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3)
33화데이비스 백작가.
전통적인 왕당파의 일원으로, 영지는 없지만 과거 2대에 걸쳐 재무대신을 역임해 온 그랑의 명문가였다.
현 가주인 팔룬 데이비스 백작 역시 불과 스물다섯의 나이로 재무부의 서기관을 역임하고 있었다. 아마도 십여 년 이내에 3대가 연속 재무대신이 될 것이라 예상되는 바였다.
그렇기에 백작가에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이들은 넘쳐났고, 손님이 많은 만큼 파티도 잦았다.
덕분에 데이비스 백작가의 저택은 언제나 넘치는 손님들로 시끌벅적했다.
“호오. 불꽃 문양은 처음 보는군요. 맥라인 남작가라, 좋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은빛 신분패에서 불꽃 문양을 확인한 데이비스 백작가의 문지기.
기사도 아닌 병사에 불과한 그가 로건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반 존대에 가까운 어투로 피식 웃으며 손짓했다. 호가호위라 했던가, 주인의 위세가 대단하니 병사조차 하급 귀족을 만만히 대하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광경이었기에 로건은 아무렇지도 않게 방명록을 쓰고 거대한 저택의 내부로 들어섰다.
드넓은 정원과 맥라인의 내성보다 넓은 저택은 처음 오는 이라면 길을 잃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복잡해 보였다.
하지만 지나가는 시종들에게 물을 것도 없이 파티장에서 흘러나오는 웅장한 음악 소리가 자연스레 로건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파티장에 들어서기 전에 로건은 다시 한번 신분패를 꺼내야 했다.
파티장 입구를 지키는 기사들이 로건의 어색한 연미복과 떨떠름한 표정을 보며 의심을 한 것이다.
“아, 실례했습니다. 수도의 멋진 문화를 즐기다 가시길 바랍니다, 공자.”
신분을 확인했음에도 피식거리는 모양새가 그리 호의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맥라인 남작가의 자제분 드십니다!”
좀 과하다 싶은 큰 목소리와 함께 파티장에 들어서자 사방에서 수많은 시선이 꽂혀 들었다.
“누구야?”
“맥라인?”
“그런 가문이 있었나?”
“딱 보니 촌놈이네.”
“어머. 세상 촌스러운 파티복 좀 봐.”
하지만 로건에 대한 관심은 그것이 다였다.
파티는 자신보다 영향력 있는 사람을 만나거나 매력적인 이성을 찾으려 하는 사교의 장이었다.
붉은 머리, 붉은 눈에 제법 괜찮은 외모는 시선을 끌 만했지만, 금색과 붉은색으로 알록달록한 ‘지나치게 화려하고 비싸 보이기만 하는’ 연미복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로건은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은 선택이었어. 필립.’
맥라인 가문에 대해 아는 이가 없다는 것은 가슴이 아팠지만 굳이 목적과 상관없는 인연 따위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 모인 꿀을 쫓아 날아다니는 나비들은 꽃밭에 폭풍이 불면 다 사라질 것들뿐이었다.
곧 다가올 혼돈의 시기, 살아남아 이름을 떨칠 이들은 평일 낮부터 이런 명분도 없는 파티장에 죽치고 있지 않을 테니까.
“어머, 촌스러워. 도대체 어디 깡촌에서 온 걸까요.”
“눈길 주지 말아요. 당신의 아름다운 눈에 더러운 것을 담지 않았으면 해요.”
그러니 바로 앞에서 들으란 듯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대화를 나누는 커플도 바보로 보일 뿐이었다.
신경 쓰지 않고 목표를 향해 걷는데 누군가가 로건의 앞을 가로막고 정중히 인사를 청해 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심슨 브라운입니다.”
“로건 맥라인입니다.”
“맥라인 백작가의 명성은 익히 들어 왔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남작가입니다만?”
“예에? 백작가 아니었습니까? 분명히 제가 외운 귀족 계보에는……. 아?! 으, 으음. 이거 실례했습니다. 제가 사람을 착각했군요.”
“……음?”
정말 실수를 했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뒷걸음질 치던 놈이 자신의 일행인 듯한 사람들과 손뼉을 마주치는 것이 보였다.
‘봤지? 했다. 했어?’ 눈에 보이는 입 모양이 이 시답지 않은 짓거리가 그저 유흥이었음을 알게 해 주었다.
‘……세상에 별놈이 다 있군.’
폭풍이 올 줄 모르고 세상 편하게 꿀을 찾는 나비들을 대충 무시해 가며 걸은 끝에 드디어 목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파티의 주최자인 팔룬 데이비스 백작이었다.
적당히 나온 뱃살에 둥글둥글한 얼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주인공의 앞에는 여러 귀부인이 모여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무리 부정부패가 심한 나라라지만 이 시간에 재무부의 중책이 파티나 열고 있는 것은 정말 이상한 풍경이었다.
