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29)
329화겨울철답지 않게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창밖.
하지만 별궁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미녀의 얼굴은 날씨와는 반대로 냉랭하기만 했다.
– 2황자가 실수해 준 덕분에 좋은 기회가 생겼다.
– 맥라인 혼란 작전은 전면 보류할 것이다.
– 돌아오기 전에 맥라인 왕성에 사람을 심어 놔라.
– 제국과 맥라인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혼란을 더욱 크게 만든다. 그리고…….
– 신들이 떠난 시대를 더욱 가속화하겠다.
“내 목숨을 노린 것이 고작 실수라…….”
스승과의 통신을 떠올린 루이사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탑의 목적은 안다. 그 이상에도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을 이루기 위해 희생되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면 어찌 좋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럼에도 지금 그녀로선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임무를 일부 실패한 것이 없던 일로 되어 버린 상황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바로스. 언젠가는 대가를 치르게 해 주지.”
그저 그리 다짐하며 이를 갈 뿐이었다.
더구나 그 말과 함께 내려온 명령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카셀 마탑에서 사람을 심어 놓으라는 말은 확실히 세뇌된 사람을 만들라는 뜻이었다.
‘머리가 갑자기 좀 나빠져도, 어색한 행동을 해도 티가 나지 않을 사람.’
그러면서도 중요한 요직에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겠냐고.”
절로 혼잣말이 나올 정도로 무리한 조건이었다. 심지어 접근하는 것만으로 탑의 마법을 깨트릴 만한 자가 왕으로 있는 나라가 아니던가.
“차라리 진짜 왕제를 꼬시는 게 쉽지.”
세간에 퍼진 소문을 생각하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호기심에 들어 본 로니안 백작과 자신의 소문은 이제 살이 붙어 온갖 민망한 이야기들이 뒤섞여 있었다.
혼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녀도 여자인지라 조금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렇게 막막한 명령을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레 현실도피를 하게 되니, 어느 순간부터는 자꾸 그런 민망한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진짜 꼬셔 볼까?”
왕제를 꼬셔서 왕을 배신하게 만든다.
저잣거리에 나도는 소설 중엔 흔히 있는 이야기 아닌가.
막막한 심정에 헛된 상상을 하던 나온 루이사가 피식 헛웃음을 지을 때.
방문 밖에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로니안 백작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하. 타이밍도 참…….”
습격 사건이 제국의 수작임을 감추고, 서로 사이좋은 모습을 연출하기 위한 일종의 연극.
그녀로서는 이 무대가 짜증스러울 뿐이었지만, 주연 중 다른 한 사람은 참 부지런했다.
딸칵.
“한가하신가 봐요?”
시종이 차를 따르고 방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루이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냉랭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더 이상 연기를 할 필요도 없는 관계.
하지만 붉은 머리 붉은 눈의 덩치 큰 청년은 그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지금은 이게 제 일이니까요.”
“그리 달갑지는 않으시겠네요.”
“뭐, 그나마 미인이시라 눈은 즐겁습니다.”
이제 스무 살 언저리. 한창 혈기가 넘칠 나이였다.
하지만 작정하고 꾸민 미인이 몸매가 다 드러나는 옷을 입고 바로 앞에 앉아 있음에도, 청년의 눈빛에서 욕정의 기색 따위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저 나이에 초인이 되었으면 자제력도 상당하겠지.’
그것도 모르고 은밀히 마법까지 썼던 과거의 자신이 떠올라 쓴웃음만 나왔다.
뭐, 결국 그것이 발각되었기에 로니안 왕제의 시선이 더 무심한 것이기도 할 터였다.
“뻔뻔하기도 하고. 역시 형제가 비슷하네요.”
“하하하. 그런 얘기는 또 처음 듣는군요. 저랑 형님이 닮았다니.”
확실히 붉은 머리 붉은 눈의 특징이 너무 강렬해서 그렇지, 이목구비 자체는 두 형제가 무척이나 달랐다.
친어머니를 닮은 로건과 배다른 어미 출생에 아버지를 쏙 빼닮은 로니안. 게다가 어렸을 때는 성격조차 완전히 딴판이었던지라, 가신들 중에는 반드시 형제간에 분란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한 사람도 있었다 했다.
