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26)
326화
“죄송합니다.”
쿵.
바로스는 인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죄를 청했다.
긴말은 필요 없었다.
구차한 변명은 황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 솔직한 사죄가 최선이었다.
“왜 불렀는지 알고 있는 것이냐?”
“예. 제 욕심으로 폐하의 권위를 훼손했습니다. 벌하여 주십시오.”
쿵. 쿵.
연신 바닥에 머리를 찧어 대는 바로스의 이마가 금세 피로 물들었다. 그러나 그 과격한 퍼포먼스에도 대전을 옥죄는 무거운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
“……근래에 많은 일이 있었지. 하지만 그로 인한 너의 변화는 여러모로 예상외구나.”
희망적으로도, 절망적으로도 들리는 말에 바로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금기를 어긴 것은 그 금기의 적을 수하로 끌어들인 것으로 상쇄할 수 있으나, 황제의 권위를 침범한 것은 어떤 변명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다.”
이어진 황제의 말에 바로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는데,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람의 머리 하나가 그의 앞으로 굴러왔다.
평범한 갈색 머리카락 아래, 빛을 잃은 갈색 눈동자를 본 바로스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누군지 알겠지?”
모를 리가 없다.
황실 특수감찰부의 훈련 교관이자, 자신의 부탁으로 명령을 조작했던 이.
설마 이것이 내 끝인가.
심장이 두근거리며 시야가 아득해졌다.
하지만 그는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는 않았다.
쿵.
바로스의 머리가 다시 한번 바닥을 내리찍었다.
“……죄송합니다. 죄를 청합니다.”
용서해 달라는 말은 오히려 황제의 화를 돋울 뿐이다.
바로스는 가능한 낮은 자세로 자신의 운명이 구원되기만을 바랐다.
두근.
두근.
심장이 터질 듯 박동하는 소리가 귓가에 점점 크게 울리던 순간.
“……하나 기회를 주겠다.”
황제의 뜬금없는 말에 바로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탁.
어느새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자신의 앞에 가져다 놓은 보고서.
피가 흥건한 이마를 들어 바라본 그 보고서에는 예상치 못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기나긴 미사여구가 잔뜩 쓰인 외교 문서였지만, 그중에서도 단번에 눈에 들어오는 문장.
황실의 대표?
명예 추기경?
순간 바로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네가 장담한 대로, 검은 뱀이 성국을 제대로 집어삼킨 모양이다.”
허으.
‘성과를 보여 주겠다더니.’
숨죽인 신음이 절로 새어 나오는데,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 황제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성국으로 가라. 그리고 그곳에서 제국의 뜻을 대변해라. 그 성과만큼 황위 계승전에 반영하겠다.”
다시 한번 주어진 기회를 어찌 거부할 수 있을까.
“화, 황은이 망극하나이다.”
쿵.
바로스는 다시금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살아남았음을, 권좌를 위한 길을 보전했음을 자축했다.
이마의 상처가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어찌 생각하지?”
바로스가 물러간 대전.
아무도 없는 공간에 황제의 목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이내 당연한 듯 허공을 울리는 대답이 돌아왔다.
– 아직 성국에서 어떤 위화감도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위험하다는 뜻이군.”
– 예, 그렇습니다. 놈들의 마법이 어디까지 닿았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역시……. 조사가 끝날 때까지 바로스를 제외한 다른 황족들은 황궁에 머물게 하라. 특히 클리드 녀석은.”
–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하면 2황자님은…….
“제가 고른 패다. 그 패가 꽃 패든 버리는 패든, 스스로 책임져야지. 성국을 놈들과 이어지는 창구로 사용하되, 상시 감시하라. 관련 사항은 한동안은 기밀로 처리한다.”
– 예, 알겠습니다. 한데 계승자의 자격은 그대로 두실 겁니까?
“……제국의 황제가 성국의 교황을 겸할 수만 있다면, 만년을 이어 갈 꽃 패가 되겠지. 아직은 두고 본다.”
– ……예.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 * *
“바로스가 성국으로 향했다?”
거대한 체구, 각진 얼굴의 청년이 짙은 검미를 찌푸리며 되물었다.
“예, 전하”
“귀신을 도용한 것에 대한 처벌은?”
“……없었던 듯합니다.”
그에 청년, 1황자 클리드 반 아레스의 안색이 더욱 딱딱해졌다.
“부황께서…… 대체 왜?”
혼잣말처럼 새어 나온 음성에는 짙은 의문과 불안감이 실려 있었다.
