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30)
ㅛ느1627330화국경이 남북으로 400km가 넘게 이어져 있는 두 나라, 제국에서 맥라인으로 오는 길은 굳이 따지자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상단이 움직일 만한 안전한 길을 찾자면 그 숫자는 수십 개 정도로 줄어들고, 수천 혹은 만 단위의 병력이 무탈하게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찾자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정확히는 딱 세 군데가 있었다.
왕국과 제국의 교역 중심지인 카일과 루스펠하임을 잇는 ‘상인의 길.’
북부 마수림의 남쪽을 돌아 북부의 사냥꾼 도시들을 잇는 ‘사냥꾼의 길’
남부 산맥의 북쪽을 우회하여 남부의 도시들을 잇는 ‘모험가의 길’.
“엄밀히 말하면 다 돈이 되는 길에 대로를 만든 거니, 모두 상인의 길이라 해도 무방한데 말이야.”
로건의 말에 듣고 있던 데미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세 군데가 전부 침입로가 될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중부 대로만 해도 한 번에 10만 대군이 진격할 수 있는 대평원입니다. 그런데 남북의 교역로까지…….”
“제국군의 규모는 그 이상이니까.”
실제로 전생에 제국군이 처음 침략을 감행했을 때, 검공과 에스페란자 영지군의 분전으로 10만이 훌쩍 넘어가는 제국의 대군을 일주일 이상 국경에 묶어 두었다. 그렇게 왕국 최강의 오러유저와 최강의 기사단이 분쇄하며 벌어 준 시간 덕에 그란디아 왕실은 부랴부랴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중부 대로의 제국군을 상대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남북의 교역로를 통해 들어온 제국의 대군들이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한 뒤였다.
‘뭐, 미리 알았어도 당시 왕국군으로는 제국군을 막을 수 없었겠지만.’
그러나 지금은 경우가 다르다.
그렇기에 더욱.
“중부 대로는 어쩔 수 없어도, 남북의 요처에는 요새를 지을 만한 곳이 있어. 그 두 군데만 틀어막아도 전쟁이 훨씬 수월해지겠지.”
“대로라고 불리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 수많은 갈림길이 교차하는 통행로입니다. 과연 요새를 짓는다고 틀어막는 게 가능할지…….”
“가능해.”
“……어찌 그리 장담하십니까?”
“그야…….”
전생에 네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 그렇게만 했어도 왕국이 그리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쓴웃음이 나오는 대답은 속으로 삼킨 채 로건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사냥꾼의 길이나 모험가의 길은 중부 대로와는 달리 수십 갈래의 길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교역로지. 하지만 그 모든 길들이 동시에 엇갈리는 교차점이 몇 군데 있어. 제국에도, 우리 영토에도.”
“아……. 어찌 그리 잘 아십니까? 가 보신 적도 없을 텐데.”
“들었어.”
“예?”
너한테.
“그래서 명확한 위치는 생각나지 않아. 지리 확인해 보고, 요새를 건설할 만한 지점을 남북에 각각 한 군데씩만 찍어 봐. 그곳에 요새를 짓고 2군단과 3군단의 병력 일부를 상시 주둔시킬 거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데미안을 보면서도 로건은 빙긋 웃었다.
“당연히 대마법진도 설치하고.”
로건이야 확신이 있었기에 꺼낸 말이지만, 그의 속내를 알 리 없는 데미안으로선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저 어디선가 들은 얘기를 근거로 예산이 얼마가 들지 모르는 국가 정책을 확정하는 모양새였으니까.
하지만 왕의 눈빛을 보니 또 진지하기 짝이 없는지라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하긴, 늘 이렇게 성과를 내는 양반이었지. 말도 안 되게.’
데미안은 한숨을 내쉬며 반박을 포기했다.
“……이제 몇 달 후면 다시 농번기가 시작됩니다. 최대한 빨리 위치를 결정짓고 인부들을 동원해야 합니다. 두세 달 사이에 기본 공사를 끝내 놓고, 수확기 이후에 다시 공사를 진행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두세 달이면 완공도 문제 없지.”
“예?”
“우리한테는 세계 최고의 전문가들이 있잖아.”
“아…….”
로건의 자신만만한 얼굴에 데미안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개고생이 예약된 동료들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 * * 이리 뒹굴.
“이상하다…….”
저리 뒹굴.
“왜 이러지.”
한참을 침대 위에서 뒹굴던 하마르는 뒤뚱거리면서 일어나 짧은 팔을 쫙 펴며 기지개를 켰다.
“흐아암.”
