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Of The Fallen Family RAW novel - Chapter (333)
333화
“필립 상단주가 지급으로 보낸 정보입니다. 아무래도 일리아 주교가 그냥 수행에 들어간 게 아닌 것 같답니다.”
“……뭐?”
이른 아침부터 전해진 좋지 않은 보고에 로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직접 접촉이 안 되면 주변을 통해서라도 연락해 볼까 하여 고행 사제들을 찾아갔는데, 정작 그들 중엔 그녀를 본 사람이 없었답니다.”
“이런…….”
제국과의 전쟁이 코앞에 닥쳐 온 마당에 머나먼 성국의 일까진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성국의 소식을 듣는 순간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묘한 찜찜함이 급속도로 커졌으니까.
단순히 교황의 입지를 위해 고립을 자초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면.
“교황의 발언, 거기다 바로스 황자의 성국 방문. 거기다 성녀의 실종?”
“아무래도 제국에서 무언가 수를 쓴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데미안의 말에 로건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신전은 전통적으로 세속의 권력을 멀리하고, 정치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해 왔다.
그리고 그런 성국을 잘못 건드렸을 시의 후유증을 염려한 제국 역시 성국에는 별다른 수를 쓰지 않았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걸까.’
연신 한숨이 나왔지만 마냥 한숨만 쉬고 있을 상황은 아닌지라, 로건은 재빨리 생각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오스틴 교황의 말이 단순히 세속에 더 관여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제국에 대한 전폭적 협력이라고 가정하면…….”
일리아 주교와도 꽤 친분이 있는 만큼 그녀에 대한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로건에게 가장 심각한 주제는 역시 이것일 수밖에 없었다.
“최소로 봐도 왕국 내부에 맥라인 교구라는 폭탄을 지고 가는 꼴이 되겠어.”
“예. 아무리 사제들이 타락했다 욕을 먹어도 신앙을 버릴 백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이 작정을 하고 흔들면 군 사기가 근간부터 흔들리게 될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럼 최악의 경우는?”
“최악의 경우는 성전기사단의 제국 측 참전입니다. 물론 저희가 무슨 이단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할 리는 없겠습니다만.”
데미안은 그리 단언했지만, 로건은 그 말에 오히려 불길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맥라인 교구의 교구장, 파미엘 대주교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 수년 전부터 이 땅에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 아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 교황께서는 지금 이 왕국의 땅이 ‘신에게서 버림받은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하고 계십니다.
제 스승의 딸이자 자신이 조카처럼 아끼는 스텔라.
그 귀여운 아이를 떠올리거나 만날 때마다 머리 한구석에서 맴도는 찜찜한 헛소리.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마냥 무시하기 어려운 헛소리였다.
“어쩌면 최악의 경우가 될 수도…….”
“예?”
“아니, 아니야. 일단 어떻게든 상황을 알아보고, 정말 제국의 수작이라면 우리도 손을 써야겠어. 넋 놓고 당할 수는 없으니.”
“하지만 폐하, 현지에 있는 필립 상단주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왕궁에 있는 저희로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을 보내야지.”
“예?”
“신전이 숨기는 것을 어떻게든 파헤칠 수 있는 사람을 말이야.”
데미안이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로건의 뒤에서 조용히 시립해 있던 빅토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나서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폐하. 일리아 님을 안전하게 모시고 오겠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네가 가장 적당하겠지. 일리아 주교와 친분도 있고.”
로건이 예상했다는 듯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데미안이 곤란한 안색으로 끼어들었다.
“이곳에서 노비엔스까지는 편도로 석 달은 걸립니다. 가는 동안 모든 일이 끝났을 수도 있습니다. 성녀라는 상징성을 생각하면 일리아 주교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만…….”
타당한 말이었지만 로건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데미안. 자네는 다 좋은데 모든 것을 너무 일반화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예?”
“저라면 일주일, 아니, 사흘 안에 갈 수 있습니다.”
“빅토르 경. 잘 몰라서 그러시나 본데, 말을 바꿔 타며 밤낮없이 전력으로 달려도 일주일은 넘게 걸릴 겁니다.”
“전 할 수 있습니다.”
“허…….”
황당하기까지 한 빅토르의 장담에 데미안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 주군을 바라보았지만, 로건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그에 동조하고 있었다.
“너라면 가능하겠지. 고생 좀 해라.”
초인이 되면서 ‘끝없는 생명력’을 각성한 빅토르는 이제 그 지구력만큼은 동급 최강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실현 가능한 얘기였다.