다만 자신이 형과 닮았다는 말을 좋아했었다는 것을 빼면.
자연스레 미소를 지은 로니안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뭐, 뻔뻔하기로는 공주님만 하겠습니까. 테러범이 피해자한테 뻔뻔하다고 하는 것만큼 뻔뻔한 일이 또 있을까요.”
“피해자? 누가 피해를 보긴 했나요? 저만 피 토한 것 같은데?”
“우리 기사 한 명도 중상을 입었습니다. 아, 혹시 사람 정신을 가지고 놀다 보면 일반 기사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겁니까?”
“살았으면 된 거죠.”
웃으면서 나누는 대화엔 그 표정과는 달리 가시만이 가득했다.
그날 이후로 줄곧 지금처럼 피곤한 대화만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창문 밖에서 미소 짓는 그들을 보는 시종들은 방 안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한 줄로만 알 것이다.
“동왕부에서 예물을 잘 받았다고 하더군요. 이러다 조만간에 정말 결혼식 날짜가 잡히겠습니다.”
“걱정 마요.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계속 이곳에 머무신다면 정말 사실로 확정될까 두렵습니다.”
“어차피 곧 돌아갈 거예요. 신경 끄세요.”
호로록.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다 보니 목으로 넘어가는 차가 무슨 맛인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앞으로 한 시간가량은 또 이 피곤하고 지루한 대치를 이어 가야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루이사가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으려는데, 상대에게서 이전과는 달리 꽤 솔깃한 말이 튀어나왔다.
“아, 형님께서 최근에 또 큰일을 하나 벌이시려나 본데요.”
“큰일이요? 흠.”
관심 없는 듯 무심한 표정을 연기하지만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싱긋 미소를 지은 로니안은 찻잔을 다시 들어 올리며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런데 제국이 신경을 쓸지도 모르니 동왕부에서 적당히 무마해 줬으면 한다는 전갈이 있었습니다.”
“하?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시는 건가요?”
“지금 우리 관계가 아주 좋지 않습니까. 표면적으로는.”
“말 그대로 표면적이죠.”
“제국과 싸우기 위함입니다. ‘그쪽’에서 좋아할 것 같은데요.”
묘하게 강조하는 단어가 귀에 거슬렸지만, 일단은 호기심이 더 컸다.
“들어나 보죠. 무슨 일이죠?”
“국경의 요충지 몇 군데에 요새를 지을 생각이십니다.”
풉.
그 말에 마시는 척하던 찻물이 고스란히 입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오러유저답게 제게로 뿜어지는 찻물을 순식간에 피한 로니안이 얄미웠지만, 루이사의 신경은 금세 대화 주제로 넘어갔다.
“뭐라고요?”
“반응을 보니 제대로 들으신 것 같은데요?”
“하. 국경에 요새? 대놓고 제국과 싸우겠다고 선언하려는 거예요? 그래 놓고 우리더러 무마해 달라?”
“명목상으론 ‘서쪽’만이 아니라 국경 전체라고 알릴 겁니다. 물론 실제로는 서쪽에만 건설하게 되겠지만.”
“제국이 눈뜬장님인 줄 알아요!?”
“뭐 어쩌겠습니까? 어차피 내정에 간섭하지는 못할 테니 경고 정도나 하겠죠. 아니면 좀 더 빨리 쳐들어오거나.”
– 제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요동칠 거다. 수십 년간 평화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변화를 숨길 수도 없을 거야.
– 어차피 일어날 전쟁이라면, 그 시기를 우리가 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형의 말을 떠올린 로니안이 미소를 짓는데.
“하……. 그럼 결국 당신들 다 망해요.”
루이사가 한숨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말을 토해 냈다.
이내 푸르고 붉은 눈이 교차하며 치열한 눈빛이 오갔다.
‘맥라인, 제국과의 전쟁을 기정사실로 알고 준비하는 거야.’
‘부인하지 않아. 이 자들도 알고 있어. 제국이 진짜 전쟁을 준비한다는 걸.’
한 번의 문답만으로도 한쪽은 왕국의 사정을, 한쪽은 추측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각자 생각을 정리하는 잠시간의 침묵 끝에 루이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현 황실의 정책상 대놓고 공표하지는 않겠지만 은근한 압박이 들어올 거예요. 대가는요?”