요즘 유난히 나온 것 같은 배를 긁적이며 눈을 끔뻑이니 탁자 위에 채 식지 않은 따뜻한 빵과 차가 차려진 것이 보였다. 방문 앞에는 세숫물이 담긴 대야가 놓여 있었다.
“분명히 잘못된 것은 없는데…….”
잘못된 게 없기만 할까. 십 년 전, 반품되는 드워프 노예 신세로 드워프 대장인의 실력까지 무시당하곤 했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 했던 호사를 누리고 있는 요즘이었다.
특별히 간섭할 사람도 없는 타렌 마도 공방의 주인.
맥라인의 국력을 책임지는 중책 중 하나이자, 국왕의 심복.
안전을 염려하여 상시 호위기사가 붙어 다니는 것도 익숙해진 뒤에는 오히려 든든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왜 이렇게 심심하지?”
공방이 너무 잘 돌아가서 탈인가.
‘일부러 라인을 고장 낼 수도 없고.’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하마르는 빵을 우적우적 씹었다.
“심심한데 뭐라도 만들어 볼……. 헙!”
그러다 스스로 뱉은 말에 화들짝 놀라 입을 틀어막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으니까.
– 너희 종족은 뭐 제작하는 게 낭만 아니야?
이제는 얼굴을 못 본 지도 몇 달이나 지난 악마의 속삭임을 떠올리며 하마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으으. 아냐, 아냐. 그 인간한테 세뇌당해서 그래. 그럼! 일 안 하고 노는 게 얼마나 좋은데!”
주먹을 부르르 떨며 스스로 다짐하듯 소리쳐 보지만, 솔직히 반년 가까이 제작을 안 하다 보니 손이 근질근질한 것도 사실이었다.
“조각이나 좀 해 볼까.”
그리 생각하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옛 연인이었다.
인간들을 피해 산맥 깊숙한 곳에 숨어 든 드워프들이 모여 살던 마을. 그 안에서도 제게 행복감을 선물해 주었던 한 숙녀, 유독 아름다운 눈빛의 주인이.
“느와르…….”
그녀를 생각하다 보니 그 눈빛을 재현하려고 애쓰다가 주인한테 걸려서 봉변을 겪었던 기억이 또 떠올랐다.
“아으으.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래도 한동안 의식적으로나마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그대를 잊고 있었구려, 느와르. 미안하오.”
문득 떠오른 그 추억에 다시금 망치와 정을 잡고 싶다는 욕망이 불타올랐다. 종족의 낭만이 제작이라는 개소리를 인정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뼛속 깊이 드워프인 자신으로선 또 그만큼 즐거운 일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뭐 조각이야 취미의 영역이지.”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방을 나서려는데.
“하마르 님!!”
쾅.
“억!”
갑작스레 코를 강타한 문짝에 하마르는 뒤로 데굴데굴 구를 수밖에 없었다.
“어? 하하……. 왜 거기 계셨어요……?”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외팔이 드워프, 타메르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으으. 뭐? 왜 거기 계셨어요? 이 개새야, 내가 내 방에 있는 게 잘못이냐!”
눈에 살기가 이글거리는 하마르가 코피를 흘리며 다가오자, 겁에 질린 타메르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왜, 왜 이러세요!”
“내가 언젠가 날을 잡으려 했어. 너 이 새끼, 오늘 죽어 보자.”
“아, 아니. 지금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아니야. 이럴 때야.”
“국왕 폐하의 명령이 떨어졌다고요!”
멱살을 잡힌 타메르의 결사적인 웅변에 하마르의 몸이 멈칫했다.
“……뭐?”
절로 얼굴이 굳어지고 입꼬리가 떨려 오는 것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서, 석 달 안에 요새 두 채를 건설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역시나 그 예감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뭐? 석 달 동안 뭘 두 개 지으라고?”
“요새랍니다.”
“요새? 내가 아는 요새는 성 같은 걸 말하는 건데?”
“……아마도 그 요새가 맞는 것 같습니다.”
“뭔 미친 소리야?!”
“저, 저도 황당해서 바로 소식을 전하러 온 거라구요!! 공문에서는 아이기스 성 지을 때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던데요?”
“……아이기스? 아, 그 토성? 우리랑 그 마법사 양반네랑 개고생해서 만들었던 거?”
“예.”
“그 짓을 또 하라고?”
황망한 얼굴의 하마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물었지만 타메르는 더욱 암담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이번엔 쭉 사용할 수 있게 돌로 지으랍니다. 그것도 두 개나요.”
그제야 하마르는 인식했다. 그 말을 전하는 타메르의 얼굴도 허망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걸.
털썩.
“어으……. 아흐흐, 이 저주받은 주둥아리. 왜 심심하다는 말을 꺼내서…….”