거기다.
“이번에 얻은 귀신들의 아티팩트도 챙겨 가고. 이미 써 본 적이 있으니 잘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소유주를 잃으면 서서히 효력을 잃어 가는 귀신들의 아티팩트. 그 메커니즘은 클레이튼조차 아직 분석하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는 이번에 루이사를 공격한 귀신들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달까.
“예, 알겠습니다.”
굳은 얼굴로 그리 대답하는 빅토르의 어깨를 두드려 주는데, 옆에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다 해도 신전을 파헤치는 게 물리적으로 파헤치라는 건 아닐 텐데요. 빅토르 경 혼자 가서 어찌…….”
하지만 로건은 데미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렸다. 빅토르의 특성과 실력, 그리고 귀신들의 아티팩트에 필립의 수완이 더해진다면 분명히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으니까.
“혹시나 다른 인력이 필요하다면 필립을 만나 요청해라. 아마 다 준비해 뒀을 거야. 그리고…….”
로건은 걱정스러운 기색이 만연한 빅토르의 눈을 똑바로 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일리아 주교의 안전도 안전이지만, 그보다 제국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부터 알아내야 한다. 처리할 수 있다면 하고.”
“……예.”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았을까.
빅토르의 안색이 조금 더 어두워졌지만, 로건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그리고 바로 그날.
맥라인의 알려지지 않은 초인, 빅토르가 왕성에서 사라졌다.
* * * 두두두두.
히이이잉!
들판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질주해 온 한 기의 기마가 어느 상단의 야영지 앞에서 그 질풍 같은 질주를 멈추었다.
아니, 쓰러졌다.
우당탕탕.
푸르륵.
하지만 말이 피거품을 물며 거꾸러지기 전에 번개처럼 움직인 기수는 이미 ‘불꽃’ 깃발을 단 상단의 책임자 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필립.”
그 덤덤한 인사에 이제 서른 즈음이나 되었을까 싶은 회색 눈의 청년이 황망한 얼굴로 웃었다.
“빅토르, 정말 너구나. 그런데 어찌 사흘 만에……? 설마 나도 모르게 제국에 있었느냐?”
“예, 뭐. 비슷합니다.”
빅토르는 그냥 어색하게 웃어넘겼다.
자신에 대한 비밀도 비밀이거니와, 맥라인 영지 시절부터 필립과는 별다른 친분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자신과 동생이 돈으로 거래되는 것을 보아 온 빅토르는 상인이라면 질색을 했고, 필립은 골수까지 상인의 피가 꽉 찬 인간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티가 났기 때문이었다.
“허허, 아무튼 많이 자랐구나. 이제는 주군과도 비슷하겠는데. 어릴 때만 해도…….”
“필립 님. 죄송한데 제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먼저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몇 년 만에 옛사람과 회포를 풀고 싶었던 필립은 이내 입맛을 다시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 녀석.’
어릴 적에도 상당히 재미없었던 녀석이 다 큰 후에는 더 재미없는 놈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사안의 중함을 알기에 그 역시도 이내 안색을 굳히고 빅토르를 천막 안으로 안내했다.
성도 노비엔스에서 한나절 거리의 숲속.
작은 야영지 가운데 세워진 천막 안에는 중앙 신전 건물들의 대략적인 모형과 커다란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신전의 내부가 상세히 그려진 지도에는 성녀가 감금되어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지점 몇 군데와 그곳들에 관련된 주요 경비 인력의 규모, 교대 시간 등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막 천막 안으로 들어서던 빅토르 역시 놀라 잠깐 멈칫할 정도로 자세한 정보.
“……이걸 전부 사흘 만에 준비하셨습니까?”
“당연히 아니지. 성녀가 감금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다음부터 준비한 거야.”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뭘.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지금 성국이 갑자기 이상한 태도를 취하고 있어서 원자재 상인들 대부분이 거래를 중단하고 사태를 관망하기 시작했어. 나날이 손해가 쌓이고 있다고. 내 돈, 아니 나라의 돈이 줄어들고 있단 말이야.”
“…….”
“뭘 그렇게 봐. 감탄했어?”
이 사람. 하나도 안 변했구나.
헛웃음까지 나오는 옛사람의 일관된 모습에 빅토르는 고개를 저으며 본론을 물었다.
“아니, 아닙니다. 그나저나 성녀께서 잘못되진 않았겠지요?”
“께서? 성녀와 무슨 사이라도 되나? 하긴 상당히 미인이긴 하……. 에헤이, 농담이지 농담. 눈빛 하곤, 씁.”