“글쎄요. 공주님의 무사 귀환 정도면 어떨까요.”
“흥. 내 목숨으로 협박한다 해도 안 될 일은 안 돼요.”
“협박이 아니라 제안이죠. ‘그쪽’은 좋아할 것 아닙니까?”
그 말에 루이사가 잠시 침묵하자 로니안은 느긋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여유로운 몸짓과는 다르게, 그 역시 속으로는 무척 긴장하고 있었다.
‘자 대답해.’
동익왕은, 동왕부는 검은 뱀과 한패일까 아닐까.
어떤 식으로 대답하든 유추는 가능할 것이다.
로니안은 그렇게 기대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어찌 나올지는 나도 몰라요. 여기 있는 나 말고, 직접 접촉해 보시죠.
루이사의 대답은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그들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을 맺었다.
“그럼 쉬십시오.”
서쪽 창가에 석양이 내려앉는 시기, 침구 정리를 마친 시종이 허리를 숙이며 돌아서는데.
“지금부터 왕실의 변화는 실시간으로 보고해. 특히나 최근에 왕이 어디로 사라졌었는지를 중점으로.”
로니안이 돌아간 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루이사가 시종에게 명령을 내렸다.
대체 이 왕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캐내 봐야겠다.
그런데.
“……예? 왜 제게 그런 말씀을……?”
어색한 반문이 돌아왔다.
“음?”
곱상하게 생긴 여자 시종은 루이사의 푸른 눈을 보며 어색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지만, 공주님. 저는 맥라인의 시종관으로 그런 말씀은 따를 수가 없습니다.”
옅은 ‘불꽃무늬’가 새겨진 궁장을 입은 시종의 대답에 루이사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내가 언제 이 시종에게 세뇌를 걸었더라? 대충해서 벌써 풀릴 때가 됐나?’
일개 시종에겐 그리 치밀하게 작업을 한 적이 없으니, 기억도 흐릿했다.
‘여러모로 짜증이 나는군.’
바로 표정을 굳힌 그녀의 푸른 눈에 회색빛 마력이 스쳐 지나갔다.
[하라면 해.]마력이 담긴 그 음성에 다시금 시종의 눈이 묘하게 풀렸다.
“……예.”
이내 시종에게서 느릿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제야 흥 하고 코웃음을 친 루이사가 돌아섰다.
왕이나 그 측근은 손댈 수 없지만, 일반 시종들은 그녀의 마법을 벗어날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니 별궁에 머무는 모든 시종들이 그녀의 눈과 귀가 되어 왕궁의 모든 정보를 물어다 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장담했다.
돌아선 시종의 눈빛에 어린 자신의 마력이 벌써부터 조금씩 흩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자각하지 못한 채로.
* * *
“요 며칠 근무할 때마다 이상하게 컨디션이 좋네.”
“너도? 나도 그런데?”
“배식이 잘 나와서 그런가?”
“에이, 그거야 요즘 얘기도 아니지. 폐하께서 즉위하신 뒤부턴 쭉 좋았는데.”
“하긴 그렇지. 근데 정말 요새는 출근하는 게 오히려 더 편해. 복잡하던 고민도 일하다 보면 풀리고.”
“나도 나도. 피곤해 죽겠다가도 갑옷을 입고 나면 오히려 힘이 더 난다니까?”
그랑의 성문 경계를 서던 병사들이 웃으며 잡담을 나눴다.
하지만 그들은 동서남북의 모든 병력과 왕성의 모든 이들이 자신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모든 반응이 왕국의 가장 높은 이들에게 보고되고 있다는 것도.
“마법진의 효과는 확실합니다. 아울러 왕성에 근무하는 모든 이들에게 불꽃의 문양을 새긴 제복을 입을 것을 의무화했습니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겠지. 그럼 슬슬 발표해도 되겠군.”
“예? 무슨…… 발표요? 설마……? 이거 기밀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얘기는 아니야.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로건의 의뭉스러운 웃음에 데미안은 어리둥절했고, 이미 그 사정을 알고 있는 드웨인은 또다시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저녁, 왕실의 포고문이 전국에 걸렸다.
– 국방 강화를 위해 국경의 요충지에 요새를 건설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