그의 앞에서 보고를 하던 기록관, 클럼벨 역시 같은 생각에 안색을 굳혔다.
“설마 폐하께서 이미 마음을 정하신 것은…….”
미간에서 입술까지 이어진 십자의 흉터가 꿈틀거리며 더욱 짙은 불안감을 드러냈다.
“……아니, 그럴 분은 아니야.”
그것은 기대일까, 확신일까.
말한 이조차 스스로 뱉은 말에 자신이 없는데.
– 전하. 폐하의 전언이 있습니다.
방문 밖에서 호위기사의 외침이 들려왔다.
어쩐지 싸한 기분.
“들어와.”
클리드는 불안한 예감을 애써 억누르고 기사를 불러들였다.
“추후 다른 명령이 있을 때까지, 모든 황족은 황궁 밖으로 나서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특히 전하께서는요.”
기사의 말을 듣고는 안색이 더욱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스는 성국에 보내고? 나는 강제 근신이라고?”
불안감과 분노가 뒤섞인 음성.
황자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무력을 자랑하는 1황자, 클리드의 살벌한 기세가 보고하던 기사를 찍어눌렀다.
“……저, 저는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합니다. 전하, 부디 용서를…….”
최상급기사의 기세를 간신히 견뎌 낸 황궁 기사가 신음을 토한 다음에야 클리드는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손을 내저었다.
“알겠다. 가 봐.”
“예, 예. 감사합니다, 황자 전하.”
기사가 후다닥 사라진 뒤, 클리드는 깊은 한숨과 함께 옆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인 것 같나?”
하지만 질문을 받은 클럼벨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쪽으로 보기는 힘들었으니까.
“바로스가 무언가를 한 것 같은데…….”
클리드는 일전에 실종되었다 돌아왔다던 때에 보았던 배다른 동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주변인들을 살뜰히 챙기는 척하면서도 사실은 전부 이용 대상으로만 보던 뱀 같은 녀석.
아니, 일이 잘못될 때면 꼬리 자르듯 죄를 떠넘기고 쳐내는 놈이었으니 도마뱀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놈이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말한 것도 모자라, 그것조차 이용하겠다고 말했을 때. 클리드는 사실 내심 충격을 받았었다. 경쟁자가 한층 성장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패배자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 또는 죽음보다 못한 비참한 삶뿐인 이 지독한 경쟁에서, 경쟁자의 약진은 전혀 달가운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상황은 그 우려가 현실로 다가온 것 같았다.
“……섣부른 짐작은 금물입니다, 전하. 지금 돌아가는 사정에 대한 정보부터 알아보시지요.”
“그래. 그래야겠지. 그런데 폐하의 명으로 입을 닫아 버린다면, 내가 어떻게…….”
“동익왕 전하가 계시지 않습니까. 최근에 바로스 황자와 함께하신 적이 있으니, 그분이라면 작은 힌트라도 주시지 않을까요?”
“……바로스의 대부였던 사람이다. 모계 쪽으로 가면 녀석의 외삼촌이기도 하고.”
“동익왕 전하는 혈연에 연연할 사람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황제가 되실 가능성이 있는 한, 작은 연줄이나마 남겨 놓으려 할 것입니다.”
“……그렇겠지.”
정보를 얻을 만한 인간이 고작 그자뿐이라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함께한 추억이나 인연 같은 것이 없음에도 언제나 친한 척, 웃으며 다가오는 자.
그래서 어렸을 때는 황실의 친인척 중 그나마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확실히 안다.
황실과 관련된 모든 쓰레기 중에서 가장 못 믿을 자를 꼽자면 그자가 첫손에 꼽히는 자라는 것을.
하지만 지금은 대안이 없었다.
“……동왕부로 통신을 연결하라. 아니, 동익왕 직통으로.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도록.”
“예, 전하.”
* * * [허허. 용건은 잘 알겠지만, 이거 내가 대답하기는 좀 곤란한 문제인데?]
능글맞은 웃음을 짓는 동익왕, 제라드 폰 아세리안의 모습은 역시나 거슬렸다.
하지만 클리드는 그런 티를 내지 않은 채,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말 할 수 있는 것만이라도 알려 주십시오. 그리해 주시면 그 호의는 잊지 않겠습니다.”
[호오. 고명한 1황자께서 고개까지 숙이다니. 흠……. 어쩔 수 없지 그럼. 조금이라도 말해 줄 수밖에.]통신구 속 동익왕의 푸른 눈이 살짝 빛나는 것을 보니 절로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저 작자의 눈이 빛날 때마다 그리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었으니까.