“……일리아 님은 세상에 꼭 필요한 분입니다.”
살벌하기 그지없는 어린놈이 더 살벌해졌어.
들으라는 듯 투덜대던 필립은 이내 굳은 얼굴로 중앙신전의 모형을 가리켰다.
“여기. 여기 사는 타락한 꼰대들은 어지간해서는 신벌이 무서워서라도 성녀는 못 건드려. 그것도 30년 만에 탄생한 성녀, 아니, 아니지. 전대 교황이 가짜라고 했으니까. 80년 만에 탄생한 성흔의 소유자야. 절대, 죽어도 못 건드리지. 장담해. 생명은 위험하지 않을 거야.”
“그렇습니까.”
왜인지 안심한 듯한 빅토르의 표정에 필립은 정말 성녀와 무슨 관계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예전의 기억이긴 하지만 이 녀석이 동생과 관련된 일을 제외하고는 감정적인 표현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일은 일.
긍정적인 말을 해 줬으면 최악의 가능성도 말해 주어야 한다.
혹여나 정말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당황하지 않도록.
“방금 말했듯, 살아 있다는 것은 확실하겠지만 어떤 꼴일지는 누구도 장담 못 해.”
멈칫.
눈에 띄게 안색이 굳어지는 빅토르를 보며 필립은 쐐기를 박았다.
“역사적으로도 성자나 성녀의 팔다리 한두 개 잘랐다고 신벌을 받지는 않는단 말이지. 아니면 백치를 만들거나. 그런 거 보면 또 신들이 이상하게 느슨해.”
만약 이 말을 듣고 지나치게 흥분한 기색을 보인다면, 군주의 당부를 어기더라도 그를 작전에서 배제하리라.
필립이 그렇게 생각하며 빅토르의 변화를 유심히 살피고 있는데, 빅토르가 담담한 목소리로 의외의 말을 꺼냈다.
“그럴 리는 없겠지요.”
“응?”
“일리아 님은 성녀이기 이전에 교단을 정상화시킨 공신이기도 하니까요.”
“그게 뭐?”
“현 교황의 입지가 아직은 그리 확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지층이 탄탄한 일리아 성녀님의 모습을 외부에 보여야 할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 성녀님께 해를 끼치지는 못했을 테지요.”
끌끌.
필립은 혀를 차며 웃었다.
“……똑똑해졌네, 얼음 덩어리.”
총명한 머리에 압도적인 무력까지 더해졌다면 과연 이런 중책을 맡길 만하다.
왕의 지시를 떠나 현장 책임자로서, 필립은 빅토르의 능력을 신뢰하기로 했다.
그리고 불과 사흘 후 저녁.
해가 거의 넘어가는 시기에 중앙신전 곳곳에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아이씨, 성녀님 좀 뵙게 해 달라고! 내가 내일 모래 애가 태어난다고, 인마!”
“술을 처마셨으면 얌전히 집에나 들어갈 것이지.”
“나 돈 많아! 추기경한테 축성 부탁할 수 있다고!”
“그런 불경한 말을! 닥치시오!”
“지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돈 받고 해 줬으면서 불경은 무슨!”
“이 사람이 진짜……!”
신전 외곽에서 술 취한 자와 신전 병사의 충돌을 시작으로.
“우리 딸이 죽어 간다고! 성녀, 성녀님의 축복이 필요해. 만나게 해 줘요!”
“안 된다니까! 이 사람이 정말!”
아픈 아이를 위해 성녀를 찾는 사람.
“커험. 제국의 귀족일세. 성녀님을 뵙고 싶은데.”
“죄송합니다만 성녀님은 지금 수행 중이시라…….”
“아니, 자네.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누군지 몰라? 지금 내 말을 무시하나?”
“그것이 아니오라…….”
갑자기 성녀를 찾는 외국의 귀족들까지.
일시에 이는 소란에 신전의 내외부는 그야말로 시장통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신전 병사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 어수선한 틈을 타 남몰래 성기사들의 움직임을 살피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그러다 어느덧 해가 지고, 신전 주변의 소란도 잠잠해졌을 무렵.
“성기사들이 소란 중 쳐다보는 방향을 파악해 보았습니다. 저희가 추론한 후보지들과 유독 겹치는 곳이 한 군데 있더군요. 여기부터 살펴보시는 게 빠를 듯합니다.”
“오케이.”
검은 옷을 챙겨 입은 빅토르의 모습이 그 순간부터 흐릿해지기 시작했다.