하마르는 화를 내다 말고 주저앉아 자신의 뺨을 철썩철썩 때렸다.
“아니, 느와르. 그때도 그렇고, 그대가 저주라도 건 건 것이오!? 당신이 떠났으면서!?”
그러다 허공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가슴을 퍽퍽 내리치기도 했다.
도무지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행태였지만 그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듯도 해서 테마르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현실 도피군요. 인정합니다, 공방장님.’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저기, 공방장님. 일정을 맞추려면 오늘 바로 출발하셔야 하는데…….”
조심스레 말을 꺼내 보는데.
“으아아아!”
발작하듯 고함을 내지르는 하마르를 보며, 테마르는 무심코 뒤로 성큼 물러나고 말았다.
‘……진짜 미쳤나?’
“……아흐흐흑. 왜 난 행복할 수가 없어.”
다행히 정말 미친 건 아닌 모양인지, 주저앉은 하마르의 얼굴에선 현실을 직시한 대가로 얻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 *
“……그러니까. 이미 있는 성에 마법진을 설치하는 게 아니라, 새 요새를 짓고 나서 거기다 설치할 거라고? 그것도 두 군데나?”
클레이튼의 얼굴에 있는 흉터가 기괴하게 일그러지자 그릭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슬쩍 물러서고 말았다.
이 자애로운 스승은 가끔 그 마음과 확연히 다른 외모 때문에 익숙한 이도 놀라게 하곤 했다.
– 그래서 타인의 반응에 휘둘리지 않고 평정심을 지키려고 노력했지. 그게 마법에도 도움이 꽤 됐단다.
항상 그렇게 말해 오던 스승이지만, 이번에 그가 전한 소식은 그런 수양의 결실을 무너트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예.”
“그것도 석 달 안에?”
“……예.”
“허허. 폐하께서는 우리를 무슨 초인으로 아시는 모양이구나.”
스승님은 초인 맞으세요. 빅토리아도요.
그릭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진실의 소리를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아이기스 성의 일을 생각하시고 일정을 다소 빠듯하게 잡으신 것 같은데, 건의를 드리는 게 어떨까요?”
“……애매하구나.”
“예.”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닐 것 같아서 애매해.”
“……예?”
그릭은 순간적으로 스승이 아침에 뭘 잘 못 드셨나 싶었다.
“아이기스 때와는 다릅니다. 단기전에서 쓸 토성이 아니라, 쭉 사용할 수 있는 돌로 된 성을 지어야 하는 겁니다. 그것도 대마법진을 지하에 설치할 수 있을 만큼 큰 성을요.”
“그래. 그걸 감안해도 가능할 것 같단 말이지. 성 설계만 완벽하면 말이야.”
정말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제자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레이튼은 씁쓸한 웃음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하마르 공은? 한다더냐?”
“그 양반이야 매번 안 하니 못 하니, 죽는소리를 해도 결국 하잖습니까. 가만 보면 즐기는 것 같기도 한데요, 뭐…….”
“그래. 그럴지도.”
피식 웃으면서도 고민을 떨치지 못하는 스승의 모습을 보며 그릭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희는 솔직하게 못 한다고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음?”
“굳이 무리해서 한다고 하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폐하의 명과는 별도로, 입안자인 데미안 자작은 여유가 없다면 완공을 수확기 이후로 미뤄도 된다고 했습니다. 농번기에 지장을 주면 안 된다고요.”
“……그래?”
“예. 더구나 스승님의 지위도 있으니 무리한 일정이라 건의드리고 조정을 하시지요.”
그릭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최근에도 밤낮으로 마법진 연구에 매달렸던 스승이다. 그 여파로 자신 같은 제자들도 개고생을 하지 않았던가.
한데 스승의 생각은 그와는 다른 모양이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스승님. 이미 스승님의 몫은 충분히 해내셨습니다. 굳이 무리하지 않으셔도…….”
“무리하는 게 아니다. 그릭, 내가 말했었지. 마법사는 최대한 말조심을 해야 한다고.”
“예? 아, 예. 그러……셨죠.”
그릭은 몇 년 전 아티팩트의 대량 생산을 성공시켰을 때부터 스승이 해 온 말을 기억했다.
– 거짓을 멀리하고 진실을 쌓아라.
– 그것이 결국 초인의 벽을 넘는 발판이 될 것이다.
그게 마법의 경지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솔직히 아직도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남은 속여도 나를 속일 수는 없는 거야. 내 생각엔 충분히 가능할 것 같거든. 그럼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지.”
하지만 피로한 안색으로도 그리 말하는 스승의 모습은 왜인지 그의 가슴에 깊숙이 새겨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