‘알고 보면 불쌍한 놈이지.’
집안으로 보나 본인의 직위로 보나 분명히 훌륭한 남편감이었다.
그러나 불과 스물의 나이에 처를 얻고, 후처와 첩까지 얻었음에도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불능이니까.’
녹스에서 전해 준 자료를 분석하다 세 가지 장부 모두에서 이 녀석의 이름을 발견했고, 불현듯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잠깐이지만 나름 유명해지는 이름이었으니까.
‘부인 때문에 자살한 백작.’
– 서지도 않는 놈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부인이 파티장에서 터트린 폭탄이 결국 그를 자살로 몰고 갔었다.
로건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남들의 시선과 명예가 목숨을 좌우할 만큼 중요했던 모양이었다.
물론 로건은 데이비스 백작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가엔 큰 관심이 없었다.
그저 이미 부인이 셋이나 되면서도 집안 어른의 강요로 또 부인을 얻기 위해 파티를 벌이는, 저 불쌍한 자의 앞날에 구원의 손길만 내리면 되는 것이다.
로건은 데이비스 백작의 옆으로 다가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백작님. 파티의 주인께 손님이 인사를 올리고자 합니다.”
“오, 이런. 새 손님이시군. 환영……하오. 으음, 어디에서 온 손님이신지?”
로건의 옷차림을 보고 순간 당황한 팔룬 데이비스는 간신히 웃음을 터트리지 않고 물었다.
이런 열린 파티라면 초대받지 않은 손님도 손님이었다.
귀족이라면 누구나 참석 가능한 파티였으니 주최자로서 예의를 지키는 것이었다.
“서남부 지역 맥라인 가문의 장자, 로건 맥라인이라고 합니다. 장사차 수도에 왔다가 백작님의 위명을 듣고 인사를 드리고 싶어 왔습니다.”
그것은 이런 어딘지 모를 촌구석에서 올라온 장사치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예의를 지킬 줄 아는 모범적인 귀족이었으니까.
“오, 장사라. 이미 그랑에는 없는 게 없는데. 하하, 하긴 변방에서 오셨으니 수도에 없는 신기한 물건이 있을 법도 하지요.”
까더라도 돌려 깐다. 이것이 진정한 귀족의 화법이었다.
팔룬은 자신의 절묘한 언어적 유희에 스스로 감탄했다.
파티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조금은 씻겨 나가는 듯했다.
그런데 이 시골 귀족은 주제 파악을 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럼요. 없는 물건이라 확신하기에 팔러 왔습니다.”
“아…… 그렇군요. 어떤 물건을 파시는지?”
일단 응대는 해 주지만 관심이 없는 것이 확연히 티가 났다.
“약입니다. 세상에 다시 없는 약.”
“아, 그렇구나. 그럼 전 이만…….”
“남자에게 참 좋은, 특히 밤일에 참 좋은 약이지요.”
마지막 말은 순간적으로 빠르게 접근해 녀석의 귓가에만 들리도록 나직이 속삭였다.
그 갑작스러운 접근에 놀랄 법도 했지만, 백작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은 결코 그것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 말은?”
“정력제입니다. 정력제. 설령 고자라도 서게 만든다는, 발기부전 치료제도 되지요.”
역시나 들릴 듯 말 듯한 속삭임이었지만 백작의 귓가에는 천둥이 치는 소리만큼 크게 들릴 터였다.
하지만 팔룬의 반응은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귀족의 자제분께서 굳이 정력제를 판다는 겁니까?”
망신을 주겠다는 것인지, 굳이 큰 소리를 내어 주의를 끈다.
주변의 귀부인들이 조금 얼굴을 붉히며 돌아설 정도였다.
녀석의 표정을 보니 마음이 쉽게 읽혔다.
‘그래. 못 믿겠다 이거지?’
당연히 그럴 수 있었다. 사정이 사정인 만큼 이미 많이 알아봤을 테니까.
“효과를 확신하니까요.”
로건은 당황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이며 여유롭게 웃었다.
“귀족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군요. 하지만 뭐…… 이 나라에서 장사야 자유죠. 열심히 해 보시길.”
팔룬은 로건의 위아래를 훑어본 뒤, 얼굴을 굳힌 채 돌아섰다.
그런 놈을 보며 로건은 준비했던 마지막 한 수를 꺼내 들었다.
“그래도 외지에서 온 터라 예의는 지켜야지요. 수도의 유력자분들께 인사를 드리고자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선물?”
“개당 백 골드로 판매 예정인 ‘임포릭’이라는 제품입니다. 특별히 세 정을 백작님께 드리는 선물로 들고 왔습니다.”
백 골드라는 말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선물이라는 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백작이 쉽게도 다시 돌아봤다.