‘적당히 걸러 들어야겠어.’
그렇게 결심해 보지만, 이어진 말의 내용은 그렇게 적당히 걸러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 폐하는 2황자를 통헤 카셀 마탑을 통제하고자 하시네. 그리고 그 결과가 최근 성국의 새 교황이 발표한 선언문이지.]성국!?
‘성국이라니!’
동익왕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초월했다.
아레스 제국이 대륙의 패권 국가로 자리매김한 이래, 더 확장하지 못하고 성장을 멈춘 가장 큰 이유.
“카셀 마탑이 성국을 통제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까?”
[글쎄. 나야 자세히는 모르지만, 지금 상황을 봤을 땐 어느 정도 그렇다고 봐야겠지?]“그들의 마법은 신성한 기운에 쥐약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알 리가 있나. 사라져 버렸다는 고대의 비전을 찾았을 수도 있고, 뭔가 다른 수가 있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폐하가 원하는 대로, 또 2황자가 요청한 대로 그들이 성국을 움직였다는 것이지.]“그럼…….”
[2황자가 성국으로 향하게 된 것도 그 일환이라고 봐야겠지.]“그럼 지금 이 시기에, 황족들의 외부 출입을 금한 것은 어떤 맥락입니까?”
[글쎄, 그건 나도 정보가 없어서……. 뭐 짐작 정도야 해 볼 수는 있지만 말이야.]“짐작이라니요?”
[흐음. 이런 것까지 말해도 될지 모르겠군. 근거는 없는 말인데……]동익왕의 곤란하다는 표정은 클리드의 조급함을 이끌어 냈다.
“고견을 들려주시면 이 조카, 그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혈통상으로 방계의 먼 친척이기도 하고, 실제로 2황자의 모친은 저 동익왕의 동생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자면, 1황자인 클리드 자신과 동익왕은 숙질간이라 하기에 무리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단어는 동익왕을 웃음 짓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하하하. 그래, 조카. 조카가 그리 원하는데 의견 정도야 말해 줘야지. 물론 그게 조카한테 좋은 말은 아닌 것 같지만 말이야.]“예?”
흔들리는 클리드의 눈동자.
그 눈동자를 보며 미묘하게 눈을 빛내던 동익왕은 이내 안색을 굳히더니, 굳이 목소리를 낮춰 가며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말일세. 황제 폐하께서 2황자를 후계로 점찍은 게 아닐까 싶네. 성국을 삼킨 제국의 황제. 오래전부터 황실의 숙원이 아니었나?]콰직.
그 말에 클리드의 발밑에서 파열음이 일었다.
그가 밟고 있던 대리석 바닥에 금이 가는 소리였다. 표정은 애써 관리했지만, 분노와 함께 표출된 힘은 조절하지 못한 탓이었다.
하지만 클리드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긴커녕 오히려 감정을 드러내고 말았다.
“폐하께선 그럴 분이 아니십니다. 설령 필요하다 한들, 본인이 직접 지시한 계승전의 원칙은 지키실 분입니다!”
[황제는 제국의 이득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사람이지. 조카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자네를 황궁에 묶어 둔 사이 2황자가 성국에서 공을 세우면 결국 계승전의 결과도…….]동익왕은 말끝을 흐렸지만, 클리드의 뇌리엔 자연스레 그 뒷말이 떠올랐다.
‘안돼! 빌어먹을!’
근거는 없다지만 설득력은 넘쳤다.
그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무는데.
[조카. 내 생각엔 조카가 그냥 그대로 황궁에 있으면 안 될 것 같단 말이지.]우환을 자극하는 동익왕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해 주시는 겁니까? 그냥 두시면, 진짜 외조카인 바로스에게 더 유리해질 텐데요?”
충분히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허허, 무슨 그런 말을. 조카도 바로스 그 녀석을 알지 않나. 그 녀석이 외삼촌이라고 해서 더 편의를 봐줄 것 같은가?]그건 그렇지.
당신과 똑 닮은 놈이니까.
동익왕의 말은 분명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조카. 내가 자네를 좀 도와줄 테니 차후에…….]미묘하게 빛나는 눈동자와 함께 긴 이야기가 이어졌다.
동익왕의 푸른 눈 속에 아른거리는 회색빛은 통신구 너머에선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아레스 제국을 인류의 대표로 인정하니, 성국은 제국 황실의 대표를 명예 추기경으로 추대하여 인류의 영광된 미래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