는 교황과 트레이시의 반문에 막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아니, 그게 무슨…….”
“진정하세요, 성녀님. 모두가 신의 뜻을 널리 전하기 위함이니.”
트레이시의 목소리는 여전히 따스하게 들렸지만, 일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완강히 부인했다.
“하지만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도 추기경들 간의 협의도 없이!”
“협의는 했습니다, 성녀.”
“예?”
“현재 추기경은 그대와 나, 그리고 트레이시 경뿐이지 않소. 나와 트레이시 경이 합의했으니 절차를 어긴 것은 아니지.”
“제게 알리지도 않고요? 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일리아가 허탈한 어조로 반발했지만, 교황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만. 이미 결정된 일이오. 아니면 교황인 내가 대중에게 한 말을 다시 바로 번복하는 꼴을 보이길 원하시는 거요?”
“잘못된 것이라면 응당 그리 해야 합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지요. 잘못된 것도 없고.”
오스틴의 단언에 일리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왜, 왜 갑자기 이렇게 변하셨지?’
지극히 오만한 표정.
얼마 전까지 알던 그 오스틴 추기경이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지만, 이렇게 갑자기 훅 변할 수가 있나?
너무 당황스러워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데.
“그만 물러나세요, 성녀. 교단은 앞으로 많은 것이 변할 것입니다.”
트레이시가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제지했다.
“모시겠습니다, 추기경 예하.”
“따라오시지요.”
이내 트레이시의 좌우에 서 있던 성전기사들이 바로 일리아의 앞을 막아섰고, 오스틴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이제 새로운 방향성을 잡았으니, 다른 추기경들이 선출되는 대로 개혁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 아시지요, 성녀.”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성하.”
트레이시가 고개를 숙이며 웃는 순간, 일리아는 그녀의 손목에서 시작된 기이한 파장이 오스틴 교황에게 향하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 느껴 본 적이 있는, 신성력과 비슷하지만 거북한 느낌의 파장.
그 기억을 되새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성흔을 가진 자신이기에 느낄 수 있는 미약한 힘의 이동과 그 본질. 그것을 깨닫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쫙 끼쳤다.
‘전 교황의 팔찌!’
오스틴 교황과 자신의 사이를 막아선 신전 기사들. 그들의 동공이 조금 커진 상태로 미동도 안 한다는 것도 그제야 인식되었다.
‘그런…….’
모든 것이 잘못됐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일리아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실망한 얼굴을 연기하며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릴 뿐.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배웅은 않겠습니다, 성녀님.”
트레이시의 푸근한 목소리가 가증스럽게만 들리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도움을 청해야 해.’
곧바로 떠오른 사람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 붉은 머리, 붉은 눈의 왕이었다.
맥라인의 국왕이라면 분명 제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일리아는 굳은 표정으로 오스틴과 트레이시에게서 등을 돌렸다.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미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트레이시의 시선은 인식하지 못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