“부작용도 전혀 없는 최고급 명약이라는 것을 귀족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이어진 로건의 마지막 말에 백작의 눈동자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 * *
“백작이 이 약을 사러 올까요?”
“글쎄. 안 올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예? 그럼 왜…….”
“하지만 내가 거기만 갈 건 아니거든.”
“아,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급한 자가 우물을 파는 법이지. 몇 번만 미끼를 던지면 반드시 무는 놈이 나온다. 그러면…….”
“그것으로 게임은 끝나겠군요.”
“아니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거지.”
서로 말은 달랐지만, 그 의미는 같았다.
로건과 필립이 마주 보며 웃었다.
* * * 그랑 내성의 번화가.
가장 중심에는 왕궁이 자리했고, 그 주위로 고위 귀족들의 저택이 늘어서 있었다.
내성 서문에서 그 중심가로 향하는 길거리는 수도 그랑 내부에서도 가장 높은 땅값을 자랑했다.
“이 코딱지만 한 자리가 한 달에 1만 골드라고?”
로건이 불과 십여 평에 불과한 너비의 공간을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데, 중개인의 표정은 당당하기만 했다.
“하하, 공자님. 이것도 간신히 나온 자리입니다. 이곳에서 장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필립. 어떻게 생각하나?”
“저희가 공간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적당히 꾸며 놓으면 구색은 갖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장사를 할 때는 이것저것 따지고 비교해 보겠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일단 구색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필립의 말에서 숨겨진 속뜻을 읽어 낸 로건이 쓴웃음을 지었다.
일이 잘 풀리면 귀족들이 알아서 자신을 찾아오리라고 생각한 그와는 달리, 필립은 정식 상단이나 상가처럼 정식 판매 루트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물론 상가를 연다고 해서 귀족들이 직접 찾아오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정식 판매 루트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파급력이 달라집니다.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소문이 몇 배는 빠르게 증폭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 말이 설득력이 있어 내성의 가장 비싼 자리에 상가를 구했다.
하지만 맥라인 성에서는 상상도 해 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월세가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좀 더 빡세게 움직여야겠군.”
“전 우선 상가를 고급스럽게 꾸며 놓겠습니다.”
“……그래.”
결정은 빨랐고, 로건은 그날부터 더욱 바빠졌다.
* * * 그란디아 왕국의 귀족 중 3/4은 수도인 그랑에 몰려 있었다.
전체 귀족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영지를 갖지 못한 명예 귀족들의 대다수가 수도에 있기도 했지만, 정작 영지 귀족들도 영지 운영은 관리인이나 후계자에게 맡기고 본인은 수도에 기거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들의 목적은 대부분 인맥이었고, 그 인맥을 쌓기 위한 파티는 오늘도 수도 그랑의 중심부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파티에 수도에 갓 올라온 시골의 귀족 자제가 기웃거리는 것은 그리 드문 풍경은 아니었다.
인맥을 위해 열린 파티는 최소한의 자격, 즉 귀족 신분만 가지고 있으면 참석할 수 있는 곳이 대부분이었으니까.
다만, 그런 이들 중에 로건처럼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초청장이 있으십니까? 없으시다면 신분패를 보여 주십시오.”
병사가 로건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예의를 지킨다기보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서였다.
병사의 그런 반응이 벌써 일곱 번째라 로건은 익숙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신분패를 들어 문양을 내보였다.
‘슬슬 하나쯤은 입질이 올 때가 됐는데…….’
그는 하루에 파티 하나, 혹은 둘씩 찾아다니며 미끼를 뿌렸다.
목표로 점찍은 이들은 희한하게도 보통의 귀족들보다 파티를 많이 열었다.
‘자격지심 때문일까?’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이유야 아무래도 좋았다.
하나의 물꼬가 트이면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확 풀리기 시작할 테니까.
지금은 그것을 위해 미끼를 하나라도 더 던지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로건은 오늘도 몸이 터지지 않는 것이 신기한, 사람 모양의 돼지에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얘는 살 때문인 거 같은데. 약보다 살을 빼는 게…… 끄응. 일단 미끼는 던지고 보자.’
그렇게 고생한 보람은 채 5일이 지나기 전에 나타났다.
* * *
“오늘은 파티에 안 가십니까?”
좁은 공간을 오히려 귀빈을 위한 개인 대면실처럼 고급스럽게 꾸며 놓은 공간.
2만 골드나 하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로건이 필립의 물음에 조금 늦게 답했다.
“뭔가 문제가 있나 생각 중이야. 천박한 옷이 이미지를 너무 깎아 먹었던 걸까?”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로건 님의 전략은 충분히 합리적입니다. 이제 슬슬 반응이…….”
“계십니까!”
절묘한 타이밍에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네요.”
“왔다!”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